1961,5.16 이한림 장군의 5.16

산하의 오역

1961년 5월 16일 이한림 장군의 5.16


선글라스를 낀 작달막한 투스타 장군이 이끄는 쿠데타군이 1961년 5월 16일 새벽 한강 다리를 건넜다. 그들이 방송국을 장악한 뒤 숙직 아나운서를 시켜 발표한 대로 “은인자중하던 군부”의 일부가 행동을 개시한 순간이었다. 한강 다리를 지키던 헌병대는 쿠데타군에 가담한 해병대의 기세에 눌려 다리를 내 주었고 불과 3천 명에 불과했던 쿠데타 군은 삽시간에 ...서울을 장악하고 대한민국을 손아귀에 쥐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내각 책임제 하의 실권자 장면 총리는 수녀원으로 뛰어들어 머리카락 보일까 꽁꽁 숨어 있었다. 대통령 윤보선이 쿠데타 소식을 접한 후 일성은 “올 것이 왔구나. ”였다. 올 것(?)이 왔는데 그를 막아야 할 사람은 수녀 치마폭에서 나올 줄 몰랐으니 볼짱 다 본 셈이었다.

하지만 쿠데타군은 수천 명에 불과했다. 물론 군 곳곳에 쿠데타에 호응하는 이들이 박혀 있었지만 60만 대군 중 쿠데타군 측이 동원한 병력은 극소수였다. 그리고 5월 16일 새벽 3시 강원도 1군 사령관 관사에서 쿠데타 소식을 듣고 잠에서 쌔어나 “이런 괘씸한 놈들”이라고 부르짖은 1군 사령관 이한림 장군의 휘하의 병력은 수십만 명이었다. 하필이면 전날, 5월 15일은 제1군, 즉 제 1 야전군의 창설 기념일이었다. 당연히 장면 총리도 참석했었고 군 고위 지휘관들이 집결한 축하 분위기에서 술잔도 적잖이 오간 터였다. 그런데 만주군 동기이며 오랜 동안 친구였고빨갱이로 몰려 죽다 살아났을 때에는 밤새 통음하며 위로한 적도 있었던 박정희 녀석이 바로 그 틈을 타서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이한림은 분노했다.

예나 지금이나 제 1야전군이라면 한국군 최강의 병력이다. 이들이 움직인다면 해병대 몇 명이 껍적거리는 쿠데타군은 간단히 진압될 수 있었다. 이한림은 1군단장 임부택에게 출동 준비를 명령했다. 병력을 이동하여 헌정 질서를 무너뜨리는 쿠데타군을 진압하라는 명령만 내려온다면 언제건 서울로 진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명령을 내릴 사람들은 연락이 닿질 않았다. 총리는 앞서 말했듯 수녀원에서 머리카락 보일까 숨어 있었고, 국방장관도 소식이 없었으며 육군 참모총장은 쿠데타군에게 동조하고 있었다. 진압을 시작한다면 국군끼리 피를 볼 일이었고,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군인으로서 ‘출동하라’ 한 마디면 족하겠는데 그 명령을 내릴 사람이 없었다.

다음 날이 되어서야 윤보선 대통령, 내각 책임제 하의 사징적인 대통령이던 윤보선의 특사가 1군 사령부에 닿았다. 대통령의 친서는 공자님 말씀이되 알멩이는 없는 소리였다.
“이번 사태를 수습하는 데 있어서 군의 불통일로 대공역량을 감소 시켜서는 안됩니다. 이 사태를 수습하는 데 불상사가 파생하거나 조금이라도 희생이 발생해서는 안됩니다. 귀하는 무엇보다도 공산군의 남침 대비에 만전을 기해주셔야 하겠습니다. 이 나라에 유리한 방향으로 귀하의 충성심과 노력이 발휘되기를 바랍니다.” 이 말을 들은 이한림 장군은 어안이 벙벙해졌을 것이다. 한국군끼리 피를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문제는 쿠데타가 발생하여 헌정을 무너뜨린 상황 아닌가. 그런데 불상사나 희생은 안된다니 뭐 이런 손발 묶고 자유형 헤엄치기가 있는가 말이다. “한국군끼리 충돌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명제에다가 대통령의 명령까지 곁들여지니 이건 야전군 사령관 이한림이 감당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강원도까지 날아온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는 쿠데타 진압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이미 이한림의 결기는 힘이 빠져 있었다. 이한림은 5월 17일 국기 하기식에서 이렇게 연설한다.

“장병 여러분, 군이 정치에 개입하는 비극의 시간이 왔습니다. 나 는 근본적으로 군의 정치에의 개입을 반대합니다. 있어서도 안되고 용서할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내 생각이나 내 의지와는 관계 없이 대세는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북한군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이 시기에 내란으로 치달을 위기를 조성할 수 없다고 판단되어 부득이 나는 쿠데타 반대 입장에서 묵인하는 입장으로 전환하였음을 여러 장병들에게 알립니다.”

이로써 불법적인 쿠데타를 막아설 민주공화국의 무력은 사라졌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르고 시대에 따라 변하리라 여긴다. 그러나 1961년 5월 16일의 그의 위치는 명확히 반란군이었다. 그리고 그의 친구 이한림은 자신의 친구 박정희를 막아서리라 결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극히 맞는 말 같지만 너무나도 무책임한 소리, “조금이라도 희생이 발생해선 안된다”는 대통령의 친서 앞에 그 결심은 무뎌졌고, 결국 이후 근 30년에 이르는 군부 통치의 서막은 활짝 열리고 만다.

어느 때에나 마찬가지다. 공자님 말씀하기는 참 쉽다. 누구를 탓할 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성찰이 필요하며, 우리 모두의 책임이며, 우리 모두 반성해야 할 일인 것이다. 거기서 누구의 잘잘못을 따져 봐야 아무 도움이 안되는 우리 모두의 과오인 것이라고 폼 잡기는 정말로 쉽다.

하지만 대개 역사에서 이런 공자님 말씀들은 대개는 누군가의 장식품으로만 빛나게 마련이고 사실은 최악의 상황으로 이끄는 지름길 노릇도 불사한다. 바로 윤보선이 한 소리였다. 국군끼리 싸워서는 안 된다는 명제는 훌륭했으나 그 국군이 헌정질서를 밧다리 한판으로 무너뜨릴 때에 사용될 수 있는 명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2012년 5월 16일 50여년 전 쿠데타군이 긴박한 분위기에서 한강다리를 건너던 날, 민주주의에 대한 쿠데타를 일으키고 자신들의 탐욕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있는 이들에게 “우리 다 같이 성찰해보자,”는 말이 때로는 무지하게 어리석은 것처럼 말이다.

이한림 장군은 며칠 전 아흔 하나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의 명복을 빌며 5.16을 보낸다.

by 산하 | 2012/05/17 18:11 | 산하의 오역 | 트랙백

1988,5.15 한겨레신문의 창간

산하의 오역

1988년 5월 15일 한겨레신문 창간

대학 신입생 시절 부산에 집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그닥 좋은 점이 못되었다. 대학생이 됐답시고 전국을 헤매고 다니던 대학 친구들의 여행의 종착지가 대개 부산이었고 나는 손님 치르다가 여름 방학을 다 보냈으니까. 그 중에 지금은 미국에서 교수하고 있는 광주 친구가 하나 있었다. 이 녀석이 부산을 떠나던 날 터미널에서 조금 낭패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신문이나 하...나 사야 쓰겄다.”라는 말을 남기고 매점으로 간 녀석이 주인과 말을 꽤 오래 섞는 걸 보고 뭘 하나 싶어 다가갔더니 약간의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녀석의 말인즉슨 이랬다. “한겨레가 왜 없어요? 그것이 진짜배기 신문인디.” 87년 대선으로 전라도 김대중에 대한 감정이 가시지 않은 도시에서 전라도 말 징하게 써 가면서 한겨레를 찾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었기에 녀석을 억지로 끌고 나오긴 했는데 나오면서도 녀석은 소리를 질렀다. “한겨레 신문 꼭 갖다 노씨요 아저씨.”

그 녀석이 원하던 ‘진짜배기 신문’ 한겨레 신문이 1988년 5월 15일 태어났다. 그 창간호를 주워들던 순간의 느낌은 지금도 첫 미팅 나가던 숙대 앞 정경처럼 눈에 선하다. 백두산 천지 위에 판화같은 글씨로 쓰여진 한겨레신문은 사실 신문이라기보다는 좀 세련된 인쇄물처럼 보였고, 논조도 신문이라기보다는 팜플렛을 보는 것처럼 생경하고 뚝뚝했다. 하지만 신문이었다. 일간신문이었다.

한겨레신문이 우리 앞에 오기까지 수많은 곡절이 있었겠지만 한겨레라는 제호가 정해지는 것도 꽤 오랜 진통을 겪었다. 물망에 오른 후보작은 4개였다. 한겨레신문, 민주신문, 독립신문, 그리고 자주민보. 유신정권 시절 동아일보 기자들이 해직당할 때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고 일갈하며 사표를 던졌던 편집국장이자 초대 한겨레 사장을 지내는 송건호는 ‘독립신문’을 선호했다고 하고, 수십 명의 추진위원들이 뽑은 제호는 ‘자주민보’였다. (오늘날의 자주민보를 알기에 나는 앙천대소한다. UFO가 조선인민공화국의 비밀 병기라는 판타지 언론이 자주민보다) 하지만 이 고리타분한 제호 자주민보에 당시 젊은 축들은 일제히 반발했다고 한다. “하여간 노땅들은 안된다니까!” 이들이 제시한 것은 젊은 층에 대한 여론조사였다. 어디에 의뢰에서 전국적으로 수만 명을 조사할 깜냥은 못되고, 직원 등 200명과 대학생 200여명의 의견을 청취한 결과 ‘한겨레’로 낙착을 본다.

이 한겨레 창간 정신의 시원(始原)을 따지자면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한 한 해직기자의 꿈을 들 수 있겠다. “새 시대가 오면 온 국민이 골고루 출자해서 국민이 주인이 되는 신문사를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참으로 민중을 위한 신문이 되기 위해서는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글전용을 해야지요!” 이 말을 한 사람은 동아일보 해직기자 안종필. 경남고등학교를 나온 부산 사나이였던 그는 자유언론실천선언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가 잘린 뒤 신문에 나지 않는 소식들을 모아 ‘민주인권일지’를 냈다가 콩밥을 먹는데, 그 감방 안에서 박정희의 죽음을 접하고서 이런 예언같은 사자후를 토해 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로부터 석 달 뒤 세상을 떴다.

6월 항쟁의 불바다가 지나간 후 들이닥친 무더위 속에서 안종필의 외침은 극적으로 되살아난다. 국민 모두가 주식을 형식으로 창간에 참여하고 그 종잣돈으로 신문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신문을 만들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는 저주와 “50억을 모아요? 그럼 재야와 운동권 자금은 씨가 마르겠군요.” (이해찬) 같은 우려와 “그 돈이 있으면 정권타도투쟁을 해야지 새 신문이 더 급한가?”(고 박현채 교수)라는 호통까지 한겨레의 시작에는 많은 시선과 발언들이 얽혀 있었다.

한겨레 신문 창간 기금 마련 광고가 나가면서 많은 이들의 호응이 있었다. 동아일보 백지 광고 투쟁 이후 바른 말 하는 신문과 옳은 글에 목숨 거는 기자들에 굶주렸던 이들이 한 푼 두 푼 금자탑의 밑돌이 되었는데 한 대학생의 이야기는 가슴을 찡하게 한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87년 1월 고문치사당한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씨의 이름으로 주식 100주(50만원)을 청약한다. 무슨 사연인지 밝히지도 않고 이름도 알려주지 않고 돌아가려는 학생을 붙들고 설득한 끝에 박정기씨와 통화를 하게 했는데 대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성금으로 보내려고 틈틈이 모은 돈인데 이렇게 전해 드리는 게 더 뜻있는 것 같아서......” 박정기씨도 울고 통화를 지켜보던 기자들도 울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한겨레신문은 점차 그 형상을 스스로 그려내기 시작한다.

87년 대통령 선거의 실패 이후의 분위기는 요즘 말로 ‘멘붕’이었다. 지난 총선에서의 ‘멘붕’이 축대가 무너진 정도라면 87년의 멘붕은 63빌딩과 삼풍백화점을 합친 멘붕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세상에 6월항쟁 그 난리를 치고도 군부의 후계자가 대통령이 되다니, 아니 우리 스스로 그걸 만들어 주다니. 한겨레 신문 기금 모금도 주춤할 수 밖에 없었다. 가히 짐작이 간다. 야 이런 거 해서 뭐하냐는 한탄부터 엽전들이 뭘 한다고 하는 절망까지. 그때 한겨레를 준비하던 사람들은 지금도 의미 있는 모금 카피 하나로 사람들의 눈을 찌른다. “민주화는 한판의 승부가 아닙니다.”

대통령 선거 전 10억이 모였는데 대선이 끝난 후 두 달 동안 40억이 몰려들었다. 우리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웅크리고 있어 봐야 별 수 없고, 대통령 선거 졌다고 세상 끝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국민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겨레신문은 그 거대한 자각이 분출할 수 있는 하나의 통로가 되어 준 것이다. 역사는 승리로 인해 한 발 당겨지지만 패배로 인해 두 발 거리를 건너뛰기도 하는 재주를 부린다. 한판의 승부에서 졌다고 슬퍼하고 술 마시고만 있지는 않았던 사람들 모두의 작은 승리, 그것은 국민주신문 한겨레 신문의 탄생이었다. 1988년 5월 15일이었다.


by 산하 | 2012/05/17 18:07 | 산하의 오역 | 트랙백 | 덧글(1)

1975.5.13 긴급조치 9호

산하의 오역

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 9호

20대들이 박근혜 대표를 일컬어 유신공주 운운하는 걸 들으면서 나도 유신을 잘 모르는데 쟤들은 유신을 어떻게 상상하고 저런 표현을 쓰는 걸까 고개를 갸우뚱한 적이 있다. 뭐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봐야 알겠냐마는, 사실 유신이란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 내 또래나 그 이후 세대가 실감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럴 때 1973년 5월 13일 근엄하게 발표된 긴급조치의 결...정판, 마치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처럼 유신 독재의 열정(?)과 혼(?)이 담긴 걸작품 긴급조치 9호를 읽으면 조금은 그 시대를 피부로 느끼게 된다. 물론 그래봐야 접시물에 손가락 담그는 정도겠지만.

긴급조치 9호

① 다음 각 호의 행위를 금한다.

가.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거나 사실을 왜곡하여 전파하는 행위
나. 집회·시위 또는 신문, 방송, 통신 등 공중전파 수단이나 문서, 도화, 음반 등 표현물에 의하여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반대·왜곡 또는 비방하거나 그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청원·선동 또는 선전하는 행위 
다. 학교 당국의 지도, 감독 하에 행하는 수업, 연구 또는 학교장의 사전 허가를 받았거나 기타 예외적 비정치적 활동을 제외한 학생의 집회·시위 또는 정치 관여 행위
라. 이 조치를 공연히 비방하는 행위

② 제1에 위반한 내용을 방송·보도 기타의 방법으로 공연히 전파하거나, 그 내용의 표현물을 제작·배포·판매·소지 또는 전시하는 행위를 금한다.
③ 재산을 도피시킬 목적으로 대한민국 또는 대한민국 국민의 재산을 국외에 이동하거나 국내에 반입될 재산을 국외에 은닉 또는 처분하는 행위를 금한다.
④ 관계 서류의 허위 기재 기타 부정한 방법으로 해외 이주의 허가를 받거나 국외에 도피하는 행위를 금한다.
⑤ 주무부장관은 이 조치 위반자·범행 당시의 그 소속 학교·단체나 사업체 또는 그 대표자나 장에 대하여 다음 각 호의 명령이나 조치를 할 수 있다.

가. 대표자나 장에 대한, 소속 임직원·교직원 또는 학생의 해임이나 제적의 명령
나. 대표자나 장·소속 임직원·교직원이나 학생의 해임 또는 제적의 조치
다. 방송·보도·제작·판매 또는 배포의 금지 조치
라. 휴업·휴교·정간·폐간·해산 또는 폐쇄의 조치
마. 승인·등록·인가·허가 또는 면허의 취소 조치

⑥ 국회의원이 국회에서 직무상 행한 발언은 이 조치에 저촉되더라도 처벌되지 아니한다. 다만 그 발언을 방송·보도·기타의 방법으로 공연히 전파한 자는 그러하지 아니한다.
⑦ 이 조치 또는 이에 의한 주무부장관의 조치에 위반한 자는 1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이 경우에는 10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병과한다. 미수에 그치거나 예비 또는 음모한 자도 또한 같다.

⑧ 이 조치 또는 이에 의한 주무부장관의 조치에 위반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구속·압수 또는 수색할 수 있다.

⑨ 이 조치 시행 후,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2조(뇌물죄의 가중처벌)의 죄를 범한 공무원이나 정부관리·기업체의 간부직원 또는 동법 제5조(국고손실)의 죄를 범한 회계관계직원 등에 대하여는, 동법 각조에 정한 형에, 수뢰액 또는 국고손실액의 10배에 해당하는 벌금을 병과한다.

⑩ 이 조치 위반의 죄는 일반법원에서 심판한다.
⑪ 이 조치의 시행을 위하여 필요한 사항은 주무부장관이 정한다.
⑫ 국방부 장관은 서울특별시장, 부산시장 또는 도지사로부터 치안질서유지를 위한 병력출동의 요청을 받은 때에는 이에 응하여 지원할 수 있다.
⑬ 이 조치에 의한 주무부장관의 명령이나 조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아니한다.
⑭ 이 조치는 1975년 5월 13일 15시부터 시행한다

그러니까 유신 헌법에 대한 ‘비방’조차 금지되며, 이 조치를 위반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구속, 압수 수색될 수 있으며, 국회의원도 술 한 잔하며 말하는 거까진 괜찮은데 언론에 대고 떠들면 똑같이 취급되며, 계엄도 아닌데 시장과 도지사가 군 병력을 부르면 달려갈 수 있으며, 이 조치에 따른 장관의 명령은 사법적 심사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 가히 요즘으로 따지면 카자흐스탄이나 이름도 들먹이기 어려운 아프리카쯤의 어느 나라 정도는 되어야 감히 견줄만한 독재의 걸작품이다. 새마을 운동이 전 세계 몇 개국에 수출되었는지는 모르나 이 긴급조치 9호 역시 그 이상의 수의 나라에 수출되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시절 퍼스트 레이디 노릇을 하던 영애께서는 유력한 공화국의 대통령감으로서 오늘도 일로매진 중이시다. 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 9호가 대한민국을 때렸다.

by 산하 | 2012/05/17 18:06 | 산하의 오역 | 트랙백 | 덧글(1)

1956.5.12 한국 TV방송의 시작

1956년 5월 12일 한국 TV 방송의 시작

사연은 태평양 전쟁까지 거슬러 오른다. 처음에는 기고만장 잘 나갔지만 미드웨이 해전에서 참패한 후 기세가 꺾이고 차츰차츰 밀리다가 가미가제와 반자이 돌격으로 연명하며 패전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던 일본은 그 사실을 숨기려고 무진 애를 썼다. 조선총독부는 그런 정세가 한국인에게 전파될까 봐 '외국 단파 방송 청취 금지령'을 공포하고 한국에 와 있던 외국인 선...교사를 추방하는 등 발버둥을 쳤지만, 이미 ‘방송을 알았던’ 경성방송국 한국인 직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송출되는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과 중국 국민정부가 송출하는 중경방송국 한국어 방송을 듣고 있었다.

꼭 그들의 입에서 나온 얘기만은 아니었겠지만 일본은 망한다는 소문이 꽤 파다하게 퍼졌고, 일본 관헌들은 꼭 60여 년 뒤 “누가 양초값을 댔느냐”고 물은 아무개처럼, “누가 외국 방송을 듣고 있는 거냐?”고 이를 갈았고, 자연스럽게 경성방송국 직원들이 그 성마른 마수에 걸려들고 말았다. 1942년 말부터 1943년에 걸쳐서 경성방송국은 쑥대밭이 됐다. 경성방송국 직원 6명을 비롯 150여 명의 방송인과 민간인 수백 명이 체포됐다. 당시 방송인 150여명이라면 거의 조선 땅에서 방송을 안다는 사람의 대부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가운데 6명은 창살 안에서 숨져 갔다. 고문 후유증이었다.

이 광풍에 휩쓸린 사람 가운데 황태영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평안도 출신의 그는 일본에서 공부하며 방송 기술을 익혔고, 1935년 경성방송국에 입사했다가 전북 이리 (요즘은 익산) 방송국의 기술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단파수신기를 만들 줄 알았던 그는 수신기를 만들어 집에서도 듣고 회사에서도 듣고 하다가 그만 된서리를 맞는다. 다행히 감옥살이는 면했지만 엄청난 벌금을 물고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는 해방 이후에도 방송 업계에 종사하면서 미국 RCA사 한국 지사를 운영하던 중 정부로부터 방송 장비 수입을 의뢰받고 미국에 간 길에 동전을 넣고 TV를 보는 미국인의 모습을 보고 색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도 TV 방송국을 만들어 보자.”

배고파서 죽는 아이들이 속출할만큼 전쟁의 뒤안길에서 헤매던 나라에서 TV 방송이라니! 관련 기관 공무원들은 단호히 황태영의 꿈을 거부했다. 하지만 황태영도 만만한 사내가 아니었다. 한국어 문장에는 뜻밖에 서툴렀지만 영어와 한자에는 능통했던 희한한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에게 영문으로 구구절절 상소를 써서 올렸고, 이승만이 공무원들에게 “님자들 이거 한 번 해 보라고 하지 그럽네까?” 한마디 하면서 마침내 황태영은 1956년 5월 12일 한국 최초의 방송국 설립자가 된다. HLKZ TV 라는 이름이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 태국 필리핀에 이은 4번째.

이 방송국의 방송 제작을 지휘한 사람이 최창봉이다. 1990년대 초 손석희가 구속되었던 MBC 파업 투쟁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의 이름도 귀에 설지 않을 것이다. 그때 MBC 노조가 물러가라고 목이 쉬었던 사람이 바로 최창봉 당시 MBC 사장이다. 그의 머나먼 미래는 그렇다고 치고, 그는 한국 TV 방송의 산파라고 해도 무방한 사람이었다. 최창봉의 얘기를 옮겨 보자. “6월의 방송 개시를 앞두고 5월 12일부터 3일간의 시험 방송준비 지시가 하달된 것은 요원들이 정시 출근을 시작한 5월 1일이었다. 장님들이 코끼리 다리를더듬어 볼 시간적 여유는 11일 뿐이었다. ” 그 장님들이 그린 코끼리가 마침내 5월 12일 시험방송 겸 개국이라는 이름으로 그 둔중한 발걸음을 내딛는다. 한국 역사상 최초로 방송 전파를 탄 프로그램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성경린씨가 지휘한 만파식적지곡과 수제천의 아악 연주였다. 전국에서 이를 지켜본 사람이 극장 하나의 관객 수보다 적은 TV 방송의 시작이었다. 이후 2시간 동안 영화와 가요 등이 어우러진 국내 최초의 ‘버라이어티 쇼’가 펼쳐졌다. 이때 신카나리아, 박시춘 남인수 등이 출연했는데 이들의 소속사에는 출연료 대신 ‘무료 광고’의 혜택이 주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을 통틀어 TV 수상기가 수백 대를 넘지 못하던 시절의 TV 방송국이란 개미 다리 위에 얹어진 코끼리 몸집같은 존재였다. 가장 큰 수입 중의 하나가 가두에 설치된 TV를 신기하게 보고 몰려든 사람들을 노린 광고료였다고 하니 알만하다. 1년을 버티던 HLKZ-TV는 한국일보에 넘어갔고 DBC로 재단장하여 제법 방송국다운 프로그램들을 만들어내면서 한국 TV 방송을 개척해 갔으나 그만 불의의 화재를 만나 홀라당 다 태워 먹고 문을 닫는다.

케이블 티븨까지 치면 수십 개에 달하는 채널들을 이리저리 재핑하다 보면 그 명징하고도 화사한 화면과 사람들의 혼을 빼는 재미와 감동으로 무장한 수백 개의 프로그램의 홍수에 질려 결국은 전원 버튼을 꺼 버릴 때가 있다. 그 큰물의 시작이 1956년 5월 12일이었다. 사진은 8세난 윤복희 어린이가 열창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우리가 아는 그 윤복희다.

by 산하 | 2012/05/17 18:04 | 산하의 오역 | 트랙백

1994.5.11 김순경의 복직

산하의 오역

1994년 5월 11일 김순경의 복직

1992년 한 여인이 모텔방에서 살해당한 채로 발견됐다. 당연히 수사 방향은 두 가지다. 강도에 의한 것, 또는 면식범에 의한 치정살인. 그런데 살해당한 여인은 현직 순경의 애인이었고 신고자는 김모 순경 자신이었다. 김모 순경은 전날 모텔에 함께 투숙한 뒤 아침 일찍 근무를 7시경 근무를 나갔다 고 하고, 10시경 되돌아와보니 애인이 죽어 있었다고 신고한 것이다.... 부검 결과 김모 순경의 거짓말(?)이 밝혀진다. 부검 결과 사망 시간이 새벽 3시에서 5시로 추정된 것이다. 즉 김순경이 애인과 함게 모텔에 있었던 시간이었다. CCTV를 틀어보니 김순경이 모텔을 나간 시간은 그의 증언대로 7시였다. 경찰은 그 부검 결과를 들이대며 김순경을 족치기 시작했다.

경찰은 사흘에 잠을 세 시간 가량 밖에 재우지 않으면서 자백을 강요했다. "시체가 말을 해 주는데 왜 거짓말을 해. 너 7시에 나갔다며. 니 애인은 최소 5시에 죽었어. 빨리 불어." 그리고 협박과 회유를 번갈아 했다. "너 시경 강력계에 넘어가면 죽음이야. 그나마 한솥밥 먹은 우리한테 불어. 모든 정황과 증거가 불리하니 20년 징역도 기본이야. 하지만 빨리 시인하고 유족하고 합의하면 집행유예도 가능해." 김순경은 버티다 못해 견디다 못해 자신의 범행(?)을 시인한다. 하지만 서울 시경 강력계에 넘어가서 다시 혐의를 부인하게 되는데 역시 서울 시경 강력계에 넘어가면 죽음이라는 동료 경찰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들은 수갑을 뒤로 채워 의자에 앉히고 거의 나흘 동안 잠을 못자게 하는 심문으로 비몽사몽간에 자백을 받아 냈다.

검찰도 마찬가지였다. 검찰은 "처음에 자살로 신고했고, 가족이 있는 자리에서도 범행을 인정했으며, 현장 검증까지 했다."며 기소를 밀어부쳤다. 자살로 신고한 것은 겁이 나서였으며 범행을 인정한 것은 담당 형사의 고문 협박 때문이었다는 김순경의 항변과 현장 검증을 저 좋아서 한 건 아니라는 객관적 사실은 깔끔하게 무시된다. 판사 또한 비슷했다. 물증 외에 자백 밖에 없는 사건이었지만 판사들은 기이한 신념으로 범인이 김순경임을 선언했다. 징역 12년이 김순경이 받은 형량이었다. 1심과 2심 모두에서였다.

문제는 이 사건에 증거가 없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다. 모텔방에서 다른 남자의 정액이 묻은 휴지가 발견됐고 침대 위에서 다른 남자의 발자국도 나왔으며, 피해자의 지갑에서 수표가 사라졌음에도 그 수표의 사용처를 추적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망 시간은 어디까지나 '추정'이었지 '확정'은 아니었다. 김순경이 범인이 아니라는 정황도 얼마든지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은 깡그리 무시되었던 것이다. 저 녀석이 범인이야! 라는 주관적인 예단 아래.

웃기는 일은 3심이 진행 중이던 상황 하에 벌어졌다. 강도짓을 하다가 붙잡힌 서모군(당시 18세)이 취조를 받던 도중, 자신이 작년에 있었던 경찰관 애인 살인사건의 진범이라고 자백한 것이다. 실제 사건은 사망 추정시각인 오전 3시에서 5시 사이가 아니라 오전 7시에 김모 순경이 여관을 나간 직후, 서모군이 여관방에 침입해 혼자 자고 있던 애인을 강간하고 살해한 뒤 금품을 빼앗아 도주한 것이 사건의 진상이었다. 세상에 이런 황당한 일이. 서모군은 피해자의 수표를 사용했던 것으로 드러났고, 범인이면 알지 못할 현장 상황을 진술했다. 그리고 또 하나 결정적으로 김순경을 옭아맸던 사망 추정 시각은 검시의가 시신을 보고 작성한 것이 아니라 경찰의 보고 내용을 토대로 검시 보고서를 작성함으로써 발생했던 오류였다. 10대 강도범의 자백 하나에 경찰,검찰 그리고 "여러 증거들을 종합해 볼 때, 피고인의 범죄 사실은 살인의 고의를 포함하여 충분히 인정할 수 있고, 기록을 살펴 보아도 원심의 사실인정 및 판단 과정에 아무런 위법을 발견할 수 없다"고 판시한 재판부까지 하루 아침에 바보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1994년 5월 11일 김순경은 경찰에 복직했고 연고지인 수원에 배치돼 근무를 시작한다. 아니할말로 그쪽 방향으로 오줌도 누기 싫을 처지였겠으나 그는 경찰 복직을 원했다. 이유는 감옥 안에서 겪었던 사람들이었다. "열 사람의 범인보다 한 사람의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게 사법기관의 일이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수형 생활 중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20 여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탄원서를 써 주며 과연 진실은 어디에 있는지 불면의 밤을 보내기도 했다. 그런 이들을 돕기 위해 경찰을 하고 싶다."

한 청춘을 지옥으로 몰아넣을 뻔 했던 대한민국이 김순경에게 어떤 보상을 했는지, 그리고 그를 범인으로 지목하여 협박하고 으르댔던 이들이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알고 싶지도 않다. 다만 김순경이 지금까지 꿋꿋하게 과거의 다짐대로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서 애쓰는 경찰로 살아가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요즘 이상한 정치인이 인용해서 그 값어치가 현저하게 왜곡되긴 했으나 "유죄로 추정할 증거가 없으면 무죄"는 형사 사건에서는 포기할 수 없는 진리다.


by 산하 | 2012/05/17 18:03 | 산하의 오역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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