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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 임숭재가 충신 이정현에게 by 산하

충신 임숭재가 충신 이정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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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시오. 나는 임숭재라고 하오. 내 이름을 못 들어 보았다고? 어흠. 국사 시간에 졸았구만! 하고 외치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구려. 사실 교과서에 안 나오거든. 피차 공부 이야기하면 재미없을 테니 영화 이야기를 합시다. 얼마 전 나온 영화 <간신>이라는 거 기억나오? 그렇지! 거기 나오는 누구? 그렇지! 주지훈이 내 연기를 합디다. 이제 좀 나를 알아보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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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소. 나는 성종 연산군 때 사람 임사홍의 아들이고 조선 왕조 500년을 통틀어 으뜸가는 간신으로 소문 나 있는 임숭재요. 그러나 나는 영화 제목도 그렇고 나를 간신이라고 부르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소. 나는 간신이 아니라 충신이었소. 내가 모신 임금에게 나만한 충신이 있었다면 종로 네거리에서 맞아 죽어도 좋소. 나는 적어도 내 임금에 대해서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충신이었소. 물론 그 임금은 연산군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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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충신의 피는 대를 잇는 법이오. 우리 아버지 얘기 들어보실라오. 우리 형 희재는 집안에서 내놓은 꼴통이었다오. 즉 사람이 좀 융통성있게 (여러분들의 왜국어에 따르면 유도리있게) 살지 못하고 꼬장꼬장하고 쓸데없는 선비의 도 따지고 학문을 닦네 어쩌네 피곤하게 살았다오. 툭하면 매맞고 귀양다니다가 우리 집에 놀러 온 연산군 눈에 딱 그 형이 쓴 병풍 글 (진시황을 욕하는 것이었지만 누구나 연산군인 걸 다 알게 쓴)이 띄는 바람에 황천길로 간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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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때 우리 아버지 대단했소. “이 자식의 성질과 행실이 온순하지 못한 것은 전하의 말씀과 같습니다. 신이 아뢰고자 하다가 미처 아뢰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희재 형은 능지처참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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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에 이런 충신 봤소? 자신이 충성하는 임금에게 거스른다 하여 제 자식 죽여 주십시오 하는 아비를 봤소? 충신이란 이런 것이외다. 나는 이걸 보면서 다짐했소. 나도 충신이 되리라. 그리고 주상 전하에게 내가 바친 충성은 실로 눈물 없으면 보지 못할 것이요, 냉혈한의 심장에도 뜨거운 피가 솟구칠 것이오. 벙어리들도 일어나 “세상에 이런 충신이 어디 있는가” 외칠 것이요 귀머거리들도 그 칭송에 귀가 뚫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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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나는 내 몸을 던져 전하를 기쁘게 했소. 연산군께서 처용무를 잘 추시어 기생들이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 보셨겠지만 나도 춤의 명수였소. 실록 기록을 보면 “잔뜩 움츠리면 온몸의 관절이 떠는 것 같았다.”고 돼 있으니 알만하지 않소.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고 호색한은 호색한을 감지하며 춤꾼은 춤꾼을 찍어내는 것이오. 우리 둘이 짝을 이어 춤을 추면 전하와 나는 암수보다도 더 질펀하게 어울렸으니 과연 어떤 이가 나보다 임금의 마음을 기껍게 할 수 있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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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민은 그저 전하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가쁘게 할까 뿐이었소. 궁궐 안에 기생들을 잔뜩 끌어들였지만 전하는 만족하지 못하셨소. 그래서 아버지와 나는 조선 경국대전에도 없는 관직을 자임했소. 채홍사라고 하지. 조선 팔도를 돌며 미인을 찾아내 전하께 바치는 일이었소. 그래도 전하께서 만족하지 못하시자 나는 괴로웠다오. 어찌 이리도 전하께 바칠 충성이 부족하단 말인가. 날마다 가슴을 치며 내 무능을 탓하고 충성심을 가다듬었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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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을 탐하는 좋아하는 남자들이 하는 말이 있다오. 일도(一盜), 이비(二婢), 삼랑(三娘),사과(四寡)오기(五妓),육첩(六妾), 칠처(七妻). 이건 쾌락의 순서요. 꼴찌부터 마누라가 제일 그렇고, 그 다음이 첩이고, 그 위가 기생이랑 보는 재미, 그 위가 과부, 그 위가 처녀인데 그 후는 자기 집 종이오. 자기 집에서 노비랑 몰래 하는 거, 가장 최고의 즐거움은 남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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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께오서는 그만 거기에 눈을 뜨고 마셨다오. 말했지만 나는 충신이라오. 임금의 즐거움을 위해서 나는 모든 것을 다했소. 시집간 내 누이동생까지 바쳤다면 말 다하지 않았겠소. 그래 그것이 다냐고? 아니오! 아니오! 이 정도면 충신이 아니지. 전하께서는 이복누이이신 내 마누라까지 탐을 냈소. 그래서 그렇게까지도 했소. 미친 거 아니냐고? 충신의 길이란 그렇게 고독한 거라오. 

내가 죽을 때 남긴 유언을 들어 보시오. 아마 눈물로 홍수를 적시다 못해 방 안에 홍수가 날 것이오. “여한은 없사오나 오직 미인을 전하께 바치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전하께오서는 내 죽음을 슬퍼하셨으나 내가 저승에서 혹여 전하의 죄를 고할까 하여 내 입을 쇳조각으로 틀어막으셨으나 내 충성이 어찌 가시리오. 백골이 진토되어 일백번 고쳐죽은들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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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수백년. 내 입에 물린 쇳조각을 빼고 이렇게 여러분께 떠들어 대는 뜻은 다름이 아니라 나와 똑같은 충신을 수백년만에 다시 보았기 때문이오. 아아 가슴이 떨리고 발이 요동치오. 호색한은 호색한이 알아본다고 충신은 충신을 알아보는 법이오. 수백년 뒤 내 가슴을 뛰게 만든 충신의 이름은 다름아닌 이정현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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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선거 때 KTX 바퀴가 닳도록 순천을 오르내리고 안 찾아간 경로당이 없고 순천 사람들이 미안해서라도 찍어 줄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는 그 행보를 보며 나는 무릎을 쳤소. 그게 어디 순천 사람들 생각한 일이었겠소. 오로지 자기 주인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 위한 충성일 뿐이었지. 내가 문경새재를 넘고 낭림산맥을 거스르고 대동강 물줄기를 샅샅이 뒤지고 김제만경 드넓은 들을 왜 쑤시고 다녔던 바로 그 이유요. “미인을 찾아 전하를 기쁘게 하리라.” 아 이정현 공의 그 모습을 보면서 어찌 그리 눈물이 나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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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색 여당 대표로 앉았으나 그 충성은 가히 하늘을 찌릅디다. 도대체 누가 주동인지도 모르겠고 누가 돈을 긁었는지도 모르겠지만 하여간 바늘로 찔러 피도 한 방울 안 나올 재벌들이 800억 가까운 돈을 갖다 바쳐 만든 재단의 의혹에 대고 “세월호도 900억 모으더라.”고 하며 주군에 대한 의혹을 온몸으로 방어할 때에는 참으로 눈물이 나더이다. “여한은 없으나 미인을 바치지 못한 것이 한”이라고 한 나의 비장함을 빼다 박지 않았습니까. 연산군이 나를 일컬어 “숭재는 제신 중에 가장 충성이 있어 비밀스런 가르침을 받들었다.” 한 만큼 이정현 공의 그분도 그렇지 않겠소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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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그것도 모자라 딱 국감 일정에 맞춰서 대표방에 드러누워 단식을 시작하고 장장 엿새를 끌고 있으니 눈물이 마를 지경이오. 비록 아늑한 방에 드러누워 하는 비공개 단식에 겨우 엿새 굶어놓고 휠체어 타는 건 조금 얼척이 없으나 눈물로 호소하는 어머니도 외면하고 이제는 네가 져라 설득하는 아버지도 물리치면서 곡기를 끊은 그 마음은 아들 따위는 기꺼이 충성을 위해 희생시킬 수 있었던 우리 부친 임사홍이 무색하며 누이동생을 생으로 바친 나에 필적하지 않겠소이까. 

다시 말하거니와 모름지기 충신이란 그저 태양만 바라보는 해바라기인 것입니다. 태양을 우러르고 태양을 가리는 것을 치우고 태양을 찬미하고 태양의 마음을 헤아리고 태양이 원하는 말을 하고 태양이 싫어하는 것들을 몰아내며 태양과 함께 기뻐하고 태양과 함께 슬퍼하며 태양이 죽으라면 죽고 태양이 살라면 사는 것이요, 죽으면서도 태양에게 뭐 부족한 것이 없었나 돌아보는 것이 충신인 것입니다. 바로 내가 한 일이요 오늘날 이정현 공이 하고 있는 일이지요. 

아 이정현 공이여. 내 그대를 위해 시조 몇 수 남기리다. 비장하게 외우고 단식 계속하시오. 

큰누님 가나이다 순실누님 좋이 겨오. 
두분이 맘쓰시니 이몸을 잊었내다
샥스핀 송로버섯이 눈에 아른 거리오 

가노라 여의도야 다시보자 북악산아 
산해진미를 떠나랴 한다마는 
시장기 하수상하니 갈동말동하여라 

이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 
정유라 말발굽에 말 편자가 되었다가 
큰누님 계시는 곳에 독야멍청하리라

소주 십계명 by 산하

 소주 십계명

제일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제이는, 너를 위하여 이른바 폭탄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서양에서 온 양주나 동양맥주의 맥주나 오십세주를 위한 백세주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취하지 말며 그것들을 탐하지 말라.

제삼은, 너는 너의 술 소주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두꺼비라든가 이슬이라든가. 

제사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먹은 뒤 이틀은 쉬라

.제오는, 네 부모를 공경하여 그 앞에서는 돌려 먹을 줄 알라. 

제육은, 술먹고 살인하거나 때리지 말지니라.

제칠은, 술 먹고 간음하지 말지니라. 깬 뒤에 후회하니라 

제팔은, 술 먹고 마누라한테 거짓증거하지 말지니라.

제구는, 네이웃에 대하여 너무 씹지 말지니라

제십은, 네 이웃의 안주를 탐내지 말찌니라. 네 이웃의 안주나 그의 남은 술이나 이웃이 함께 먹던 여자나 그의 지갑이나 그의 물주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찌니라.

환생의 신비 -민비와 그녀 by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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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기적

민비를 돌아본다. 민자영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는 (어느 소설 속에 등장한 것이고 정확한 이름은 아니라는 말도 있다) 그녀는 불행한 유년기를 보냈다. 집안의 기둥이라 할 아버지가 일찍 죽었고 의지할 형제들도 없었다. 나이 아홉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갔는데 아버지 염하는 모습을 보지 않도록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려 하자 완강히 물리치고 어른과 똑같이 염을 지켜보고 곡을 하는 등 어린아이 같지 않은 담대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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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실부모한 영특한 소녀는 별안간 왕비가 된다. 시아버지 대원군의 선택이었다. 이후 펼쳐진 그녀의 생은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 파란만장은 자신의 나라를 파죽지세로 막장으로 몰아갔던 세월의 총합이기도 했다. 그녀를 만나본 서양인들이 하나같이 ...지적하듯 총명이 넘쳐 흘렀던 여인이었지만 그 총기와 지혜가 향한 것은 나라와 백성의 평안이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일가의 권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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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가 없으니 세도 부릴 외척도 없으리라는 게 대원군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앞에선 아버지와 아들도 없지만 동시에 권력은 사돈의 팔촌을 형제보다 가깝게도 만든다. 민비 가문에 양자로 들어왔던 대원군의 처남 민승호를 비롯한 여흥 민씨들은 민비를 중심으로 뭉쳐 대원군을 몰아냈다. 대원군이 실각하던 무렵 민비는 이조 호조 병조를 중심으로 민씨들을 서른 명 넘게 포진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정적으로 외롭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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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나눌 형제나 일가붙이가 하나도 없었고 그나마 의지할만 했던 양오빠 민승호는 대원군이 보낸 걸로 짐작되는 폭탄에 죽음을 당했다. 폭발 현장에는 민비의 어머니 한산 이씨도 있었고 역시 목숨을 잃었다. 민비의 가슴은 찢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의 가족을 죽게 만든 권력이라는 놈에 끊임없이 심취했고 그 권력욕에 편승한 가깝고 먼 촌수의 민씨들 역시 그 장단에 춤을 추었다. 그러다가 만난 것이 임오군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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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혜청 당상 겸 병조판서 민겸호는 민승호의 아우였고 일본과 협력하여 별기군을 설치한 이였다. 별기군을 설치한 것은 좋았는데 구식 군대는 차별을 받다 못해 급료를 13개월이나 받지 못했다. 그나마 지급한 급료가 쌀 반 모래 반이었고 여기서 군인들은 폭발한다. 민겸호의 집을 습격한 군인들은 그 집에 쟁여 두고 있던 값진 재물들을 마당에 쌓아 불을 지른다. 황현에 따르면 “비단, 주옥, 패물들이 타 불꽃에서는 오색이 나타났고, 인삼, 녹용, 사향노루가 타면서 나오는 향기는 수리 밖에서도 맡을 수 있었다.”라고 한다. 엄청나게 해먹었던 것이다. 이 민겸호는 대원군에게 살려달라고 조르고 나중에는 중전마마를 애타게 부르짖었으나 군인들에게 난도질당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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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을 일으킨 군인들은 민비를 눈에 불을 켜고 찾았으나 이미 그녀는 도망간 뒤였다. 홍재희라는 무관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군인들 손에 죽었을 것이다. 그 구사일생의 피난길 속에서도 그녀는 도중에 들은 한 노파의 험담을 귀담아 두었다. 서울에 난 난리 때문에 피난가는 새색시로 위장했던 그녀 앞에서 “민씨인지 여우인지 그년 때문에 고생한다.”고 한 노파가 위로(?)의 말을 건넸고 다시 권력을 잡은 민비는 그 노파를 찾아내라 했으나 여의치 않아 그 마을 전체를 몰살해 버렸다고 황현은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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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명했다기보다는 권력에 민감했고 불행했다고는 하지만 결국 그 비극에 궁극적 책임이 있었던 민비. 자신의 장례식까지 치러져 정치적으로 매장되는 상황에서 피난지에서 가슴을 졸이던 그녀에게 한 친구가 생긴다. 자칭 관우의 딸이라는 무당이었다. 그녀는 염려 마십시오 마마는 모월 모일 환궁하십니다 하고 민비를 위로했는데 그게 신통하게 맞아 떨어졌고 환궁에 동행했을 뿐 아니라 진령군이라고 하여 일약 군(君) 칭호를 받는 파격의 주인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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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맹랑한 관우의 딸의 말이라면 민비는 무엇이든 들어 주었다. 금강산 봉우리마다 쌀 한 섬과 돈 천 냥, 무명을 얻고 치성을 드린다고 해도 두말이 없었고 이 여자의 속삭임에 따라 신하들이 어이없이 쫓겨나기도 했고 벼락 벼슬에 임명되기도 했다. 안효제라는 이가 목숨을 걸고 진령군을 고발했으나 고종은 그를 추자도로 귀양 보내 버렸다. 이때 고종이 하는 말을 보면 민비의 독살스런 기운이 여지없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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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령되고 고약한 말들은 비난과 헐뜯는 말이 아닌 것이 없다. 겉으로는 비록 무슨 문제를 들어 말하였지만 속으로는 사실 협잡을 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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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자 주변에는 항상 날파리들이 끼이는 법, 어느 신하는 “오늘의 급선무는 군사를 훈련하고, 수령을 가려 뽑고”를 운운하다가 별안간 “비방을 물리치는 일이니 안효제를 처벌하소서.”라고 요즘 말로 하면 ‘유언비어 의법 처단’을 부르짖었고 더 충성스러운(?) 자는 아예 안효제를 죽여 버리라고 이마를 땅에 부딪쳤다. 어느 덜떨어진 녀석은 이렇게 말하며 꼬리를 흔들기도 했다. “조금도 거리낌 없이 말을 가리지 않았으니, 감히 기도를 드리는 문제를 어찌 무엄하게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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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10년 뒤 종두법의 보급자로 유명한 지석영이 “기도한다는 구실로 재물을 축내며 요직을 차지하고 농간을 부린 요사스러운 계집 진령군(眞靈君)에 대하여 온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살점을 씹어 먹으려고 합니다.”고 얘기하고 있으니 진령군에 대한 원망이 어땠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 나 민비만은 아무것도 몰랐다. 아니 알지 않으려 했다. 그 결과 민비의 주변에는 예스맨만 들끓었고 그 권력에 기생하는 살찐 기생충들만 그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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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비가 간 지 올해로 121년이다. 바로 작년이 민비가 죽었던 ‘을미년’이었으니까. 윤회설을 신봉하지는 않으나 요즘 나는 민비가 바야흐로 환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찝찝한 생각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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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죽음 등 불행하고 외로웠던, 그러나 꽤 의연해 보였던 한 소녀, 자신까지 목숨을 잃을 뻔한 위협 속에서도 권력에 대한 집착을 놓지 않았고, 결코 지혜롭지는 않았지만 정치에 대한 동물적 감각이 있었고, 자신에게 험담한다고 마을을 몰살시킨 표독함과 무당에게 군 칭호를 주고 모든 말을 들어 주는 대책없음까지 겸비한 위인이 “보라 우리 눈 앞에 나타나신 그이 모습”을 과시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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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진령군까지 환생하여 그 옆에 붙어 있는 것 같고, 그 뒤에 착 들러붙어 “유언비어 의법 처단”을 부르짖으며 “의혹은 누구든지 얘기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의혹 제기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는 말인듯 말같지만 말이 아닌 말을 하고 있는 이까지도 현생에서 버젓이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보면 윤회설의 설득력을 인정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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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쌓아야 할 악업이 남았는가. 어찌 한 생으로 모자라 환생까지 하여 이러시는 것인가 나무아미타불을 되뇌며 목탁이라도 두들기고 싶어지는 것이다. ‘서유견문’의 유길준은 민비를 두고 “세계에서 가장 나쁜 여자”라 불렀다. 오늘날의 그분에게는 어떤 형용사가 어울릴까. 최소한 ‘나쁜’은 아닌 것 같다. 몇 가지 떠오르는 형용사는 있으나 이 또한 ‘의혹’에 해당할 수 있으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김해성 목사 단상 by 산하

김해성 목사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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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쯤 전의 9월 어느 날이었다. 성남 모처에서 아이템이 될 만한 결혼식이 열렸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합동 결혼식이었다. 신부는 전원 한국 여성들이었고, 이미 동거 중이었거나 아이들을 거느린 부부도 있었다. 네팔,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 다양한 국적이었지만 한국말들을 꽤 잘 했고 결혼식 후 피로연 때 맥주를 들이키면서 신부측 어르신들 앞에서 돌려 마실 줄도 아는 거지반 한국 사람들이 다 돼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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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나라의 민속춤과 노래까지 곁들여진 행사를 마치고 행사 주관자의 인터뷰를 요청했다. 목사님이었다. 인터뷰 요청에 흔쾌히 응해 주셨지만 자리를 좀 옮기자고 제안해 오셨다. 특별히 보여 주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마고 하고 옮긴 자리, 그는 벽장 같은 곳에서 항아리 하나를 꺼내 왔다. 거기에는 낯선 외국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항아리에 담긴 것은 그의 유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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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재를 당해 죽었습니다. 보상금이 해결이 안돼 여기서 치료를 받다가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지요. 지금 오갈데 없이 제가 모시고 있는 분들만 해도 수십 명이 넘습니다. 한국에 와서 일하다가 돌아가신 분들입니다.”

항아리들을 눈과 손으로 훑으며 목사님의 목소리는 젖어들었다. 이름 하나 하나 읊을 때마다 무슨 숙달된 가이드처럼 고인의 국적과 나이, 일했던 곳, 사망 이유가 흘러나왔고 그 가운데 기계에 상처를 입은 뒤 불법 체류로 쫓겨날까봐 병원에 가지 못해 파상풍으로 사망한 이의 사연을 들으면서는 그예 눈물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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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적인 볼거리로 합동 결혼식을 취재 왔다가 뜻밖에 바윗돌처럼 무거운 사연들을 접하게 돼 당황했고 슬픈 항아리들은 맥락상 방송에 나가지 못했지만 가난하고 핍박받는 이들을 위하는 기독교 성직자의 기본을 (요즘 한국 일부 개독교에는 전혀 없는) 지닌 목사의 인상과 이름은 깊이 남았다. 김해성 목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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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는 일부 기업주들의 횡포에 이렇게 분노했었다. “사람을 그렇게 대하고 많은 사장님들이 교회에 갑니다. 사업 잘 대하기를 기도하고 헌금도 하고 눈물 흘리며 아멘을 부르짖기도 합니다. 그들이 짓는 죄보다 더 큰 문제는 아예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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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에 나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주는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역으로 말하면 우리는 외국인 노동자에게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그들로부터 용서받지 못하면 하느님으로부터도 용서받지 못합니다.”

그 뒤 그의 활동상에 대해서는 언론을 통해 가끔 흘러들었다. 외국인들을 위한 병원도 세웠고 중국 동포 교회도 개척했으며 모교 (한신대학교)를 대표하는 상도 받았다고 안다. 광주항쟁에서 스스로 도청으로 들어가 산화해 간 한신대생 류동운의 동기생으로서 그처럼 역사의 광풍에 맞서지 못하고 골방에 숨어 TV를 보고 있었던 자신에 대한 죄책감을 토로하는 인터뷰도 들으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상면했던 그의 육성과 눈물을 떠올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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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며칠 전 이 목사님의 성추행 추문 보도를 들었다. 어차피 이런 일은 진실게임으로 비화되기 십상이다. 직업병처럼 양쪽 주장을 듣고 그 신빙성의 퍼즐이 보다 완성에 가까워 보이는 쪽에 무게를 두게 되는데 유감스럽게도 김 목사의 성추행 (에 가까운 행동)은 있었다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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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변이 급해서 문 밖으로 뛰어나가다 보니 여신도의 엉덩이를 ‘손가락으로 찔렀다’는 변명은, 내가 그를 만난 날 그 목사님의 젖어드는 목소리에 도저히 실릴 수도 없고 실려서도 안 될 것 같다. 한마디로 납득이 어려우며 현실 가능성이 없는 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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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죄 지을 수 있다.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르기도 하고 쉽사리 그릇된 욕망의 포로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죄를 숨기고 늬우치기를 거부한 순간 그 죄는 더욱 특별해진다. 다윗이 욕망의 포로가 돼 부하 장수를 죽음의 전장에 밀어 넣고도 입 싹 씻으려던 것처럼. 김해성 목사의 옛 말마따나 사람에게 용서받지 못하면서 어찌 하느님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겠는가.

나는 사이다가 싫다 by 산하

나는 사이다가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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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생 때 학교에서 전대협 집회가 열렸다. 그 모습은 사반세기가 지난 뒤에도 압도적이었다. 기억 나는 일로 학교들마다 저마다 학교 이름 앞에 수식어를 단 깃발을 휘두르며 입장하던 것. . 청년 서강이나 의혈 중앙같이 독특한 이름도 있었는데 어마어마한 크기의 깃발과 그에 필적하는 규모의 머릿수로 운동장을 압도한 것은 ‘남대협’이었다. ‘남총련’ 전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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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의 대학생 대표들이 일일이 소개받아 연단에 섰고 (아 이 지겨운 운동권 악습) 저마다 지루한 사자후를 토하고 내려갔는데 바로 남대협에서 올라온 누군가가 연단에 버티고 섰다. 그런데 그가 외친 구호는 나를 경악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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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가리의 아가리에서 항문까지 죽창으로 왔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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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선생님들이나 선배들이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서는 순둥이였다고 보는데 가끔 튀어나오는 기억의 파편들을 수집하고 보면 온순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페친이신 선배들의 확인 부탁드린다) 저 구호 앞에서 나는 엄청나게 짜증을 내며 선배들을 물고 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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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대학생입니까? 저게 대학생이 할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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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우리 동아리 선배들은 참 착했다. 난감한 얼굴로 "광주 사람들이잖아. 그만큼 분노가 크다고 이해할 수 있지 않겠니" 이렇게 나를 타일렀다. 그런데 옆에서 듣고 있던 다른 동아리 선배 하나가 덜떨어진 신입생의 버르장머리에 울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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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과격해 보여? 전두환 노태우 똘마니들이 80년 광주에서사람들을 어떻게 죽였는지 알아? 저 사람들은 그걸 눈앞에서 본 사람들이야!”로 시작해서 호통의 폭포가 내리쳐진 것이다. 젖가슴이 잘리고 대검에 목이 떨어져 나가고 창자가 튀어나오고 이빨이 이마에 얹힌 참혹한 죽음들이 그 호통 속에 재연됐고 거기서 뭐라고 반박했다가는 주먹이 날아들 것 같아서 입을 다물고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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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사반세기가 흐른 지금 곰곰 당시를 톺아 보아도 여전히 그 구호는 실패작이다. 우선, 냉정하게 말해서 시공간에 맞지 않는 구호였다. 80년 광주에서 ‘전두환 찢어 죽여라’는 플래카드 두른 차량의 시민군 사진에서 나는 하등의 불쾌감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수만 명의 대학생들이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모인 자리, 그 중의 반은 갓 대학에 들어온 신입생들이었을 집회에서, 불쑥 내뱉어질 구호는 아니었다고 본다. 전두환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이 남대협 학생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이들은 어쩌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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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 수명이 길어질 일이겠지만 이 ‘노가리의 아가리에서 항문까지’를 떠올린 것은 이재명 성남 시장의 동영상을 보고서였다. 노란 리본 지겹다고 투덜대는 아주머니에게 이재명 시장의 대응 와중에 나온 “당신 자식이 죽어도 그럴 겁니까?”도 그다지 탐탁지 않았지만 특히 마지막 말 한 마디는 맥이 풀림과 동시에 28년 전 ‘분노에 대한 무지’를 설파하며 나를 윽박지르던 탈패 선배의 얼굴을 더듬게 만들었다. 그 말은 이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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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의 자식이 그 일을 당하는 일이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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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이제 만 2년을 넘었다. 그 동안 세월호 때문에 눈물 흘리고 분노하고 그 아픔에 지금도 기꺼이 동참하는 분들에게는 이재명 시장의 말이 속 시원할 수도 있다 싶다. 아니 나조차 세월호 유족 욕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 말을 던지고 움찔하는 모습에 속얹힌 것이 내려갔던 기억이 종종 있다. 노가리의 아가리에서 항문 어쩌고도 실제 광주항쟁을 목도하고 살점과 선혈들이 길가에 찍힌 것을 두 눈이 찢어지게 보았던 내 동기에게는 그럴 수 없이 ‘사이다’일 수 있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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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이 ‘투쟁’이라면, ‘정치는 산수다’라는 오바마의 간단한 정의를 거듭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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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시장의 말에 속이 시원할 사람들은 어차피 그만큼 존재한다. 세월호 투쟁의 핵심은 이재명 시장의 말에 속 시원해하는 사람들을 더 만들고, 이제 그만해라 지겹다는 사람들을 줄이며, 나아가 세월호 투쟁의 대의에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여 세월호 참사의 역사적 교훈과 사건 후 우리가 잃은 것과 세워야 할 것들을 두루 밝히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이재명 시장의 연설, 특히 “본인의 자식이 그런 일을 당할 수 있을 겁니다.” 하는 저주에 가까운 발언은 무슨 영향을 미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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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가 지겹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의 스펙트럼은 예상 외로 넓다. 어버이연합이나 어머니 머시깽이인지 하는 또라이들이나 단식 투쟁에서 치킨 처먹은 일베들같은 비인간적인 집단만의 무도함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다못해 세월호 교실에서 아이들의 유품을 치워 달라고 요구한 재학생 학부모들이 일베라서, 마음이 강퍅해서 , 제 자식 죽지 않은 이기주의 때문에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어쨌건 지켜야 할 일상은 있고 세월호 참사가 그 일상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생각(그것이 옳든 그르든)은 존재하고, 그 덩어리는 커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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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에 대고 “네 자식이 죽어도 그럴래?” 하는 말이 던져지고, 심지어 “네 자식이 그런 일을 당할 거야.”하는 저주가 퍼부어진다면, 이른바 ‘비슷한 사람들의 사이다’ 외에 어떤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까? 과연 지겹다는 생각을 내비치던 사람들이 집에 가서 자기 자식들 얼굴을 보면서 “그래 그 부모들을 이해하자.”라고 마음을 고쳐 먹게 하는 계기가 돼 줄 수 있을까? 있을까? 있다고? 정말? 되레 시멘트에 들이붓는 사이다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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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상 어떤 사안에 대한 논쟁이 벌어질 때 대개 승자는 원칙론자(?)의 것이다. 원칙론에 입각한 대의명분, 또는 감정의 크기라는 원칙, 즉 결의에 찬 비분강개가 승리자가 될 때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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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미제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이든 “노동해방을 향한 강철 같은 의지”이든 “적들에 대한 견결한 각오”이든 심지어 “불순분자 감시 및 제거”이든 “좌경용공세력 타도”이든 여러 명분을 건 논쟁의 승리자는 “당신은 분노가 (믿음이, 또는 신념이) 부족하오.”라는 스트레이트와 “당신은 모르오. 그들이 어떤 놈들인지”하는 라이트훅과 “그 참상을 모르면 말을 하지 마시오” 하는 레프트 훅으로 상대방을 쓰러뜨리기 일쑤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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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긴 원칙론자(?)들은 외부와의 싸움에서는 거의 패했다. 그들이 유능해서 이긴 게 아니기 때문이다. 원칙과 분노와 결의들은 내부에서는 무소불위의 칼과 난공불락의 방패이지만 밖으로 나간 순간 무관심의 햇살에 녹슬고 분주한 일상이라는 창끝에 뚫릴 수 밖에 없고, 인지부조화는 그래서 발생한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는 어김없는 진리요 생명이지만 그 테두리 밖에선 허섭쓰레기로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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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싸움이 잘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 주무기가 “네 자식이 죽어도 그럴래?” 하는 폭력성 농후한 질문에 불과하다면 그 싸움은 진다. 항차 “네 자식이 그런 일 당할 거야” 하는 협박성 깉은 저주가 곁들여진다면 백전 백패다. 오히려 “우리도 지겹다. 우리도 걷어치우고 싶으니 특조위를 연장하여 이것 이것 이것만큼은 해결해 보자.”고 내밀고 그 이슈들의 설득력을 키우는 노력이 절실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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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쪽 가슴이 아파 오는 것은 그 ‘이슈’들이 사실 중구난방이고 정리돼 있지 않으며 ‘확장성’이 적다는 느낌 때문이다. 이러면 또 ‘사이다’가 그리워진다. 그러나 사이다는 마시고 5분 지나면 목이 마르고,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더해지게 된다는 것 다 아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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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원래 무슨 댓글이든 욕설이 아닌 한 대충 허용하는 주의이지만 이 포스팅에서는 '사이다' 없습니다. "네 자식이 죽어도 그럴래" 류의 댓글은 삭제 후 차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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