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6.16 정주영 소떼 방북

산하의 오역 


1998.6.16 정주영 소떼 방북  


역사는 한 사람이 만드는 게 아니다. 그 시대의 역사는 그 시대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 흐름의 선두에 서는 사람은 있다. 그가 반드시 위대한 사람은 아닐지라도, 또는 절대로 선량한 사람은 아닐지라도 그 의지와 재기는 다른 사람들의 등을 떠밀고 어깨를 빌리고 손발을 움직이게 만든다. 언젠가 한 번 얘기한 적이 있는 듯 싶은데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도 그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다. 노동자들의 옆구리에 식칼을 찔러 넣은 사건이나 살인적인 파업 진압과 골리앗의 외로운 늑대들의 경험을 잊을 수는 없다. 하지만 또 그렇다고 해서 한국 현대사에서 그의 이름이 희미해지지도 않는다.

 

한강 인도교 재건부터 경부고속도로, 소양강댐, 서산 간척, 자동차 생산, 조선소 건설 등 한국 현대사를 가로지르는 굵직굵직한 사건들 가운데 그의 이름은 선명하게 내걸려 있다. “그 사람의 공이냐? 그 밑에서 뼈빠지게 일한 사람들의 공이지.”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사람들 수태 고생시키고도 아무런 변화도 일궈내지 못한 사람들은 더 많다. 그 정주영이 가장 큰 애착을 가진 사업은 다름아닌 서산 간척 사업이었다고 한다. 유조선까지 끌고 와 초속 8미터로 흐르는 바닷물을 막고 만든 간척지에서 그는 대한민국 최대의 농토를 일궜다. ‘노망의 세월’ 즉 세금을 뜯기느니 내가 정권 잡겠다고 일생 최대의 도박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 했다가 뜨거운 맛을 보고 바짝 엎드렸던 1992년 겨울 이후 그가 찾은 곳도 서산 농장이었다. 어쩌면 그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스칼릿 오하라의 대사를 되뇌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게 있다면 그건 땅이다. 땅은 영원하니까!”

 

“타고난 농사꾼이었던 그는 세심하게 작황을 살폈다. 제대로 추수가 안된 곳이 눈에 띄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한 직원은 “한번은 그가 B지구의 풀 속에서 추수가 안된 보리를 발견한 적이 있었다. ‘농사꾼이 어디 곡식을 남겨두는 법이 있느냐’며 내리 30분 동안 혼이 났다. A지구에 가서 무논에 벼 포기가 올라오는 것을 보고서야 화가 누그러졌다”라고 말했다. 윤석용 영농작업부장은 “그분은 곡식을 무척 아꼈다. 벼를 뽑아 보고 뿌리의 생육 상태를 본 다음에는 반드시 다시 심어 놓게 했다. 이삭을 세어 볼 때도 모가지를 뽑았다가는 불호령이 떨어지기 일쑤였다”라고 말했다.” (시사저널 2000.11.30) 뿐만 아니라 “시험 영농이 있었던 1985년부터 15년 동안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5시에 전화로 ‘영농 현황 보고’를 받았다. 장비들의 작업 위치가 어디인지, 송아지가 새로 몇 마리나 태어났는지, 논에 물은 충분히 차 있는지, 그는 이것저것을 꼬치꼬치 캐어 물었다”고 하니 그 정성은 지극하다는 형용사만으로는 수식하기 어렵다.

 

이 땅에 대한 집착은 그가 바로 이 땅의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트라우마일지도 몰랐다. 그 자신 “서산농장의 의미는, 수치로 나타나는, 혹은 시야를 압도하는 면적에 있지 않다. 서산농장은 그 옛날 손톱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돌밭을 일궈 한뼘 한뼘 농토를 만들어가며 고생하셨던 내 아버님 인생에 꼭 바치고 싶었던, 이 아들의 때늦은 선물이다.” (<이 땅에 태어나서> 정주영)라고 말하고 있거니와, 노동자들의 요구를 짓밟고 때로는 야만적인 탄압도 서슴지 않았던 그였지만 적어도 서산의 간척지만큼은 자신의 이(利)를 위해 낭비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미 꿈 하나가 자라고 있었다.

 

1989년 그는 북한을 방문했다. 1932년 아버지 소 판 돈을 들고 고향을 뛰쳐나온 이래 57년만의 귀향이었다. 휴전선 바로 이북, 북한의 최남단이라 할 전선 이북인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 고향을 방문했을 때는 추운 겨울이었다. 그러나 이미 경제적 침체기에 들어가던 북한의 강원도 오지의 사정은 좋지 않았다. 나일론 옷가지로 추위를 가리며 이빨을 부딪치던 친척들에게 옷가지를 내놓은 그는 고향과 이별하면서 숙모에게 와이셔츠 한 벌을 주고 온다. “깨끗하게 빨아서 저기 걸어둬요. 다음에 와서 입게.”

 

그리고 9년 후 그는 다시 고향을 찾는다. 1998년 6월 16일. 서산 농장에서 기른 500마리의 소떼와 함께였다. 워낙 새벽반이었던 그의 집 앞에 꼭두새벽부터 아니 거의 밤을 새운 기자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정주영도 상기돼 있었다. “돼지꿈 꿨어!” 승용차를 타고 500마리의 소떼를 태운 트럭의 선두에서 달리면서 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소 판 돈을 훔쳐 가출했던 소년 시절부터 해방과 분단, 전쟁과 재건, 민주화와 노동과의 대결 그 전 과정이 슬라이드처럼 흘러갔을 것이다. 기자들 앞에서 읽어내린 그의 소감문은 사뭇 감동적이다. "청운의 꿈을 안고 아버지 소를 판 돈 70원을 가지고 집을 나섰습니다." 원래 발음이 새는 그의 목소리가 더 떨려 나왔다. “이제 그때 그 소 1마리가 500마리의 소가 되어 지난 빚을 갚으러 꿈에도 그리던 산천을 찾아갑니다. 이번 방북이 단지 한 개인의 고향 방문을 넘어 남북이 같이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초석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그는 이후로도 소 501 마리를 더 보냈다. 도합 1001마리. 1000 플러스 하나. 왜였을까. 그건 정주영의 다짐이었다. 딱 떨어지는 1천에 그치지 않고 또 하나의 시작을 의미하는 한 마리를 더 넣어 그 이후로도 계속 지원과 교류가 이어지리라는 다짐이었고 기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부러 임신한 소들을 집어넣었다고 하니 사실은 1001마리보다 더 많은 소들이 북한 땅에 갔던 셈이다. “차라리 저 소가 되고 싶다”고 울먹이는 실향민들을 지나 부드러운 음악이 흘러 기존의 삭막함을 지웠던 판문점을 거쳐, 요즘 그 격 때문에 문제가 된 ‘조평통’ 부위원장의 영접을 받으며 정주영은 북으로 갔다.

 

1998년 6월 16일 정주영은 그의 인생 최고의 이벤트를 창출해 냈다. 지금 변모같은 자들이 보면 영락없는 ‘종북좌파’이며 동작구에서 국회의원하고 있는 정주영의 아들도 ‘종북좌파’라고 불러마지 않을만한 행동을 그는 감행했다. 저 나쁜 놈들에게, 좀 있으면 망할 놈들에게 소 1001마리를 보내고 금강산 사업을 약속하고 개성공단을 설득하고 전범(戰犯) 김정일과 기념사진을 찍고 고무 찬양까지 했다. 하물며 북한에는 ‘정주영 체육관’이 남아 있다. 요즘 어떤 이들의 눈에 세상에 이런 종북좌파도 없을 것이다. 그들의 찌그러진 시선이 난무하는 2013년 오늘, 1998년 6월 16일을 돌이켜 본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한탄이 절로 나오게 된다. “우리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by 산하 | 2013/06/16 20:25 | 산하의 오역 | 트랙백

1932.6.15 "해방 전에는 나를 고향에 묻지 말라"

산하의 오역

 

1932년 6월 15일 “해방 전에는 내 유해를 고향에 묻지 말라”

 

온 가족과 일문이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른바 독립운동 3대 명문으로 불리우는 집안이 있다. 의병장 왕산 허위의 가문. 경주 이씨 이회영 가문, 그리고 고성 이씨 석주 이상룡 가문. 이상룡 가문은 아득한 옛날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찬탈당할 때 그 꼴을 보기를 거부한 이증이라는 사람이 안동에 터를 잡으면서 누대를 이어온 지방 명문가였다. 안동역에 내려 한 15분쯤 거리에 임청각이라는 아흔아홉칸 옛 양반 가옥이 나오는데 이것이 석주 이상룡의 생가였다.

 

이 아흔아홉칸 가옥은 그 위세를 적잖이 잃어버리고 있는데 중앙선 철도가 가설되면서 임청각 행랑채 태반을 헐고 철로를 놓은 탓이다. 주변 사람들은 이것이 일제의 복수라고 수군거렸다. 한 집안이 몽땅 독립운동에 뛰어든 집안에 대한 복수라는 것이다. 석주 이상룡은 경술국치 때 이미 쉰 넷의 유학자였다. 당시로 치면 손자는 기본으로 볼 연배였고 환갑상 앞에서 그 재롱을 보며 일가친척의 절 받으며 이제는 살 날이 머지 않았구나 수염 쓰다듬으면 되는 나이였다. 하지만 일찍이 의병에 가담했으며 경술국치를 앞두고는 역적들의 목을 치라고 상소를 올린 이 꼬장꼬장한 선비는 전혀 다른 길을 택한다.

 

“공자와 맹자는 시렁 위에 올려 놨다가 국권을 찾은 뒤에 읽어도 된다.” 평생 유학 서적을 파온 유학자의 일갈이었다. 당시 안동의 유림들 가운데에는 국권 상실을 슬퍼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열 명이 넘었는데 이 순절(?)들 앞에서도 이상룡은 냉담했다. “‘우리가 죽으면 쾌재를 부르는 것은 일본이다. 따라서 끝까지 싸우다 죽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그리고 가산을 정리하고 고향을 떠나기 전 그는 유학자로서, 또 당시의 안동 분위기에서 까무라칠만한 일을 벌인다. 지금도 우리가 “무슨 신줏단지 모시듯 하느냐” 하는 관용어구를 쓰건지와 양반 가문에서는 목숨과도 같았던 신주들을 땅을 파고 묻어 버린 것이다. 기독교인으로 치면 십자가를 밟고 지나간 것과 같은 행동. “나라가 없는데 신주가 무슨 소용인가.”

 

을사조약이 있은 해 1만 5천금을 투자하여 가야산에 항일 기지를 만든 적도 있던 이상룡은 가족들과 함께 만주로 향했고 ‘경학사’ 즉 밭 갈며 배우는 이주민 자치단체를 조직한다. 그와 그 동지들의 노고를 통해 끝도 없이 가을바람에 출렁이던 억새밭은 누런 벼들이 고개숙이는 논들로 변해갔다. 만주에서 논농사를 짓게 된 것은 기본적으로 조선 사람들 때문이거니와 이상룡은 만주의 조선 사람들을 묶어 세우며 , 또 중국 옷을 일상적으로 입는 등 현지인과의 조화에도 앞장서면서 항일 투쟁에 나선다. 국경을 넘을 때 그의 시를 읽어 보자.

“삭풍은 칼보다 날카로워 / 나의 살을 에는데 / 살은 깎이어도 참을 수 있고 / 창자는 끊어져도 슬프지 않다. / 그러나 이미 내 밭 내 집을 빼앗고 또 다시 내 처자를 넘겨다보니/ 차라리 이 머리는 잘릴지언정 내 무릎 꿇어 종이 될까보냐.” 복창하자. 이런 사람들이 선비라는 사람들이다.

 

외교론이나 실력양성론 등 분분한 방안들 가운데에서 이상룡이 견지했던 것은 독립전쟁론이었다. 일단 근거지를 마련하고 그 다음에는 무력항쟁에 나설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이상룡의 지론이었다.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도대체 그게 무슨 ‘정부’냐며 탐탁치 않아하는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을 설득하여 연대를 설득한 것도 이상룡이었고 제멋대로 놀던 임정 대통령 이승만이 탄핵당하고 그 뒤를 이은 박은식도 힘을 쓰지 못하자 임시정부의 ‘국무령’이 되어 동분서주한 것도 이상룡이었다.

 

“워낙 성품이 관후해서 서로군정서 독판 때 나이 어린 병사들에게도 꼭 공대를 하고 동지라 불렀던” (손자며느리 허은씨 증언) 이상룡은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겠다는 결심만큼은 칼날같았다. 항일 자금이 모자라자 임청각을 팔겠다고 아들을 국내에 들여보냈고 그것만은 안된다는 문중에서 돈을 걷어 주었던 것은 일화 축에도 들지 않는다. 손자가 청년단체의 장으로 추대됐을 때 손자가 자신은 이대 독자이니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고 사양하자 “나라도 없는 놈이 무슨 가족을 챙긴다고!”라고 호령하던 위인이었다. 만주사변 후 중국인들이 조선인들 때문에 일본놈들이 왔다며 박해하기 시작하고 신흥무관학교장 여준과 대한독립군단 참모총장 이장녕이 마적들에게 피살당했다는 소식에 노구의 이상룡은 급격히 기력을 잃고 1932년 6월 15일 세상을 뜬다.

 

죽기 직전 대구에서 동생이 찾아와 고향으로 모시겠다고 하자 이상룡은 마비돼가는 혀를 가까스로 움직여 이렇게 말한다. “조선 땅이 되기 전에는 데려갈 생각을 마라. 조선이 독립됐다 하면 내 유골을 유지에 싸서 조상 발치에 묻어 다오.” 그 유언은 지켜졌다. 그러나 너무 늦게 지켜졌다. 1990년 9월 2일 일단의 한국 공무원들과 유족들이 중국 흑룡강성 아성시에서 이상룡의 유해를 모시고 들어왔던 것이다. 해방된 뒤 45년이 지나도록 그는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그 집안에 독립운동 훈포장을 받은 이가 아홉 명이 넘고 더 많은 이들이 할아버지의 뜻을 이어 일제와 싸웠지만 그 후과는 참담했다. 외아들 준형은 만주에서의 고단한 삶을 정리하고 국내로 들어왔지만 일제의 계속되는 회유에 시달리다가 칼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일제 하에 사는 것은 수치일 뿐이다.” 그 손자는 끝까지 만주에서 투쟁하다가 감옥에서 해방을 맞았고 해방 이후에는 남로당원으로 활동하다가 전쟁 중 병사했다. (해방조국 군경의 총에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일 듯.) 그리고 그 증손자는 고아원에 맡겨지기까지 하는 등 곤궁한 삶을 보내야 했다.

 

이상룡의 유해는 돌아왔지만 그 국적은 이후로도 오래도록 무국적자로 남아 있었다. 일제의 호적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 대한민국 호적인 바, 일제의 호적을 거부한 많은 이들 즉 단재 신채호나 이상룡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그 국적을 인정받지 못했던 것이다. 이게 바로잡힌 것은 2009년이다. 이상룡이 고향을 떠난 근 100년 만에 이상룡은 후손들의 나라의 국적을 회복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서글픈 얘기가 있다. 국적 회복 관련 법률은 제정됐지만 그 뒤처리는 개인에게 떠맡겨졌기에 이후 변호사 비용 등 무려 500만 원 가까운 비용을 부담해야 했던 것은 이상룡의 후손이었다는 사실.

 

이 포스팅을 읽으시는 분들 가운데 이래서 친일파는 쓸어 버려야 한다고 비분강개하실 분들이 많겠지만, 나는 거기에 반대한다. 이미 친일파들 본인은 백골이 진토된 지 오래다. 원래 넋같은 것이야 없었던 위인들이고. 그 죄를 자손에게 물을 수는 없고 그건 연좌제에 불과하다. 우리가 할 일은 오히려 이상룡같이 자신의 일생을 걸고 일본 제국주의와 맞섰던 이들을 기억하고 발굴하고 3대 후손이든 4대 후손이든 조상의 고난과 “3대가 망했던” 슬픔을 보상해 주어야 하는 일일 것이다. 공연히 박물관장이 이완용의 손자니 조카니, 그 할아버지가 악질이었느니 하는 족보를 캐는 것보다는, 이완용과 그 일파들이 왜 그런 길로 갔고 왜 그런 선택을 했고 어떻게 하면 그런 일들이 되풀이되지 않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임청각에는 이상룡의 시 한 수가 남아 있다고 한다. “슬퍼 말고 옛 동산을 잘 지키라. 나라 찾는 날 다시 돌아와 살리라.” 그는 돌아왔다. 너무나도 늦었지만 


by 산하 | 2013/06/16 19:58 | 산하의 오역 | 트랙백

2004.6.14 스피커를 떼라

산하의 오역

 

2004년 6월 14일 스피커를 떼라

 

고대와 연대의 정기전에서는 많은 것이 묘한 열기를 띤다. 1년 365일 중 거의 이 날 하루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5개 운동부 선수와 감독은 말할 것도 없고 응원단 또한 입이 부르트고 목이 찢어지도록 연습을 되풀이한다. 경기장에서 고대 응원단이 특히 민감했던 건 앰프였다. 고려대 재단이 연세대 재단보다 많이 빈한한 것 같지는 않은데 경기장에서는 이상하게 연세대학교 앰프가 항상 한 수 위로 그 출력이 높았다. 89년 고연전 때는 이 앰프 문제로 연대가 “합의를 깼다”는 이유로 고대 응원단 일부가 항의하러 갔다가 3만 학생들 앞에서 응원단 끼리 치고 받는 (경기장에서는 축구가 진행 중이었고)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고대생들은 “니들은 앰프지만 우리는 목청이다!”라고 부르짖으며 악을 썼지만 솔직히 “젊은 그대”보다는 “해야”가 더 잘 들렸다.

 

그런데 이런 류의 앰프 싸움은 휴전선에서도 남북간에 행해져 왔다. 처음에는 빤히 바라다보이는 남과 북의 병사들끼리 목청 싸움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1960년대 군 생활한 사람들의 회고를 들어 보면 전방 부대에 따블백 매고 자대배치받아 가면 어김없이 북한의 대남심리전 방송에 이런 방송이 나왔다고 한다. “오늘 00부대에 배치받아 온 강감찬 이병 김유신 이병 이순신 이병을 환영합니다.” 도대체 저것들이 어떻게 알았을까 무섭기도 하고 짜증나기도 했다고 한다. 21세기에도 격이니 급이니 따지다가 깨지는 판국이기는 하지만 남과 북의 대결의 방식은 단순했다. “니가 하면 나도 한다”였다. 욕설과 야유가 교환되다가 한쪽이 핸드마이크를 들면 한쪽이 스피커를 갖다 놓고 그게 결국은 고성능 방송 장치로 전화화여 피차의 진영에 말포탄을 쏘게 되는 식이었다.



 

북한이 월북을 선동하는 간판을 내걸면 남쪽은 귀순환영을 내걸었고 북한이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틀면 이쪽은 유행가로 맞섰다. 하지만 대남심리전방송이 시작된 60년대 초엽에는 경제 사정이 좋았던 북한이 우위에 있었다. 언젠가 들었던 얘기로 방송 시설이나 장비에서 열세였던 국군은 인민군 군가를 외울 지경이었고 또 마이크를 들고 서로를 공박하는 싸움에서도 현격히 밀렸다고 한다. 그런데 딱 하나 북한군을 침묵하게 만드는 무기(?)가 있었다. 그건 말년병장 김 병장의 고별 인사였다.

“어이 인민군 0사단 0연대 0대대 0중대 동무들. 나 여기 김 병장이다. 대답해 봐라.”

“와 기러네 간나 새끼.”

“응 고생해라. 나 제대한다. 너희는 좀 남았지?” (인민군 군 복무 기간: 최소 7년)

“........”

 

72년 남북 공동성명 이후 중단됐던 양측의 심리전 방송은 80년대 이후 힘차게 재개됐다. 이때쯤이면 남한의 경제력도 욱일승천하던 때라 앰프 물량에서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우리 방송 소리에 북쪽 방송 소리까지 최악의 소음이 만들어졌고 국방부 심리전단 소속으로 곳곳에 배치돼 있던 병사들은 청각장애가 생길 지경이었다고 한다.

1986년 김일성 사망설이 나돌았을 때 “김일성 수령 서거”가 방송되어 (또는 그렇게 잘못 들어) 전국을 흥분으로 몰아넣기도 했고 89년 임수경 방북 때는 열렬히 그 밀사의 행적을 남한 병사들에게 전해 주기도 했으며 대학 시절 마니산에 올라갔을 때 우렁우렁 들리던 북한 심리전 방송. 그러나 북한 심리전 방송은 동구의 몰락과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그 카랑카랑은 쥐꼬랑쥐꼬랑이 돼 갔다. 스피커를 돌릴 전력조차 아쉬웠던 것이다. 한편 남한의 목청은 더 높아만 갔다.

 

수백개의 스피커를 통해 10~15시간 동안 방송했는데, 북한쪽으로 낮에는 10킬로미터, 밤에는 24km 넘는 곳까지 방송이 들렸다고 한다. 어느 해의 남북 교섭 당시 “남조선의 일기 예보까지 우리 인민들이 듣는데 이거는 좀 아이라 말입니다.”고 북한 고위 관리가 불평했듯, 대북 심리전 방송은 과거 북한 방송처럼 인민들에게 뿌려지는 말(言)의 발칸포였다. 견디다 못한 북한은 “상호비방 중지”를 요구하고 2004년 6월 14일 마침내 휴전선에 설치됐던 양쪽의 기싸움의 무기 앰프와 스피커들은 철수하게 된다. 남한측의 마지막 방송은 이것이었다. “끝으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기원하면서 그동안 「자유의 소리」를 청취해 준 인민군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무궁한 행운을 빕니다.” 40년 동안 이어온 어린애같은 자존심 싸움의 끝이었다.

 

남한과 북한은 2004년 6월 14일 밤부터 휴전선에 설치된 고성능 방송 장비들을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남한과 북한의 유치함은 새롭게 진화되고 있다. 자신들을 비방하지도 않고 귀순을 요구하지도 않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두 눈뜨고 못보겠다며 그 지점은 포격하겠다고 우기는 광기를 선보였던 북한도 북한이지만, 북한에게 못하게 된 ‘심리전’을 ‘오늘의 유머’ 게시판에서 댓글 다는 것으로 펼치고 있는 남한의 ‘7급 공무원’들도 딱하기는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by 산하 | 2013/06/16 19:56 | 산하의 오역 | 트랙백

1966.6.13 미란다 원칙

산하의 오역

 

1966년 6월 13일 미란다 원칙

 

영화깨나 본 사람들이라면 아니 깨나까지도 필요 없고 남들 보는 만큼 본 사람들이라면 거의 다음과 같은 말을 암송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당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지 않을 권리가 있으며 변호사를 부를 권리가 있다.” 미란다 원칙에 따라 경찰이 범죄 혐의자 체포 시 의무적으로 옲어대야 하는 대사다. 이 미란다 원칙이 확립된 것은 한 강간범 때문이었다.

 

1963년 미국 애리조나 주 피닉스라는 도시에서 에르네스토 미란다라는 스페니쉬한 이름을 가진 청년이 18살 난 소녀를 강간한 혐의로 체포된다. 소녀는 사막에서 이틀 동안 끌려다니며 곤욕을 치렀다고 했다. 소녀는 가해자 이름을 댔다. 경찰은 즉시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범인을 잡으러 출동했다. 곧 미란다는 수갑 차고 경찰서로 끌려왔다. 그런데 미란다는 범행을 부인했다. 이에 바짝 열받은 경찰은 더욱 강도 높은 추궁 (어떻게 했는지 미루어 짐작이 감)을 벌여 마침내 자백을 받아낸다. 자술서 상단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인쇄돼 있었다. “나는 나의 법적 권리에 대해 완벽하게 숙지했고 내가 하는 진술이 나에게 불리하게 적용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즉 경찰은 제대로 된 권리의 내용을 미란다에게 알려 주지 않았던 것이다.

 

미란다는 진술은 번복했지만 유죄 판결을 받고 대법원까지 사건을 끌고 간다. 그리고 여기서 경천동지할 판결이 나온다. “심문 중 변호사를 입회시킬 수 있는 권리를 고지받지 못이했고, 어떠한 경우에서든 유효하게 보호받아야 하는 자기부죄진술 거부권 보장되지 않았음이 명백하다. 이러한 피고인의 권리를 고지하지 않은 경우에는 증거로서 허용될 수 없다!” 대법원 판사들은 5대 4로 미란다의 무죄를 선고한다.

 

이 원칙적인 판결에 분노도 터져나왔다. 당장 경찰들이 “범인을 잡으라는 거냐 말라는 거냐”고 아우성을 쳤다. “변호사가 달라붙어 있는 넘을 어떻게 심문하란 말이냐.” 일반 시민들도 대법원이 “범죄예방이나 범죄피해자의 권리보다는 범죄자의 권리를 더 존중하고 있다.”고 항의했다. 그러나 법의 판결은 법의 판결이었다. 미국 각지의 경찰들은 미란다 원칙이 적혀진 종이를 몰래 들고다니여 외우고 체포한 이의 귓방망이를 잡고 그 대사를 읊어야 했다.

 

하지만 대법원에서 무죄를 인정받았다고 해서 미란다가 좋아할 일은 못되었다. 미란다의 동거녀가 새로운 증언을 했고 경찰은 다시 미란다를 체포했다. 물론 미란다 원칙을 또박또박 불러 준 후에. 미란다는 10년의 징역을 살고 나왔지만 그에게는 더 큰 횡액이 기다리고있었다. “내가 미란다 원칙을 만든 그 미란다요!”를 뻐기고 다니던 그는 술집에서 시비를 일으켰고 한 남자가 미란다의 목을 칼로 그어버린 것이다. 미란다는 극심한 고통 속에 서서히 죽어갔고 사람들은 미란다를 돕는 일에 적극적이지 않았다고 전한다. 물론 미란다를 죽인 이를 체포할 때에도 미란다 원칙은 낭랑하게 암송됐다. 미란다는 그렇게 젊은 나이에 허무하게 죽지만 그 이름은 전 세계 대부분 나라의 경찰들에게 생생하게 전달된다.

 

영화 <세븐 데이즈>에서 박휘순이 “넌 변호사를 선임해도 소용없고, 묵비권을 행사하면 계속 쳐 맞는거야!”를 부르짖을 때,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박중훈이 “"내가 지금 너한테 왜 이런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고...그리고 나머지는 지금 생각이 안 나, 이 XX 놈아...나중에 판사가 물어보면 다 들었다고 그래, 알았어?”라고 윽박지를 때 가슴 속 한 구석이 시원해졌던 기억이 나지만 정말로 그럴 경우 경찰은 경을 칠 수도 있다. 실제로 판례로 미란다 원칙 고지 없이 체포된 이에게 무죄가 선고된 판례가 있으니까.

 

천하의 나쁜 놈, 연쇄살인범에 어린애 강간범들에게까지도 이 원칙이 적용되어야 하는 이유는 결국 그들도 한 인간으로서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을 때 일반 시민의 권리 또한 소중하게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놈들 같은 짐승들에게 무슨 권리?”라고 부르짖는 건 속이 뻥 뚫리는 일이지만 자신이 짐승의 누명을 쓸 수 있음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만만하게 하니 범죄자들이 판을 치지“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페친 금태섭 변호사님의 정의가 명징하니 답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피의자의 권리를 보장한다고 해서 범인들이 활보하거나 법질서가 어지럽혀지는 것은 아니다. 적법절차를 지키면서도 사법의 정의는 달성될 수 있다.”

 

결코 위대하지도 뛰어나지도 않았던, 아니 인간 이하의 범죄자였던 한 청년의 이름은 그렇게 인류가 발견한 인권 존중의 한 상징으로 역사에 남게 된다. 1966년 6월 13일 미란다 원칙이 세워졌다.

 


by 산하 | 2013/06/14 14:37 | 산하의 오역 | 트랙백

1986.6.12 선우휘 사망

산하의 오역

 

1986년 6월 12일 선우휘 사망

 

일제 강점기와 그 뒤를 이은 한국 현대사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 가운데 평안도 출신 인사들의 활약은 두드러진다. 별로 기분 좋은 얘기는 아니지만 독립운동 진영 내에서 서북 출신 인사들이 파벌을 구성할 정도로 많았고, 대충만 꼽아 보아도 도산 안창호, 춘원 이광수, 남강 이승훈, 고당 조만식, 장준하, 함석헌 등이 죄다 평안도 출신이다. 제2공화국을 돌이켜 보면 의 내각수반인 장면 총리를 비롯하여 각료의 태반이 평안도 사람이었고 학술원의 초대 회원 51명 중 최소한 13명이 평안도 출신이다. 그 평안도 출신 인사들 가운데 한 명의 이름을 주목해 본다. 선우휘가 그다.

그는 평북 정주 출신이었다. 소련군이 북한에 들어와 벌이는 일을 보고 치를 떨며 월남했던 ‘삼팔따라지’였던 그는 동향의 사장 방응모가 운영하는 조선일보 기자를 잠깐 하다가 군에 입대, 정훈장교로 활약하며 대령으로 제대한다. 워낙 술을 좋아하는 예술가 타입의 인물이라 “막걸리 대령”으로 이름이 높았고 원치 않는 명령 앞에서는 술 취한 척 쓰러져 개기기도 했다는 그는 전역 이전 소설가로 등단했고 이후에는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언론인 생활을 시작한다.

 

남재희 전 장관의 평가에 따르면 그는 ‘리버럴 우파’였다. 동년배였던 경상도 출신의 이병주를 ‘리버럴 좌파’라 했으니 그에 조응되는 표현일 것이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진보파, 이병주의 ‘지리산’은 리버럴 좌파, 선우휘의 ‘불꽃’, ‘깃빨없는 기수’는 리버럴 우파, 이문열의 ‘영웅시대’는 보수파.” 리버럴 우파라는 표현은 매우 적절한 듯 싶다. 북한에 들어온 소련군의 하는 양을 보고 미련없이 남하했던 그는 매우 리버럴했지만 ‘우익’으로서의 정체성을 결코 포기한 적이 없고 말년으로 가면 우익의 정체성이 리버럴의 그것을 잡아먹었기 때문이다.

 

<불꽃>이나 그의 장편 <노다지>를 보면 해방 공간의 우익에 대해서도 그다지 호감이 없고,피바람을 일으키고 다녔던 그의 고향 청년들의 조직, 서북 청년단은 혐오해 마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생각 하나는 명확했다. 제 아무리 우익이 삽질을 해도 북한을 비롯한 좌익보다는 낫다는 일종의 도그마. "휴전선 이북의 김일성 도당이 있는 한 반공이 최우선"이라는 생각은 그의 일생을 관철한 원칙이었다. 적의 적은 동지가 되는 법, 그는 조선일보 편집국장으로서 월남전 관련 기사를 빌미로 외신부장 이영희를 몰아내고, 이후 유신과 5공에마저 눈을 감는‘오른쪽’ 인사가 되어 갔다.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유신치하 언론인들의 자유 수호 투쟁 당시 그가 보여준 행동이다. 그는 해직기자측의 변호사가 벌이는 증인 심문에서 이렇게 대답하여 변호사의 입을 벌어지게 만든다.

“언론자유실천을 위해 기자협회 분회의 회보를 발간하였는데 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신문제작을 하는 일도 벅찬데 그런 것까지 한다는 것은 주제넘은 짓입니다 ”

“언론이 병들어 빈사상태에 놓여도 모든 것을 사장에게 맡기고 가만 있어야 합니까?”

“물론입니다”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그는 오갈데 없는 ‘수구꼴통’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그렇게 폄하하고 끝내기에는 껄적지근한 점이 많다. 그는 북한을 의식하여 독재 정권을 용납하긴 했으나 그에 빌붙어 부귀영화를 누리지는 않았고 그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일에는 반대의 목소리를 분명히 냈다. 그는 언론사상 처음으로 정권에 의해 구속된 편집국장이었다. 김대중 납치 사건 때 그는 사건 다음 날 애국적 견지에서 김대중을 납치해 왔다는 5명의 청년들에게 자수하여 전모를 밝히라고 요구를 했고 이것이 무망하게 돼 가자 9월 7일 돌아가는 윤전기를 세운 뒤 기습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담은 사설을 끼워 넣는다.

 

“......생각할수록 김대중사건은 그와 전혀 무관한 절대 다수의 국민에게는 어이없고 견딜 수 없는 횡액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나머지 사건을 격발하였다고 볼 수 있는 김대중씨의 그간의 해외정치활동을 들추려는 사람도 없지 않으나, 아직 그러기에는 氏가 당한 액운이 너무나 처절하며 그 입장이 몹시도 처량하다. 이번 사건으로 건국 4반세기를 넘긴 이제와서 남에게서 민주주의 강의를 들어야 하는 것도 생각하면 기가 찰 일이다.

....... 이제 햇곡으로 떡을 빚어 조상의 영전에 바쳐야 하는 이 국민의 가슴에 젖어드는 불안은 무슨 까닭이며, 왜 죄없는 착한 국민은 이다지도 가슴을 죄어야 하는가. 신이여! 이 국민에 용서와 축복을! (1973년 9월 7일 조선일보 사설)

 

이 사설을 쓰고 그는 사직서를 사장 책상에 올려 두고 잠적했는데 이 사설의 최초 독자는 다름아닌 백기완이었다. 자주 어울려 술을 나누던 사이였던 그에게 선우휘는 이렇게 말한다. “단편소설 하나를 썼어, 썼는데 형식은 신문 사설이야.” 지명관이 TK생이라는 필명으로 독재 정권 하의 한국 현실을 폭로하는 원고를 일본으로 보냈을 때 그 전모를 다 알고도 죽을 때가지 입을 다문 것 또한 선우휘였다.

 

운동권들을 “역사의 교훈을 모르는 덜 떨어진 지진아(遲進兒)”로 매도한 그였으나 김지하가 인혁당 사건으로, 임헌영이 남민전 사건으로 중형을 받게 되자 선우휘는 ‘이들이 자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면 아닌 것’이라며,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쓰고 이들의 석방을 주장하는 칼럼까지 쓰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후 석방된 임헌영이 인사차 찾아갔을 때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을 권하면서, 시대의 광기를 예고한 듯한 이 소설을 읽고도 좌익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대책이 없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그는 뛰어난 작가이자 언론인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일과 해야 할 일에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으나 자신이 옳다고 믿어 왔던 ‘진영논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고 그 진영이 쌓은 성벽 위의 총구에서 세상을 내려다보았으며 그 성벽이 때로는 장벽과 질곡이 되고 있음을 인정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다. “내가 학생문제에 관해 아예 입을 다물기로 작정한 데는 내 나름의 까닭이 있다. 나로서는 입을 열면 신랄하게 비판할 수 밖에 없는데, 그러려면 그런 학생들이 투쟁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정치권력에 대해서도 똑같은 강도로 신랄하게 비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가 불가능하니 다른 하나도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이 공정한 비판의 논리라는 것이다.”고 정치 권력의 전횡을 비판하지만 ‘학생 문제’에 참지 못하고 툭하면 날 선 필봉을 휘둘러 댔던 그의 글들은 결과적으로 “학생들이 투쟁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정치권력”을 돕는 결과로 귀착됐던 것이다.

 

백기완이 회상하는 선우휘의 마지막 날이다. “1986년 고문 후유증으로 병원에 입원했는데 어느 날 꿈속에 선우 선생을 만났어. 하얀 저고리 입은 그 양반을 명동 한 복판에서 만난 거야. 내가 ‘아, 영감 여기서 이러면 어떡 하우’라고 하자, 선우 선생은 ‘소주 한잔 하자’는 거야. 그러곤 꿈에서 깼어. 다음날 아침 문병 온 사람이 알려줬어. 선우 선생이 돌아가셨다고….” 선우휘는 KBS의 6.25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각지의 전장(戰場)을 답사하느라 발품을 팔다가 돌연 세상을 등졌다. 마지막 날까지도 그는 그의 진영에 충실했다. 



by 산하 | 2013/06/14 14:04 | 산하의 오역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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