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로그


박형규 목사님의 명복을 빌며 by 산하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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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외국에 갈 때 종 세 명에게 각각 다른 액수의 달란트를 준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갔다 오니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장사를 해서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고,두 달란트 받은 사람도 두 달란트를 남겼는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당신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고 말한다. 주인은 펄펄 뛰면서 이 게으른 녀석아. 내가 뭘 심지도 않고 거두는 줄 알았냐 즉 우리 말로 하면 나는 땅 파면 돈 나오는 줄 알았냐 하고 꾸짖고는 그가 가진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이에게 주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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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예수를 자본주의 찬양자처럼 묘사하며 “돈 버는 자의 미덕”을 얘기하는 사람에서 달란트 금화를 실제로 땅에 묻어 놓고 재산 가치의 상승을 노렸던 그 시대의 불로소득자에 대한 분노라는 설까지 각양각색 컬러풀하다. 그 와중에 고개를 끄덕인 해석 중의 하나는 이 달란트는 각각 다른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주신 능력,인성, 환경 등등을 빗댄 개념이라는 것이다. 우리 말로 하면 그릇이라고 할까 팔자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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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다 보면 참 달란트 많이 받았다 싶은 사람도 있고, 저 달란트 가지고 왜 저렇게 사노 싶은 사람도 있고 달란트는 적게 받았어도 묵묵히 그 이상을 해 내는 사람도 있다. 가끔씩은 자신의 달란트를 모두 소진해 가면서 다른 사람들의 달란트를 만들어 나누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이들을 위인 또는 인물이라고 표현한다. 돌아가신 박형규 목사님도 그런 분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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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규 목사가 서울 제일교회에 담임목사로 초빙됐을 때 장공 김재준 목사는 이런 설교를 하셨다고 한다. “목사가 설교하는 이 강단은 목숨을 거는 곳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순교를 각오해야 한다. 진리와 교회를 지켜야 한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알았더라면 김재준 목사는 결코 위와 같은 당부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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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목사 시무실에 폭력배들이 난입하고 “열 셀 때까지 교회 포기한다고 안하면 죽인다.”고 버티는 목사 앞에서 열을 세고, 그예 주먹을 휘두르고 전도사들이 울부짖으며 몸을 던져 막는 저편에 깡패 새끼가 “내 이 목사 새끼를 오늘은 죽여 버린다”고 망치와 함께 봉투에 든 못을 쩔그렁거리던, 그 끔찍하고도 길었던 제일교회의 수난을 한 치라도 예감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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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박형규 목사는 자신의 미래를 예감했던 것일까. 원래 눈물이 흔치 않던 양반이 ‘비장감에 휩싸여’ 펑펑 울면서 축도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장공 김재준 목사의 당부를 자신의 몸뚱이를 내던져 지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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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유신이라는 민주주의의 막장이 펼쳐진 상황에서 박형규 목사는 감옥을 제집 드나들듯 하며 하느님이 자신에게 주신 달란트를 발휘한다. 제일교회의 이름은 유신 때부터 눈엣가시였지만 전두환 때로 접어들면 국군 보안사령부가 대놓고 때려 부숴야 할 ‘주요 타격 대상’으로 부상했고 교회에 폭력배를 투입해 예배 방해에 나서는 세계 기독교 사상 유례가 드문 일이 벌어진다. 그 깡패 중 한 명은 서진룸살롱 사건을 일으킨 서울목포파의 별동대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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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패들이 교회를 뒤덮었다. 교인들은 쫓겨났다. 목사와 전도사들은 감금됐다. 청년교인들이 깡패들과 사투를 벌이고 목사가 깡패에게 죽음의 위협을 당하던 상황, 60시간 감금당한 목사 앞에 대학생이던 아들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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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항복하시라고 설득하러 왔다고 말하고 들어왔어요. 하지만 항복하시면 안됩니다. 이 말씀을 드리러 왔습니다. 저도 여기 있겠습니다.” 청년들도 외친다. “목사님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저희도 끝까지 함깨 있겠습니다.” 박형규 목사는 그때 유신의 법정에서 심문받던 도중 “했으면 했다 하고 안했으면 안했다 해라. 사내 자식이 비굴하게 굴지 마라.”고 호령하던 어머니를 떠올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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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용기의 달란트는 서로를 부추기고 서로에게 나눠지면서 커진다. 박형규 목사는 깡패들의 폭력에 만신창이가 되면서도 고개를 쳐들고 싸운 깡다구 넘치는 예수쟁이들을 이끌고 중부경찰서 앞으로 간다. 언뜻 보면 ‘적의 심장부’에서 도전장을 내미는 행위 같이 보였지만 내막은 안스러웠다. 그래도 경찰서 앞에서는 깡패들이 난리를 치지 못할 것이라는 빈약한 믿음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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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제일교회는 세상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됐다. 하늘을 지붕 삼고 서울 명동 근처를 감싸고 수천 명의 예배 관전자에 경찰서의 호위(?)까지 받는 교회가 세상에 어디 있었으랴. 처음에는 육성으로, 손나팔에 목이 쉬어가며 예배를 봤지만 핸드마이크가 등장했고 나중에는 전자오르간까지 꾸역꾸역 들고 왔다. 그리고 그들이 부르는 합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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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맡겨 삶이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듯이 주 뜻이 이뤄지이다 외치며 사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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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그보다 아름다운 찬송이 있었으랴. 그보다 예수를 기쁘게 한 노래가 있었으랴. 그보다 더 예수의 뜻에 맞는 예배가 예수 승천 후에 얼마나 되었으랴. 그 가운데에 박형규 목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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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파괴하자는 공작은 1981년경부터 국군보안사령부가 비밀리에 수행해 온 것이 분명합니다...나는 여기서 도저히 폭력에 굴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분들에게도 분명히 했고, 일단 이 폭력에 굴복하면 이제 마지막 보루인 교회마저 그 음성적인 폭력에 굴복하게 되니까 이제 국민을 대변할 어떠한 기관도 없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최후의 보루를 순교의 각오로 지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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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위대한 현대사’에 대한 폄하를 개탄했다. 나는 그 개탄에 동의한다. 우리 현대사는 위대했다. 유신 독재, 그리고 흡혈귀같은 전두환 독재에 맞서서, 사람 백정 같은 깡패들에 맞서서 그토록 결연히 싸우고 결코 지지 않았으며 누가 이기나 해 보자고 고개 쳐들어 눈 부라리던 그 위대한 용기의 달란트의 역사, 하느님이 준 달란트를 열 배 스무 배 생산해 내던 ‘선하고 부지런한’ 종들의 역사를 어찌 헬조선의 역사라 오도할 수 있으랴, 찌질한 역사라 깎아내릴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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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규 목사의 명복을 다시 한 번 빈다. 그리고 그를 우리 역사에 주심을 하느님께 감사한다. 목사님 안녕히 가십시오. 감사했습니다. 

국가대표 2를 보고 생각난 사람 by 산하

"돌아보지 말라" - 국가대표 2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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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능가하는 속편 있나 뭐.” <국가대표 2>를 보고 나온 딸의 소감입니다. 딸은 <국가대표1>이 더 나았고 <국가대표2>의 경우 억지로 감동을 짜내려 했던 장면들이 간간이 눈에 띄는데다가 탈북자의 사연이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다른 선수들의 캐릭터가 죽었다고 평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매우 집중해서 보았고 딸이 말한 단점에다가 내 기억 속에서 미스캐스팅의 표본으로 남게 될 오달수 감독님과 초코파이 등 작위적인 소품 등등 성에 안 차는 부분이 여럿 눈에 띄었음에도 <국가대표1>보다 더 가슴에 와 닿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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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사실 간단합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격인 탈북자 아이스하키 선수를 만난 적이 있었고 그녀의 기억을 프리즘으로 하여 이 영화를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5년 쯤 전, 작가가 북한에서 아이스하키 대표팀까지 했던 탈북 여성 황보영씨를 아이템으로 해 보면 어떨까 제안 했고 그때까지만 해도 탈북자를 별로 본 적이 없었던 나는 호기심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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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의 하루는 다소 지루했습니다. 탈북한 지 얼마 안되었고 남한의 ‘문물’에 아직 적응되지 않았기에 DDR을 밟아 보는 것도 햄버거를 먹는 것도 처음이었으니 ‘초보 대한민국 국민’ 컨셉으로 찍기는 했는데 사실 사람들의 관심을 확 끌만한 재미는 없었고 그러다보면 찍는 사람도 신명이 덜 나지요. 오히려 제가 아 시간이 아쉽다, 이분을 며칠 같이 있으며 찍었으면 좋겠다 싶었던 건 촬영 막바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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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저것 시켜 보고 질문도 하다가 불현듯 “남한 와서 제일 힘든 게 뭐예요?”라고 물었을 때 그녀는 한동안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응? 하면서 뷰파인더에서 눈을 떼고 괜시리 친절히 웃으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이라고 재차 물었을 때 그녀는 억센 함경도 사투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전엔 아무래도 서울 말을 겉으로 바른 함경도 사투리였는데 그 대답은 껄끄러운 사포처럼 억센 원단 함경도 사투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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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는 거요. 북한은 정말 굶어 죽냐. 정말 이러이러하냐 다 아는 걸 묻고 또 물어요. 아는 걸 왜 묻는지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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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내 유순해 보였던 인상이었던 그녀였으나 이 대답을 하던 순간은 제게 보디체크라도 퍼부을 듯 그 눈동자에 전의(戰意)가 서려 있는 걸 보았습니다. 그녀는 북한이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리던 시절, 먹고 살기 위해 탈북을 감행한 처지였는데 그 사정을 믿든 그렇지 않든 꼬치꼬치 캐묻고 파고들어 그녀를 힘들게 했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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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진보 정당’ 소속의 사람들이 “북한 경제 위기는 과장됐고 수십만 아사자도 거짓말”이라고 얼마 전까지도 우기는 걸 들었으니 필시 유사한 질문도 받았을 것이고, “뭘 잘못해서 넘어 온 거 아냐?”는 류의 의심 반 힐난 반의 핀잔 같은 물음도 낯설지 않았겠지요. 영화에서처럼 “나라 배신하고 온 게 무슨....”하는 공격에도 익숙했을 것이고요. 그런 판에 영문 모르는 PD가 “제일 힘들었던 것”을 재우쳐 물으니 문득 촬영 내내 유지해온 신중함의 벽이 무너졌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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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표정이 풀어진 건 아이스하키 얘기가 나왔을 때였습니다. 들어도 잘 모르는 북한식 아이스하키 용어를 써 가며 설명하는데 애매한 맞장구를 쳐 주다 보니 이런저런 사연들이 줄창 흘러나왔으니까요. 그녀는 한국에 여자 아이스하키팀이 없다는 걸 아쉬워했습니다. 간호 조무사 학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장차 꿈을 물으니 이렇게 얘기했으니까요. “열심히 공부해서 간호사가 되는 게지요.” 그리고 덧붙였습니다. “한국에는 아이스하키 팀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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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이 나간 날 항의 전화 하나를 받았습니다. 간호사라고 밝히는 시청자는 모서리가 난 서울말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여자분 간호 조무사 학원 다닌다면서 왜 간호사가 꿈이라는 인터뷰를 하지요?”
“아? 네... 네... 그냥 소망이라는 정도로.... 이해해 주셨으면......” 
“간호사 그렇게 할 수 있는 줄 아세요? 4년제 대학을 나와야 하고... 어찌 어찌 해야 하고...북한에서 넘어와 가지고 조무사 학원 다니면서 무슨 간호사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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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을 들으면서 저는 울컥하고 말았습니다. 간호사의 직업적 프라이드는 인정한다 해도 ‘북한에서 넘어와’ 운운에서 빈정이 팍 상했던 것이지요. 그날 그 간호사 분은 혈압 좀 올라갔을 겁니다. 평소 온유한 편이지만 한 번 눈이 돌아가면 상대방 약 올리는 재주는 약간 있는 편이거든요. 어떻게 약 올렸는지는 성실하고 선량한 간호사 분들의 항의를 받을 수 있어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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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한 마디면 끝날 수 있었던 통화를 굳이 말의 칼을 뽑아가면서 하늘같은 시청자에게 따박따박 대거리를 것은 하루 종일 함께 다녔던 한 함경도 처녀가 헤쳐나가야 할 삶의 막막함에 공감했고 그게 효과가 있든 아니든 옳든 그르든 그녀의 편에 서 주고 싶었기 때문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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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가대표2>에서 아내와 딸이 ‘스테레오타입이다’고 평한 탈북자들의 사연에 일면 동의하면서도 거기에 스스럼없이 녹아든 이유도 그랬을 겁니다. 한국에서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팀이 생기고 황보영씨가 다시금 황보영 ‘선수’가 됐다는 신문 기사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가 얼마 후 북한 선수들이 던지는 ‘배신자’ 소리에 얼음인간이 되고 말았다는 보도에 인상을 구긴 기억이 있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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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애의 어여쁜 얼굴에 뭉툭하고 수더분했던 황보영 선수의 인상이 겹쳐 보였고 북한 선수가 “나는 개가 짖는 소리는 못들어” 라고 일갈할 때 수애의 표정, 남한 선수가 “제 나라 배신하고 온 게...”라고 핀잔을 줄 때 수애의 얼굴이 황보영 선수가 제게 유일하게 눈을 치떴던 순간을 떠올리게 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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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2만명을 대하는 태도와 그들의 생활을 보면 통일 이후가 보입니다. 통일이라는 두 글자가 더 이상 가슴 벅차지 않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북진통일을 외치는 보수는 중국의 탈북자는 구원의 대상이지만 하나원에서 나온 이후는 신경쓰지 않고 자주통일을 외치는 일부 진보는 탈북자들은 거짓말쟁이들에 제 조국의 배신자로 취급하여 그들을 도운 것이 진보정당 당직자의 ‘결격사유’가 되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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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이란 두 글자가 가슴 벅차지 않게 됐더라도 분단이라는 두 글자가 가슴이 아픈 것은 여전합니다. 영화 속에서 헤어진 두 자매가 공항에서 스케이트 한 짝과 초코파이 선물을 교환하기 전, “돌아보지 말라!”고 북의 동생이 속삭이고 서로 등을 대고 대화하던 모습에서 저는 살풋 눈물이 났습니다. 바늘을 몽둥이로 만들고 푸른 것을 붉게 만들고 자매의 인연조차 갈라 버리는 적대적 분단의 고통을 일깨워 준 것만으로도 저는 이 영화에 대해 사의를 표합니다. 안다고 생각하고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새 잊고 있었던 것이니까요.

(독후감) 고대 중국에 빠져 한국 고대사를 바라보다 by 산하


멍청아! 그게 식민사학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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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초반이었던 것 같다. 갑자기 단(丹)이라는 단어가 곳곳에 출몰하기 시작했다. 무슨 뜻인지는 알고 싶지 않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반 아이들 몇 명이 ‘단전호흡’을 한다고 얼굴이 시뻘개져 가지고 가부좌 틀고 책상 위에 앉아 있다가 두들겨 맞은 사건과 책방에서 ‘단’이라는 책을 뒤적이다가 하품만 가동하고 던져 버린 기억 정도가 다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후 나온 ‘다물’이라는 책은 사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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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판타지 소설이라고 하기엔 너무 진지하고 역사 수필이라고 하기엔 역사가 아니며 문학이라고 하기엔 턱없이 유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지금 생각이고 당시엔 꽤 큰 쇼크였다. 얘기는 두 가지 얼개로 구성된다. 군 출신으로 상고사에 관심이 많았던 주인공은 불치병에 걸려 냉동인간이 됐다가 21세기에 깨어난다. 그런데 깨어나 보니 한국은 만주와 러시아령 일부까지 장악한 영토 대국이 돼 있고 그를 감격 속에 돌아보는 이야기가 하나, 그리고 한민족의 잃어버린 상고사(?)와 영토 ‘다물’ (삼국사기에 다물이라는 말이 나오긴 한다. )즉,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는’ 장쾌한 과정을 담은 학자들의 좌담회가 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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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내용을 다시 읊자면 키보드 두드리는 손가락이 반란을 일으킬 것 같다. “뻔한 얘기를 왜 하냐고!” 요즘도 전직 장관에 현직 국회의원, 무슨 철학박사에 정치학박사들까지 망라된 명망사들이 곧잘 떠들어 페이스북 담벼락을 어지럽히는 그 위대한 ‘상고사’들의 이야기, 9천년 전 돌도끼를 휘두르며 대제국을 이룩한 한민족이 전 세계로 뻗어나가 인류의 시원이 되었다는 청계천 거지 바이올린 켜는 스토리, 서안에 무슨 피라미드 군이 있고 그거 우리 선조가 지은 거라는 육갑 헤는 소리들이 <다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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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물>이 나온 게 30년도 더 전이니 이제 시들어질 때도 됐다 싶은데 오히려 더 기승이고 되려 더 많은 이들이 호응하고 나서는 판이고, 멀쩡히 학문 연구에 평생을 바친 노학자들에게까지 ‘식민사학자’의 오명을 들이씌우는 범죄적 상황까지 발전하고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오고 유감스럽게도 간교한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에 심어 놓은 자학 사관의 희생자가 된다. “어이구 엽전들은 할 수 없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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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다물>에 등장하는 한국 고대사 전문 교수가 한 분 계시다. 다른 ‘식민사학자’들과 달리 우리 잃어버린 고대사에 전념하신 훌륭한 분으로 나오는. 바로 단국대학교 윤내현 교수다. 새삼 <다물>을 떠올리게 하는 윤내현 교수님이 아끼던 제자 한 분이 책을 냈다. 심재훈 교수. 이분의 전공은 중국 고대사다. 그래서 책 제목이 이렇다. <고대 중국에 빠져 한국사를 바라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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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상당 부분은 중국 역사나 한국사가 아닌 개인사(個人史)다. 어떻게 학문을 하게 됐고, 무슨 경로를 택했고 시련은 어떻게 왔으며 마침내 이뤄낸 성취들은 무엇이고 자신은 왜 역사를 택했는지에 대한 담담한 회고다. 그래서 중국 고대사 전문가로서 그의 학문적 자산의 이력을 설핏 드러내는 대목에 이르면 아마 일반 독자들은 아이고 두야 뭐라는 거냐 할 것이다. 내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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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에 빠진’ 대목을 구렁이 담 넘듯 청와대 공주님 민생 걱정하듯 설렁설렁 넘어가면 그 다음에는 바로 ‘한국사를 바라보다’가 나온다. 여기서는 시선 집중 잡념 뚝이 된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무릎을 치고 입에서는 “그래! 내 말이!” 추임새가 5분에 한 번씩은 등장한다. 그 자신 윤내현 교수를 깊이 존경하지만 학문적으로는 그를 승계할 수 없게 된 처지를 토로하며 한국의 ‘강단 사학’ 또한 이미 철저하게 ‘민족주의적’이며 그 민족주의의 농도의 문제일 뿐, ‘재야사학’을 자칭하거나 위대한 상고사를 읊는 환빠들이 말하는 ‘식민사학’과는 거리가 멀다고 얘기하는데 어찌 옳소 소리가 튀어나오지 않으랴. 하지만 옳소 탄성만 내지르기엔 좀 부끄러운 이야기들도 연속부절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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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한국 사람들은 5세기 경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 오사카의 다이센 고분의 무덤 길이가 460미터에 달해 진시황릉에 버금갈 정도라는 사실에 눈을 크게 뜰 것이다. 사실 일본의 일부 고분들은 신라나 백제 고분들을 압도할 만큼 크다. 지배자 무덤 크기는 곧 인구의 동원력이었던 시기, 그 정도 규모의 고분이 한반도에 없다는 건 ‘상당히 곤혹스런, 그래서 의도적으로 무시된 듯한 인상마저 풍기는 금기의 주제일 것’이라고 심재훈 교수는 담담하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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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지역에서 왜인들 무덤 양식인 전방후원분이 발굴되고 그쪽 유물이 나왔을 즈음 나왔던 성낙준 교수의 코멘트 “자국민중 중심주의에 빠진 아전인수격의 해석을 벗어나야 역사적 사실에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를 끌어오면서 저자는 꼭 이렇게 토를 달고 계신다. “아마도 이 말은 일본보다는 우리 학계와 독자들을 향한 일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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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실 자국민중중심주의의 폐해는 이 책에 등장하는 사례에 정말로 얼굴이 벌개지도록 폭로돼 있다. 바로 동북아역사지도 폐기 사건이다. 이 대목을 소개해 본다. ( ) 안은 책을 읽다가 내가 내뿜은 추임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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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역사지도는 ‘역사지도다. 그러니 현재의 관점이 아닌 최대한 당대의 모습에 가깝게 그려져야 한다.,,,, 이같은 역사지도에 대한 문제점들이 지적됐는데 그 중 하나는 한국이 지도의 중심으로 부각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뭐냐 이건 변방콤플렉스냐? ) 독도가 지도에서 빠졌다고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 역시 지극히 지엽적인 문제다. (동북아 역사지도에 반대한 인간들 미친 거 아냐? 독도가 역사지도가 왜 나와야 되는데. 독도라는 이름도 20세기에나 붙여진 거구만) 낙랑군이 평양에 존재했다는 사실도 평양에서 발견된 낙랑군의 호구조사 목간으로 이미 상식이 되지 않았는가. (그런 사람 있지. 낙랑은 죽어도 요서에 있었다고. 그런데 그 먼 곳의 낙랑이 어떻게 백제 왕을 암살하기도 하고 신라하고 전쟁하기도 하는 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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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 고대사의 문제는 몰상식이 상식을 이기고 있다는 거고, 비전문가들이 ‘당위’를 앞세워 전문가들을 두들겨 패고 있다는 것이다. 낙랑이 한반도 내에 있었다는 주장에 반대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논리와 근거를 대면 된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면서 또는 자신들이 믿는 진리(?)만 내세우면서, 우리에 반대하면 식민사학이라는 표창을 다섯 손가락에 끼우고 입에 거품은 게처럼 물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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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나라 세금 들여 관련 전문가들이 힘써 만든 동북아역사지도는 폐기되고 세계의 몇 안되는 한국 고대사 연구자들은 허탈함에 하늘만 쳐다봐야 했다. 정말로 몇 손가락 안되는 서양의 한국고대사 연구자 중 하나인 마크 바잉턴 교수는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최악인 것은 한국 주류 역사 학계의 그 누구도 그 잘못된 비난 (사이비 역사학자들과 그들을 지원하는 정치인들의) 을 반박하여 바로잡으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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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대목을 읽으면서는 비록 학문의 세계에는 발가락도 담그지 않은 사학과 학사 출신이되 한없이 부끄러워서 장롱 밑에라도 기어들어가고 싶었다. 명색 학문을 한다는 사람들이 ‘역사지도에 왜 독도가 없냐’는 ‘진도(珍島)의 소리에 침묵하고 “낙랑이 평양에 있었다는 건 식민사학”이라는 어거지에 침묵하고 모르쇠했다는 건 한국 사학계의 수치일 것 같다. 물론 똥이 무섭다고 피하는 건 아니겠지만 그 더러운 똥들이 널려 있는 학문의 길에 어느 후배를 들이고 그런 게으름으로 어떻게 역사와 독대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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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화된 나라의 정부에서 외국과의 학술 프로젝트 지원을 이렇게 쉽게 중단해 버리는 것은 정말 국제적인 망신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제대로 된 전문가도 아닌 유사역사가들의 근거없는 얘기를 수용한 정치인들이 압력을 넣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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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말 점잖게 하신다. 심재훈 교수님은 꽤 인격자같다. 나는 인격자가 되지 못하여 좀 입이 걸다. “그것도 제대로 된 전문가가 아닌 자기가 혼자 꾼 꿈 속에서 자기가 벌레인지 자기인지도 분간 못하는 또라이같은 역사의 불나방들과 근거없는 얘기를 수용한 무식한 정치인들이 압력을 넣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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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진리 탐구의 과정에서 가설과 추론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 가설과 추론의 근거가 주관과 당위가 될 때, 즉 ‘마땅히 이래야 한다’가 될 때 그 연구의 가치는 수명을 다한다. 하물며 역사는 더욱 그렇다. 그래도 우리 역사는 찬란해야 하고 커야 하고 전 세계에 자랑할 만한 것이어야 한다는 이들에게는 이렇게 말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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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 아니어도 우리 역사는 충분히 자랑할만하다 ‘반도 안에 찌그러진 역사’가 뭐가 자랑할만하냐고? 이 멍청아 그게 식민사학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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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일관 담담한 어조로 사람을 열받게 하는 능력을 지니신 심재훈 교수님께 경의를 표하며 가뜩이나 더운 날 책을 읽다가 열뻗쳐 죽는 줄 알았다는 고백을 더하며


한양천도 막전막후 3 by 산하

한양천도 막전막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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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전던지기로 정해진 수도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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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조선 오백년 수도 한양을 상징하는 인물의 동상을 세운다면 이 사람을 빼놓고는 논할 수 없을 것이다. 삼봉 정도전. 일찍이 고려말 동북면 촌구석에까지 찾아가 이성계의 군대를 보고 “이런 군대로 못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라고 대담한 소리를 내뱉아 이성계의 야망을 어루만졌던 정도전. 그는 이성계의 제갈량이었고 장자방이었다. 풍수가 좋다고 수도를 국토 남단의 산골짝으로 들어가는 주장을 막았던 사람도, 안산 옆이 좋으냐 인왕산 아래가 좋으냐, 왕이 남향(南向)으로 좌정할 것인지 동향(東向)으로 앉을 것인지 등등 중대한 논의부터 시시콜콜한 시비까지 빠지지 않고 참여하여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킨 사람도 정도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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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태종 이방원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500년 동안 역적의 이름이 되어, 그 시를 좋아하는 것조차 불온한 사상을 지닌 것으로 치부되는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이 바로 이 혐의를 썼다.) 비극의 주인공. 하지만 그가 신생 왕조 조선의 기틀을 세우고 그 수도 한양의 초석을 닦았음은 부인할 수 없다. 세종 때 명신 신숙주는 이렇게 정도전을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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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 초에 무릇 나라의 큰 규모는 모두 선생이 만들었으며 영웅 호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으나 선생만한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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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까지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경복궁, 창덕궁 등의 궁궐 이름과 숭례문, 돈의문 등 한양 도성 성문의 이름을 몽땅 다 지어 바친 것도 그였다. 그 중 경복궁의 정전이라 할 ‘근정전’(勤政殿)이라는 이름을 지은 이유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동시에 매우 교훈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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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폐하게 됨은 필연한 이치입니다. 작은 일도 그러하온데 하물며 정사와 같은 큰일이야 더 말할 나위 있겠습니까. (중략)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낮에는 어진 이를 찾아보고, 저녁에는 법령을 닦고, 밤에는 몸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이 임금의 부지런한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어진 이를 구하는 데에 부지런하고 어진 이를 쓰는 데에 빨리 한다 했으니, 신은 이것으로서 이름 하기를 청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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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어쩌고 하며 계룡산이 좋네 송도가 좋네 하는 사람들에게 “풍수 따위가 아니라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라 일갈했던 정도전. 그 모습 그대로 정도전은 그 명명을 통해 왕의 할 일을 깨우쳐 주고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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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선 시대의 ‘신(新)수도 건설본부장’ 정도전의 명운은 길지 못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수도 한양은 또 한 번 크게 흔들린다. 이성계의 후계자로 어린 막내아들 방석을 밀었던 그는 태종 이방원의 ‘왕자의 난’ 최고의 목표물이 되어 죽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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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에 가면 재동이라는 동네가 있다. 이 재동의 어원은 잿골이다. 동네 이름이 잿골이 된 것은 뭔가를 감추기 위해 잔뜩 재를 뿌리면서 생긴 이름이었다. 왕자의 난 때 죽어간 병사들의 피가 강물을 이뤘고 피비린내를 지우기 위해서 재를 뿌려댔으며 그것이 동네 이름으로 굳어진 것이다. 그 피 가운데에 신수도의 건설자도 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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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피 냄새가 싫어진 이들 가운데는 조선의 두 번째 왕 정종이 있었다. 그는 어머니 신의왕후 한 씨의 무덤을 찾는다는 핑계로 개성으로 돌아간 후 한양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사실상의 재천도였다. 수십만 인력을 동원하여 성을 쌓고 궁궐을 지은 지 수년만에 한양은 또 다시 버려질 위기에 처한다. 그 수도를 다시 한양으로 옮겨 온 것은 태종 이방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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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은 이방원 스스로 권력의 정상에 올라섰던 왕자의 난의 무대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태종을 도와 공을 세운 하륜이 또 다시 무악 천도론을 외치고 나오면서 문제는 또 다시 혼란에 빠진다. 불과 몇 년 전까지 5백년 도읍지였던 개경, 이방원의 1등 공신이라 주장하는 하륜이 주장하는 무악, 이미 백성들의 피땀으로 성벽을 쌓고 궁궐도 지은 한양. 이 셋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태종은 기상천외한 수법을 사용한다. 바로 동전던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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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역사적인 동전던지기에서 한 곳은 2길 1흉 (2번이 길하고 1번이 흉한)의 점괘가 나와 나머지 두 곳의 1길 2흉(하나만 길하고 두 가지는 흉하다)을 누르게 되는데 이 2길 1흉의 주인공이 바로 한양이었다. 이미 “점을 쳐 놓고도 딴 소리하는 자는 종묘를 능멸하는 이들이다.”는 임금의 선언이 있은 뒤라 군말도 투덜거림도 나오지 않았다. 이때가 태종 4년인 1404년이었으니 왕조 개창 이후 시작된 천도 논의가 무려 10년에 걸쳐 종결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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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후에야 한양은 500년 도읍으로서의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청계천이 뚫려 도시를 관통하게 만든 것도 이때였고 시전행랑을 만들어 상업지구를 조성하고 도시의 미관과 생활 환경을 고려한 명실상부한 도성의 모습을 갖춘 것이 이 시기 이후의 일이다. 청계천이 동서를 가르고 종로통에 상점이 운집하고 광화문 앞에 관청들이 늘어섰던 오늘날의 서울의 원형이 확립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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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조선의 계획 수도 한양은 10년의 세월과 치열한 입씨름과 수만의 백성들의 피땀 어린 노고를 거쳐 형성됐고 유지되고 오늘로 이어지게 된다. 한 나라의 수도가 풍수가 좋다는 이유로 계룡산으로 들어갈 뻔도 했고, 다시 개경으로 도로아미타불 되기도 했고, 결국은 동전던지기로 결정된 역사가 좀 겸연쩍긴 해도 서울은 우리나라 역사의 가장 생생한 순간을 함께 한 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한양천도 막전막후 2 by 산하

한양천도 막전 막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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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계룡시에는 ‘신도안면’(新都案面)이라는 면이 있다. 바로 새 도읍지로 결정되어 근 열 달 동안 백성들이 죽을둥살둥 궁궐 공사에 동원됐던 곳이다. 그 공사에 쓰인 돌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이 신도안은 오늘날 육해공군 본부가 들어와 면 전체가 군사보호구역이 되어 있으니 여느 땅과는 다른 팔자(?)를 지닌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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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하륜은 계룡산 천도에 반대하면서 국토의 남쪽에 치우쳐 있다는 것과 풍수상 오히려 계룡산 지역이 좋지 못하다는 논의를 폈다. 신도읍으로 계룡산을 점찍은 가장 큰 이유가 풍수였는데 오히려 풍수가 좋지 못하다고 하니 그제야 나라의 남쪽에 치우친데다 큰강도 끼고 있지 않아 교통도 불편하고 기타 등등의 여건들이 태조의 눈과 귀에 들어온 듯 했다. 다시 고려의 남경, 즉 한양 지역이 수도 후보지로 떠올랐고 하륜이 새 도읍 후보지로 제시한 곳은 무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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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악이란 오늘날의 무악재와 안산 사이를 말하는 지역이다. 만약 이 무악으로 도성이 결정되었다면 오늘날 신촌골에 들어서 있는 것은 연세대학교 캠퍼스가 아니라 경복궁과 창덕궁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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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는 장군으로서 전투를 지휘할 때도 그랬지만 한 번 마음 먹으면 그에 대한 집착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어찌 되었든 개경을 빨리 떠나고 싶었던 태조 이성계는 몸소 그곳을 둘러보러 나선다. 더위가 가시지 않은 음력 8월. 이성계는 무악으로 행차하여 야영을 하면서 도읍지 후보 시찰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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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변에 위치하고 나라의 중심에 위치하기는 했으나 무악에도 문제가 있었다. 한 나라의 도읍지가 들어서기에는 좀 협소하다는 것이 하나고, 둘째는 역시 풍수였다. 풍수지리를 맡아보던 서운관 관리들은 무악이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상소를 연이어 올렸다. 그러자 한때 고려를 호령하던 맹장이었던 터프가이 이성계가 드디어 분노를 폭발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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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은 입만 열면 불가하다는 말만 들먹이는데, 그 근거가 도대체 뭐란 말이냐? 만약 이곳이 불가하면 대체 어느 곳이 가하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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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가 어떻고 무엇이 길하고 불길하고 하는 논의에 질릴 대로 질린 빛이 역력한 왕이었으나 서운관 관리 유한우는 그 앞에서 대놓고 이렇게 대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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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는 명당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후 임금들이 다른 곳에 궁을 지어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송도(개경)의 지덕(地德)이 아직 쇠하지 않았사오니 다시 궁궐을 지어 도읍을 정하심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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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우의 속내가 무엇이었는지는 모르나 그 결기 하나는 알아줄 만하다. 하지만 이성계의 분노는 활활 타오를 밖에. 그는 근처에 그렇게 길한 땅이 없다면 옛 백제 수도든 신라의 수도든 그리고 갈 것이라며 어깃장을 놓으며 신하들을 압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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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가 길하고 어디가 흉한지를 주로 따지던 논쟁에서 새로운 논거를 끌어들인 것은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은 중국의 고사를 들어가며 이렇게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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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치세가 잘 이뤄지고 그렇지 않고는 결국 다스리는 사람에 따르는 것이지 풍수지리상의 성쇠에 갈음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지기(地氣)의 성쇠를 말하는 자들은 그 마음으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옛 사람의 말을 다시 읊는 것에 불과하며, 신의 말한 바도 옛 사람들이 경험한 것입니다. 어찌 술사들의 말은 믿고 선비의 말은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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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스리는 사람이 어떻게 다스리느냐가 문제지 땅의 기운 따위가 무슨 영향을 미치겠는가. 가히 정도전다운 말이다. 21세기에도 어디가 터가 안 좋고 기가 세서 어떤 결과가 나온다는 소리가 횡행하는 요즘에도 귀 기울일 말일 터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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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악을 떠난 태조 이성계가 다시 주목한 것이 한양이었다. 나라를 열자마자 도읍지를 옮겨보려고 했던 바로 그 땅. 이성계는 한양이 마음에 들었다. 한양이라는 지명의 뜻은 한강 이북 고을이라는 뜻이다. 북은 양(陽)이었고 남은 음(陰)이기 때문이다. 말썽 많은 서운관 관리들도 “개경이 제일 좋지만 그 다음으로는 이곳 한양”이라며 거들었고 임금이 왕사로 대접하던 무학대사 역시 “사면이 높고 수려하며 중앙이 평탄해서 도읍지로 적당할 것 같습니다.” 고 한양을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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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는 얼굴을 편다. “이제 이곳의 형세를 보니, 왕도가 될 만한 곳이다. 더욱이 조운하는 배가 통하고 사방으로 통하는 거리도 고르니, 백성들에게도 편리할 것이다.” 즉 한양은 풍수상으로도 좋았다고 하지만 결국은 실용적인 견지에서 도읍지로 낙점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 결정이 내려진 것은 무악에 들렀다가 서운관 관리들에게 불호령을 내린 다음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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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환의 <택리지>에 따르면 한양 도성 성벽에는 이런 전설이 전해진다. “도성을 쌓을 자리를 결정짓지 못해 고민하던 어느 날 밤 큰 눈이 내렸다. 그런데 어느 선 바깥쪽은 눈이 쌓이는데, 안쪽은 곧 녹아 사라졌다. 태조는 이를 이상하게 여겨 눈을 따라 성터를 정하도록 명했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의 성 모양이다."는 것이다. 이 전설은 하나의 진실을 담고 있다. 이 한양성을 쌓았던 것이 엄동설한의 겨울이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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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읍지가 결정된 뒤 태조 이성계의 행동은 그야말로 불도저와 같았다. 성벽 공사가 시작됐고 종묘와 궁궐 건설도 흡사 ‘속도전’을 벌였다. 1395년 8월 경기좌도의 인부 4,500명, 경기우도 인부 5,000명, 충청도 인부 5,500명을 징용하여 경복궁 건설을 시작했는데 두어 달도 안 지난 9월 29일에 이를 1차로 완성시킨다. 물론 제대로 된 궁궐이 아니었지만..... ‘도성축조도감’이 설치됐고 1396년 정월에 도성 공사가 시작됐는데 11만 8천명의 인력이 투입돼 1월 9일부터 2월 29일까지 단 49일만에 대충의 성벽을 두르는 1차 공사를 끝냈다. 설 추위 속에 진행된 초강행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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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성문조차 달리지 않은 미완성의 공사였지만 인왕산, 낙산, 남산을 에두르는 한양성벽은 이때 완성됐다. 모든 성벽을 97 구간으로 나누어 진행했고 각 지역을 표시하여 지역민들이 쌓은 구간에 문제가 생기면 다시 불러올려 수리를 시켰다고 하니 백성들의 고충을 알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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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에서 벗어나려는 태조 이성계의 마음은 그렇게 조급했다. 눈 앞의 욕망과 이익 때문에 밀어붙이는 개발과 공사의 뒷감당은 고스란히 백성들이 하게 마련이다. 오늘날 우리가 바라보고 거니는 18킬로미터 성벽의 기초가 단 49일만에 완성됐다는 사실을 돌이켜보자. 그 성벽이 튼튼할 리 없었다, 결국은 세종 때 30만명의 인력을 동원한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해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부실 공사는 필연적인 재앙이 되어 후대를 덮쳤던 것이다. 하지만 한양이 수도로 굳어지기에는 아직 우여곡절이 많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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