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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 여행기 4 - 음악의 도시 소금의 도시 by 산하

동유럽 여행 4. 소금강에 음악이 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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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서 모차르트를 만난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은 오스트리아 태생이지요?”라고 물으면 그는 뭐라고 할까? 그는 아주 당연하게 아니오 나는 잘츠부르크 태생이오. 하면서 고개를 저을 거야. 모차르트가 살던 시대만 해도 잘츠부르크는 엄연히 오스트리아 황제 아닌 잘츠부르크 대주교가 다스리는 독립국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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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한 것처럼 잘츠부르크는 알프스 산맥 자락에 있어. 알프스 산맥은 본래 바다 아래 있었는데 융기 작용을 통해 오늘날의 산맥으로 치솟아 오른 거거든. 그 와중에 소금물 호수들이 생겼는데 이 호수가 증발하고 소금만 남은 위에 다시 지층이 쌓이면서 깊은 지하에 암염이 생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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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1만년 전이나 100년 뒤나 사람은 소금을 못 먹으면 살 수 없는 존재다. 바다에서 먼 내륙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이 암염을 찾아내야 했고 실제로 아득한 옛날부터 그를 캐내며 살아왔어. 소금의 도시 잘츠부르크 근처에 있던 수많은 소금 광산은 잘츠부르크를 풍요롭게 만듦과 외국 군주들의 탐욕을 자극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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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감치 서기 700년 경에 로마 교황청에서 관구를 설치한 이래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와 심한 갈등을 빚었던 콜로레도 대주교를 마지막으로 독립을 잃을 때까지 근 천년을 이어 온 독립국가였어. 그 근간은 바로 얄프스의 암염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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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츠부르크를 굽어보는 호헨잘츠부르크 성의 골격은 11세기 게브하르트 대주교 때 이뤄지기 시작했어. 이 호헨잘츠부르크 성이 생긴 배경은 아주 유명한 역사적 사건과 맞물려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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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츠부르크를 다스린 대주교에서 보듯, 당시의 성직자는 오늘날의 성직자와는 차원이 다른 정치적 지위를 지니고 있었고, 공식적으로 결혼할 수 없는 가톨릭 성직자의 경우 그 후계 구도까지도 좌우할 수 있으니 성직 임명권이란 대단한 이권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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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 후반, 이 성직자 임명권을 두고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지속적으로 대립했어. 그레고리오 7세는 교황까지 좌지우지하던 세속 권력으로부터 성직 임명권을 되찾아 교회 본연의 권리로 확립하고 싶어했지만 하인리히 4세가 자기 이권을 순순히 넘길 리 없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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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오 7세가 성직 서임권의 교회 독점을 선언하자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하는 협박으로 맞받고 밀라노 주교를 임명하는 강수를 둬. 그러자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해 버리고 그를 따르는 성직자들에게도 파문장을 날린 뒤 그에 대한 충성 맹세가 효력이 없음을 선언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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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로마제국이 발칵 뒤집혔어. “황제가 파문당했다.” 신성로마제국의 제후와 영주들이 파문당한 하인리히에게 등을 돌리는 기색이 역력하자 하인리히 4세는 발등에 불이 붙은 정도가 아니라 머리카락이 타들어가는 심정이 됐지. 1077년 1월의 엄동설한에 하인리히 4세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교황이 머물고 있던 카노사에 찾아가 맨발로 서서 용서를 구하며 농성했지. 이걸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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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츠부르크의 대주교 게브하르트도 이 사태의 전개를 심각하게 들여다보고 있었지. 야 이거 자칫하면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겠구나. 실제로 후일 하인리히 4세는 이 카노사의 굴욕을 잊지 않고 세력을 끌어모아 로마로 쳐들어가 교황 그레고리 7세를 폐위시키게 되니까 그 긴장 상태는 상당 기간 지속됐을 거야. 언제 누갸 임명했는지 모를 또 다른 대주교가 “잘츠부르크는 내 꺼야!” 하면서 쳐들어올지 모르지 않겠어. 이 불안함을 극복하기 위해 게브하르트는 잘쯔부르크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성을 쌓으라고 지시했고 이게 호헨잘츠부르크 성의 원형이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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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많은 대주교들이 이 성을 증축하고 보강하고 수리하면서 자신의 주거지이자 은신처이자 농성장으로 삼았다. 그 가운데 유명한 두어 명을 소개해 줘 볼게. 레온하르트 폰 코이자흐라는 대주교는 성채 안 곳곳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단다. 그는 초기 성채를 대대적으로 보수해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든 인물인데 그의 문장(紋章)은 매우 특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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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 기사들이나 성직자들의 경우 자신만의 스토리나 의지에 따라 가문이나 개인의 문장으로 삼았는데 레온하르트의 문장은 순무, 즉 무 비슷한 야채와 사자야. 전혀 안어울리는 조합이지. 근데 왜 순무가 들어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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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교라는 상당히 높은 지위의 성직에 올랐지만 레온하르트는 어려서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사고뭉치였다는구나. 놀기 좋아하고 여자 꽁무니 따라다니는 게 일이고, 뭐 그 외 망나니 짓은 한도 끝도 없고. 그런데 당시 보호자는 숙부였다고 해. (부모님이 안계셨는지) 숙부는 조카에게 호통도 쳐 보고 눈물겨운 설득도 해 봤지만 모두 무위로 돌아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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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머리 끝까지 화가 치민 숙부가 순무를 들고 레온하르트의 머리통에 던져 버렸어. “이 인두겁을 쓴 짐승같은 놈!” 아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어. 순무를 맞은 레온하르트는 마치 그분의 빛을 본 듯 돌변하고 회개했고 나쁜 일에서 손을 끊고 이후 경건한 성직자로 거듭났다는 거야, 순무 역사를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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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 순무가 특별히 주님의 은총을 입은 순무일 리는 없고 순무를 마빡에 얻어맞은 경험이 “이게 사는 건가?” 하는 실존적 질문을 던지는 계기가 됐을 듯 하지만 어쨌건 레온하르트 주교는 자신의 문장을 통해 ‘순무의 기적’을 후세에 전하고 있어. 이거 우리 집에도 무라도 몇 개 갖다 놔야 하나. 혹시 엄마가 아빠에게 던지면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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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명 소개할 사람은 이 잘츠부르크를 혁명적으로 바꿔 놓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는 볼프 디트리히라는 대주교였어 나이 스물 여덟에 잘츠부르크의 지배자가 된 그는 야심도 크고 그만큼 열정적인 인물이었지. 알프스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잘츠부르크의 건축 양식은 대개 고딕 양식, 즉 오늘날 한국 교회들이 거의 예외없이 택하고 있는 뾰족 첨탑을 기본으로 했는데 잘츠부르크를 “북방의 로마”로 만들고 싶어했던 볼프 디트리히는 바로크 양식을 도입하여 대성당을 짓기 시작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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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따란 광장과 화려한 분수, 조각상들을 배치한 것도 로마를 본뜬 거였고. 교황령에서 교황이 정치적, 종교적 수장이었던 것처럼 디트리히 역시 자신이 정치적, 종교적으로 지배하는 잘츠부르크를 꿈꿨던 거지. 그래서 오늘날의 잘츠부르크의 고풍스런 풍경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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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사람은 너무 욕심이 많은 게 흠이었어. 우선 성직자로서는 금지돼 있던, 하지만 당시 성직자들은 으레 다 갖추고 있던 자식 욕심(?)이 많았다. 평민의 딸이었던 살로메와 20년이 넘도록 연인 관계였고 (결혼을 못하니) 15명의 아이들을 낳았다고 하니 대단하다 싶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등장하는 그 미라벨 궁전은 바로 디트리히가 살로메에게 준 선물이었단다. 트랩 대령의 일곱 명의 아이들만 해도 와 많다 했는데 그 두 배가 넘는 아이들이 그 정원을 뛰어놀았던 셈이야. 도레미파솔라시도레미파솔라시도 무려 세 옥타브를 소화할 수 있었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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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경제적 욕심도 많아서 소금 단가를 낮춰 더 많은 이익을 취하려다가 역시 소금 광산에 이권이 걸쳐져 있는 독일 남부 바이에른 왕과 충돌하여 ‘소금 전쟁’(1611)에 휘말렸고 결국 실각하여 자신의 도시를 지켜주던 그 요새에 감금됐다가 비참하게 죽게 돼. 요즘도 날궂은 날이면 이 볼프 디트리히의 유령이 성 안에 출몰한다는데 그건 믿거나 말거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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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노사의 굴욕이 펼쳐지던 격동기에 게브하르트 대주교가 건설하고 순무 맞고 정신차린 레온하르트가 정성들여 보수한 호헨잘츠부르크 성채에서 볼프 디트리히 대주교가 심혈을 기울여 공사를 시작했던 고풍스런 도심지를 내려다보면 만감이 교차할 수 밖에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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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서는 모차르트의 도시답게 잘츠부르크 음악제가 한창이고 또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떠올려 보면 거기 사는 사람들이 다 음악 애호가인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음악의 도시 이전에 잘츠부르크는 ‘하얀 황금’, 소금의 도시였고 모차르트의 교향곡만큼 그 풍경도 아름다우나 그 속에 밴 역사는 달콤하기보다는 짜디짠 사연이 숨어 있기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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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관통해서 흐르는 잘자흐 강. 강폭은 좁지만 유속은 무척 빠르다. 그 강을 타고 소금이 북쪽으로 갔고 소금짐 위로 모차르트의 움악과 줄리 엔드류스의 새된 목소리가 함께 흐른다. 그를 뒤로 하고 이제 아빠는 발칸 반도로 남하한다. 예전의 유고슬라비아였던 나라들로.

동유럽 여행기 3- 사운드 오브 뮤직 by 산하

유럽과 발칸 여행 3 음악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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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키 크롬로프에서 오스트리아 국경까지는 그리 멀지 않아.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독일어를 쓰지. 아니 그들은 결코 독일어를 사용한다고 하지 않는다지. ‘우린 오스트리아 말을 사용하는 거야.’라고 정색을 하면서 말이야. 동부독일의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하기 전까지 오스트리아는 중부 유럽의 최강국 중의 하나였고, 프로이센과 전쟁을 벌인 끝에 패전하여 독일 지역의 주도권을 빼앗기긴 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전까지 꽤 당당한 역사를 지닌 오랜 제국이었어. 그래도 언어를 쓰고 문화가 같으니 독일계라고 불리는 걸 어쩔 수는 없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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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국경에서 가깝고 소금 무역의 중요 거점이었던 체스키 크롬로프에는 독일계 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었어. 독일 본토와 인접했던 주데텐 지역 등을 비롯해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접경한 체코의 각 지역에도 그랬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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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린쯔 출신의 히틀러는 체코 내 독일인들의 권리를 내세우면서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와 슬로바키아를 합친 이름, 지금은 분리됐지만)에 영토적 야심을 드러냈고 전쟁을 어떻게든 피해 보려는 영국과 프랑스의 양해 하에 이를 독일에 합병시켜 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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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기어코 터진 전쟁에서 체코인들은 집요하게 저항했고 체코인 특공대가 나찌의 최고위직 간부였던 하이드리히를 암살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해. 이 과정을 다룬 영화가 <새벽의 7인>이라는 고전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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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전쟁이 끝나면서 수백년 체코에 터 잡고 살던 독일인들온 졸지에 미운 오리 새끼가 돼 버렸어. 단순히 미운 정도가 아니라 당장 어떻게 해 버리고 싶은 혐오의 대상이 된 거야. 체코인들은 이웃에 살던 독일인들에게 달려갔어. “죽고 싶지 않으면 떠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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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서 유혈극이 벌어졌고 한때 체코인들의 상전 노릇을 하던 독일인들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터전과 전 재산을 버리고 떠나야 했지. 수백만 명이 일시에 추방당했고 그 중 수십만 명은 목숨을 잃었다고 해. 잘 알려지지 않은 20세기의 비극이었지. 가해자로 규정됐고, 실지로 가해자의 일원이기도 했던 독일인들이었기에 그 희생은 잘 알려지지조차 않고 있다만. 아무튼 그때 체스키 크룸로프의 독일인들도 일소됐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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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때 추방된 독일인들은 수용소에 실려가던 유태인들과 비슷한 몰골로 우리가 가는 길을 따라 국경을 넘었을 것이고 첫 오스트리아 도시라 할 린쯔를 지나면서 히틀러를 생각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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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운 산을 찾아보기 어려웠던 체코와는 달리 잘츠부르크에 가까워지면서 자연의 색깔과 풍모가 달라지기 시작했어. 알프스 산맥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지. 찬탄을 흘리며 풍광을 바라보는 내 귀에 가이드 아저씨가 한 마디가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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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트랩 대령과 마리아가 대화 나누던 호숫가 기억나십니까? 바로 앞에 보이는 저 호수가 그곳입니다.” 아빠의 머리 속은 곧바로 사운드 오브 뮤직의 노래들로 삽시간에 가득 차 버렸어. 눈 앞에 보이는 알프스 산기슭에서 종달새처럼 노래하던 마리아 (줄리 앤드루스), 나찌로부터의 탈출을 앞두고 에델바이스를 선창하던 트랩 대령이 목이 메어 노래를 잇지 못하자 “Small and White...."로 남편을 응원하던 마리아, 그리고 관객과의 대합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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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랑 네가 어렸을 적 <사운드 오브 뮤직>을 네 번이고 다섯 번이고 거푸 봤던 모습이 떠올라오면서 함께 오지 못한 게 참말로 아쉬워지더구나. 이번 여행지 중 어디가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잘츠부르크만큼은 꼭 너랑 다시 들러 보고 싶은 곳이야.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하나 때문에라도. 너희들이 열광했던 것만큼, 또 아빠와 엄마도 흥겹게 추억하고, 심지어 할아버지 할머니도 지금 버스 안에서 가이드 아저씨가 틀어주는 <사운드 오브 뮤직> DVD를 열렬히 지켜보시는 것만큼 <사운드 오브 뮤직>은 반 세기가 넘도록 여러 세대, 인종과 민족의 구분없이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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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거의 모든 곳에서, 심지어 철의 장막을 넘어 공산권에도 개봉됐고 이전의 최고 흥행작이라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기록을 경신했지. 바람과함께 사라지다가 그 후 잇달아 재개봉되면서 다시 순위가 바뀌고 타이타닉, 아바타 등 대형 흥행 영화들이 등장해서 순위는 밀렸지만 2015년 기네스북에 따르면 물가상승률에 비례한 역대 흥행 수익에서 5위를 차지하고 있어. ET나 죠스 같은 스필버그의 자랑들을 물리치고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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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쯔부르크 곳곳에는 그 추억이 남아 있단다. 마리아와 아이들이 춤추듯 행진하며 도레미 송을 부르며 들어오던 곳 기억나니? 그리스 신화 영웅들의 동상이 서 있고 분수대가 있던 곳. 바로 잘츠부르크의 미라벨 궁전이란다. 영화에서는 렌즈의 장난으로 더 화려하고 넓어보여서 막상 와 봤으면 실망할 수도 있었겠지만 영화를 떠올리면 줄리 앤드류스와 아이들의 그 맑은 목소리들이 도레미송을 부르며 뛰어노는 모습이 그 위에 겹쳐지고, 그 순간 수십년을 별러 온 곳에 발을 디딘 듯한 환상에 젖게 되니 이것이 ‘아우라’(Aura)의 힘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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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와 트랩 대령이 결혼식을 올리던 대성당과 화면을 그득 채우며 울리던 종소리의 종들도 있었고 먼발치에서는 트랩 대령의 집으로 쓰인 저택도 고개를 내민다. (패키지 여행의 한계. 그곳에 못간 것이 지금도 안타깝다. ) 대령과 마리아가 신혼여행 간 사이 제3제국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해 버린 후 나찌 친위대들이 가로질러 행진하던 광장에 서 있으 면 그들의 군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고, 곳곳에 있는 산기슭의 푸른 언덕을 올려다보면 기타 든 마리아 앞에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부르는 노래 소리가 귓가에 잉잉거린다. 기념품 상점에서 꼭두각시 인형 앞에 서면 아이들과 마리아의 인형극 장면이 펼쳐지면서 연기를 내다가 콜록거리는 마리아가 스쳐 지나가지. 줄리 앤드류스는 이 <고독한 양치기> 노래를 제일 싫어했다던데. 요들송 부르기 어려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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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운드 오브 뮤직이 엄청나게 성공하고 사람들의 기억에 남은 이유는 뮤지컬이라는 미국적 경쾌한 종합예술과 역시 옛 정취가 물씬 묻어나는 도시의 분위기가 기가 막히게 어우러졌기 때문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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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건물들도 대개 기본 4백년, 거슬러 올라가면 7-8백년 된 건축물들이 흔하게 있고 그 분위기를 엄격히 지켜 온 흔적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단다. 이를테면 바로 이 맥도널드 간판이야. 잘즈부르크 시는 시의 미관을 해치는 대형 입간판을 규제해 왔는데다 특히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라고 자부했던 게트라이데 거리에서는 그 미적 기준을 벗어나는 어떠한 상징물도 허용하지 않았어. 그 결과 전 세계 어디 가나 그 황금빛 M자를 개선문처럼 세워 놓은 맥도널드도 바로크적(?) 간판에 만족해야 했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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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쯔부르크 시 길을 가다가 만나게 되는 또 하나의 진귀한 볼거리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단독주택(?)이 있더구나. 어느 가난한 청년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려 했는데 장인어른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어. 네가 집이 있냐 절이 있냐. 비를 피할 지붕 하나 없는 주제에 남의 애먼 딸 데려다가 무슨 고생을 시키려고!!! 청년은 절망하여 물러났다고 해. 그런데 그렇게 청년을 나쁜 사람이 아니었나 봐. 이 어깨가 늘어진 청년을 위하여 친구들과 친척들이 나선 거야. “좋아. 지붕만 있으면 된다는 거지?” 그들은 부족한 돈을 갹출하여 사진과 같은 ‘틈새 건물’을 창출해서 가난한 젊은이의 꿈을 이뤄졌다고 해. 가이드 아저씨의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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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독일어를 쓰긴 하지만 ‘우리는 오스트리아 사람’이라는 인식이 굳건한 것처럼, 독일 사람들과는 좀 차이가 있어요. 독일 사람들, 특히 북독일 사람들은 정말 에누리가 없습니다. 이게 십만원이다 그러면 십만원이에요. 내가 그만큼 가치 있게 만들었으니 당신도 그만큼 내놔라 이거죠. 그런데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십만원 어치 팔면 뭐 다른 것도 좀 끼워 팔아 줘요 좀 에누리가 있다고 할까 융통성이 있다고 할까요. 이런 가난한 청년 이야기도 오스트리아 사람들이니까 나올 수 있는 얘기 같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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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말, 위에서 말한 가난한 청년만큼은 아니지만 그리 넉넉하지 못했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도 처가살이를 오래 했던 한 가장이 드디어 처가를 탈출해서 독자적인 ‘마이홈’을 꾸몄어. 레오폴드라는 이름의 이 음악가는 새로 얻은 집에서 아들을 낳게 되는데 이름을 볼프강이라고 짓지. 대충 짐작하겠지? 그 짐작이 맞다. 인류사적 천재라 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였단다. 잘쯔부르크가 낳은 최고의 인물. 그러나 잘쯔부르크 대성당에서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하기도 했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잘쯔부르크를 떠나 비인에서 주로 생활했고 심지어 아버지 장례식 때에도 돌아오지 않았어. 바로 잘츠부르크의 실권자였던 콜로레도 대주교와의 불화 때문이었지. (또 갑갑한 고향보다 큰 물에서 놀아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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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이야기를 네게 따로 들려 줄 것은 없어. 당연히 네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거야. 그런데 질문 하나. 잘쯔부르크의 권력자는 왜 가톨릭 성직자인 ‘대주교’였을까? 모차르트 때 특별히 그런 것이었을까? 아니 잘쯔부르크는 근 천년 동안 ‘대주교의 땅’이었어. 무슨 말인지 다음 편지에 간단하게 설명하고 다음 목적지 슬로베니아의 브레드로 가도록 하지.

동유럽 여행기 2 by 산하

동유럽 발칸 2- 타임머신 타고 온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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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 이야기는 여정의 끝에 다시 프라하로 돌아올 때 하는 걸로 하자. 이 유서 깊은 도시 이야기는 너무 많고 길어서 간단하게 언급하고 지나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다. 체코 자체의 역사와 프라하 이야기는 나중에 돌아와서 그 시내를 돌아본 뒤에 다시 해 줄게. 프라하 공항에 내려서 냅다 남쪽으로 체스키 크룸로프로 내달리는 바람에 프라하 공항 이외에는 본 것이 없어 더더욱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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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는 대체적으로 평탄한 나라야. 멀리 야트막한 산줄기들이 보이긴 했지만 버스로 내처 달려가는 동안 주변은 그저 평지의 연속이었어. 푸르른 밀밭이 지겨워지다 보면 하얀 양귀비꽃밭이 감기는 눈을 크게 열어 주더구나. 그렇게 인적 드문 들판길을 달리던 버스가 한 소도시 시내로 진입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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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 아저씨가 도시의 이름을 체스키 부데요비체라고 알려 주더구나 부데요비치인지 뭔지 시차 적응 때문에 머리 부대끼는데 뭐 그런가보다 듣는데 가이드 아저씨의 다음 말이 또 한 번 눈을 번쩍 뜨게 했어. “여기가 버드와이저 본고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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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무척 좋아하는 맥주. 버드와이저는 체코가 원산지지만 아빠가 한국에서 먹는 버드와이저상표는 체코 브랜드가 아니야. 이곳에서 만드는 백주 맛에 반한 한 미국인이 맥주 만드는 기술을 배워 가지고선 미국에 건너가서 버드와이저라는 상표 등록을 헤 버린 거지. 독일 말로 읽으면 부드바이저라고 하고 이걸 체코 말로 읽으면 부데요비체가 되는 거거든. 이 부데요비체에서 맥주를 빚었던 건 12세기 때부터라고 하니 거의 ‘천 년의 전통’이 상표권 등록으로 태평양 건너가 버리게 생긴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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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사람들은 소송도 걸고 법정 투쟁도 불사하면서 버드와이저 상표 이름에 대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했지만 그리 큰 성과는 일구지 못했다고 해. 미국 버드와이저가 워낙 대기업이다보니 적당한 가격에 팔라는 유혹도 했지만 체코의 자존심에 가끼운 부드바이저를 어떻게 양보하냐! 하는 여론이 압도적이었다지. 결국 오늘날에도 미국이나 미국의 영향력이 큰 나라에서는 미국 맥주 버드와이저를 마시지만 유럽에서만 해도 체코산 ‘부드바이저’가 우세하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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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체코에는 유명한 맥주가 많아. 아빠가 가장 선호하는 맥주 필스너도 체코에서 만들어진다고 하지. 그런데 가이드 아저씨가 한창 입맛을 다시고 있는 아빠의 환상을 와장창 깨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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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에 4개 만원 해서 필스너도 팔고 뭐도 팔고 다 팔죠? 체코산 맥주도 한국에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만. 왜 그렇게 싼지 생각해 보셨어요? 물론 체코에서 맥주는 물보다 싸다고 할 정도로 싸요. 하지만 한국까지 가는 비용, 세금 다해서 그 가격이면 지나치게 싸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럼 한국에서 만든 거냐구요? 그건 아닙니다. 여기서 만들어도 수출용은 따로 만드는 거죠. 한국은 수출용을 국내용보다 더 좋게 만들어서 우리 부아가 터지는 경우가 많죠? 체코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 맥주는 좀 싸게 질 떨어지게 만들어 파는 거예요. 드셔 보시면 맛이 다르실 겁니다.” 음 페이스북 이모티콘에 나오는 화난 얼굴로 돌변하는 순간. 

그런데 이렇듯 맥주로 유명한 도시 부데요비체도 남쪽으로 25킬로미터 떨어진 한 도시에 비하면 현격하게 그 빛이 바래고 만다. 그 엄청난 위력의 도시가 바로 체스키 크룸로프야. 도시가 처음 세워진 건 11세기라는데 이후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번영을 누린 도시라는구나. 중요한 건 수백년 전 중세의 풍경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동화같은 도시라는 거지. 하다못해 우리가 점심을 먹은 식당조차 16세기에 지어진 건물이었으니 더 말할 것이 없겠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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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다란 성벽과 교회의 첨탑, 그리고 그 아래 오밀조밀 들어선 단정한 색깔의 지붕들과 그 사이로 실뿌리처럼 뻗은 골목길들에서는 금새라도 갑옷 입은 기사가 말을 달리고 가운데 머리를 밀어 버린 사제들이 부르는 그레고리안 찬트 소리가 들리고 허름한 농민들이 유럽식 낫과 곡괭이를 들고 농토로 향하며 체코 민요를 흥얼거릴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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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만 갖다 대면 엽서가 나온다는 얘기를 들으며 뭐 그렇겠지 쿨한 척 했던 아빠의 입이 다 벌어지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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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로 치면 고려 중기 쯤이었던 13세기에 이미 도시는 거의 완전한 형태를 갖췄다고 해. 도시를 휘감아 흐르는 볼타바 (볼타바라면 생소하겠지만 몰다우라고 하면 아! 하겠지?) 강을 따라 건설된 일종의 ‘하회마을’같은 크룸로프 초기의 비스코프 가문에서 로젠부르크 가문으로 넘어간 뒤 화려한 르네상스 양식의 도시 재건이 이뤄졌고 이후에도 여러 귀족들과 신성로마 제국 황제 등 여러 주인을 거치며 꾸준히 건설되고 확대되고 다듬어졌지. 오늘날 크룸로프에서 파는 명물 맥주 이름은 에겐부르크, 한때 영주님 가문의 이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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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돌아보는 데마다 볼거리고 발이 가는 곳마다 아름다운 풍광이지만 사람 사는 곳은 그 풍경만큼 아름답지는 못한 법이야. 통째로 타임머신을 타고 온 듯한 이 도시 곳곳에도 험악하고 슬픈 사연이 남아 있단다. 도시에 들어가서 성채로 가는 오르막을 타려면 볼타바 강에 놓인 한 목재 다리를 넘어야 해. 수백 년 전 목조 교각에 차가 거침없이 오가는 모습으로 아빠를 놀래킨 이 다리 이름은 ‘이발사의 다리’야. 왜 이발사의 다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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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이곳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 2세의 지배 하에 있었어. 루돌프 사슴의 코는 빨간 게 특징이었지만 이 신성로마제국을 오랫 동안 거머쥐어 온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전적 특징은 주걱턱이었어. 이 주걱턱은 우성 형질이라기보다는 ‘근친혼’의 산물이었어. 친척끼리 결혼하면서 혈통(?)은 물론 가문의 세력을 유지하려 했던 어이없는 전통의 결과였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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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가문의 칼 5세가 스페인 왕위를 차지하여 스페인에 갔을 때 그를 알현하던 스페인 농부는 이렇게 고함을 질렀다고 해. “스페인의 파리는 예의 같은 걸 모르오니 언제 폐하의 입에 들어갈지 모르나이다. 입을 다무소서.” 그러나 칼 5세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어, 주걱턱으로 인한 부정교합으로 입을 다물 수가 없었거든, 그런데 근친혼의 부작용은 이 주걱턱 이외에소 지적 장애 또는 정신질환으로 나타나기도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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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크룸로프를 한때 지배하던 루돌프 2세의 서자가 그랬어. 정신질환을 앓던 그는 어느 날 마을의 이발사의 딸을 보고 한눈에 반해 버려. 우리나라나 서양이나 높은 분들이 찍은 평민 여자들이 온전한 경우는 드물었지. 루돌프 2세의 서자 역시 전혀 이발사와 그 딸의 의사와 관계없이 이발사의 딸과 ‘결혼’했을 거야.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 한때 발광한 이 서자가 자기 아내를 참혹하게 살해한 거야. 거기까지만 해도 이발사 가족의 비극으로 끝났겠는데 이 미친 합스부르크는 자신이 아내를 죽였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어. 광증 속에 했던 행동을 기억하지 못한 거지. 그는 마을 사람들 중 누군가 아내를 죽였다고 믿고 범인이 나올 때까지 성 안 사람 한 명씩을 죽이겠다고 선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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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자 이발사는 자기 사위(?) 앞에 나아가 말했다고 해. “내가 죽였습니다. 영주님에게 간 후 나에게 못되게 굴기에 내가 죽였습니다.” 아마 이발사는 사랑하는 딸을 참혹하게 잃고 살아갈 의욕이 떨어졌던 게 아닐까. 자신도 죽어 딸을 따라가고 싶기도 한 마당에 마침 사위같지 않은 사위 영주가 저 난리를 치니 마을 사람들도 보호할 겸 죽음으로 나아갔던 게 아닐까? 이발사 역시 죽음을 당했고 마을 사람들은 성으로 통하는 다리에 ‘이발사의 다리’라는 이름을 붙여 수백년을 추모해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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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사의 다리에는 또 한 명의 추모의 대상이 있어. 요한 네포묵이라는 사제야. 18세기 초 보헤미아의 왕 벤체슬라우는 의처증이 심했어. 그런데 네포묵은 왕비가 즐겨 찾아 고해 성사를 하는 신부였지. 다른 사람은 제쳐 놓고 네포묵을 찾는 걸 주목하던 왕은 네포묵을 체포해서는 왕비의 고해성사 내용을 털어놓으라고 강요해. 하지만 고해성사의 비밀은 신부에게는 목숨 이상으로 소중한 것이고 네포묵은 단연코 고해성사 내용을 토로하지 않지. 화가 머리끝까지 난 보헤미아 왕은 그 혀를 뽑고 토막내어 볼타바 강에 던져 버렸다고 해. 오늘날도 네포묵은 고백하는 이들의 수호 성인으로 남아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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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권력을 쥔 사람들과 그 아래서 꿇어 엎드리던 사람들, 부당한 권세를 휘두르던 이들과 그에 맞서 용감하게 저항한 이들의 이야기는 이 아름다운 동화 마을에도 여지없이 숨어 있구나. 하기사 ‘동화같은’ 이라는 형용사 자체가 다양한 의미가 있긴 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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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크룸로프가 번영했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이 도시가 소금 무역의 중요한 요충지에 있다는 것이었어. 알프스 산록에서 캐낸 암염은 내륙 사람들에게는 황금보다 더 귀한 소금의 원천이었고 소금 상인들은 기나긴 소금길을 따라 체코, 독일 등 내륙 사람들에게 소금을 팔아 이익을 챙기게 되는데 산악지대에는 산적들이 진을 치고 소금 상인들을 털었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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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룸로프는 평지로 독일까지 이어지는 평야지대의 초입이었고, 험준한 산과 무서운 도둑들의 칼을 피한 상인들은 여기서 배를 채우고 맥주를 마시며 한 시름 푸는 곳이었고, 그래서 오랜 번영을 누렸다는 거야. 이 소금길의 출발지(?)가 있었어. 여기까지 오기 전 소금을 모아 놓고 가격을 매기고 각지로 분배했던 도시. 그게 바로 다음 목적지 잘쯔부르크다. 모차르트와 사운드 오브 뮤직의 도시. 하지만 이 도시의 이름 잘쯔(Salz)란 바로 소금(salt)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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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무역의 중심 루트에 자리잡고 있다 보니 크룸로프는 체코 사람들보다는 독일계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기도 해. 저렇게 단정하고 규칙적인 지붕은 슬라브족보다는 게르만 족 사람들의 특징이기도 하고 말이지. 그런데 오늘날 왕년에 이곳에 많던 독일 사람들은 오늘날 하나도 찾아볼 수 없어. 바로 잘츠부르크로 가는 도상에 있는 오스트리아의 린쯔라는 지역에서 태어난 한 걸물 탓이지. 그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 

동유럽 여행기 1 by 산하

동유럽 발칸 여행 1일 전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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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은 터키항공사 (Turkish Airline) 프론트에서 시작됐어. 외국계 항공사의 특수성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 모르나 티켓 발권 과정에서 작은 사고가 있었지. 일행 중 한 명과 동명이인이 있어서 항공사 측에서 발권에 착오를 일으켰던 거야. 원래 예정은 여유 있게 들어가서 비싸기로 유명한 인천공항 식당 밥맛도 보고, 엄마나 네게 줄 선물 사기 위한 면세점 쇼핑도 할 예정이었는데 다소 허겁지겁 비행기를 잡아탔지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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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는 어둠을 가르고 자정 가까이 돼서 떠올랐어. 방향은 서쪽. 터키 항공사를 타선지 묘하게 비행기가 가는 방향이 터키의 조상이라고 하는 돌궐, 즉 투르크 족이 서쪽으로 서쪽으로 가서 결국 오늘의 1차 목적지 이스탄불까지 이르렀다는 역사적 사실과 겹쳐지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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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터키의 자국 역사책은 고구려와도 밀접한 관계였고, 수나라나 당나라와 치열하게 싸웠던 북방의 유목민족 돌궐이 동돌궐과 서돌궐로 나뉘는 데에서 시작한다고 해. 서돌궐은 서쪽으로 “Go west" 노래를 부르듯서쪽으로 몰려 갔고 십자군 전쟁의 불씨를 제공한 셀주크 투르크나 20세기까지 존속한 오스만 투르크 등 역사에 남는 제국을 세웠지. 돌궐은 중국식 한자음이고 투르크가 그들 스스로를 일컫는 이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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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은 알다시피 동로마 천년제국의 수도였지.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리웠던. 오스만 투르크는 오늘날 터키가 위치한 소아시아 지역을 석권하고 발칸 반도까지 진출해 동로마 제국을 그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외에는 거의 힘을 쓰지 못하는 지경으로 만들어 버렸고 1453년 메메드2세라는 술탄은 마지막 투혼을 불사르던 동로마 제국 군대를 무찌르고 콘스탄티노플 성을 함락시켜 동로마 제국의 상징이던 대성당은 모스크로 바뀌었고 오스만 투르크는 그곳을 수도로 삼아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까지 망라한 대제국을 호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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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런지 기내식 갖다 주는 스튜어드의 완연한 백인 얼굴에 은근히 동양적 느김이 배어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터키 사람들이 우리를 형제국이라고 생각한다는 등등은 오버 같지만 고구려와의 관계로부터 한국 전쟁 참전에 이르기까지 뭔가 인연이 많은 나라 같긴 해. 다행히도(?) 이번 여행에서는 이스탄불은 그저 환승지일 뿐이야. 이곳의 그 많은 볼거리들은 나중에 우리 딸이랑 엄마랑 같이 와서 보라는 신의 계시가 아닌가 한다. 나중에 꼭 터키 여행 하자꾸나. 아빠도 아직 터키를 못가 봤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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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투르크 항공사 비행기를 타고 유럽 땅을 날기 시작한다. 또 비행기의 항로를 보면서 피식 웃었던 게 그 경로가 과거 오스만 투르크, 즉 터키 사람들이 유럽으로 쳐들어가던 그 경로와 비슷하기 때문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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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오빠와 아빠가 구경하고 네게 소개할 발칸반도 전역은 수백년 간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았거든. 지도상에 나타나는 루마니아, 알바니아, 보스니아, 세르비아, 그리스 등 열 개가 넘는 오늘날의 유럽 국가들이 오스만 투르크의 초승달 깃발 아래 덮여 있었던 거니까. 투르크 사람들은 심지어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인까지도 몇 번에 걸쳐 포위 공격을 퍼붓기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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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가끔 먹는 크라상 빵 모양을 잘 봐라. 초승달 모양이지? 크라상은 프랑스 말로 초승딜이라는 뜻이기도 해. 1636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인이 투르크 군대에 포위됐단다, 그때 오스트리아의 한 제빵기술자가 지하 창고에 있는 밀가루를 꺼내러 갔는데 투르크 군대가 땅굴을 파고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이를 아군에게 알려 투르크 군을 무찔렀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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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제빵 기술자는 투르크를 상징하는 초승달 모양의 빵을 만들었고 유럽 사람들은 그걸 씹어먹으면서 투르크에 대한 승리를 기념했다고 해 그게 크라상 빵의 유래지. 투르크가 얼마나 유럽 사람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는지 알겠지? 모차르트의 유명한 <터키 행진곡>도 터키군의 정예부대 예니체리 부대의 행진곡을 모티브로 했다고 하니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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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이스탄불까지, 다시 이스탄불에서 체코 프라하까지 14시간 비행 끝에 프라하에 도착했다. 버스 안에서 쓰고 있는데 프라하에서 오늘 시작하는 첫 여정은 해 줄 이야기가 무척 많구나. 노트북 배터리도 다 돼 가니 다시 또 올려 줄게

소년 80년대를 가로지르다 3 - 대망 목전의 구차함 by 산하

#소년_80년대를_가로지르다 3 

대망의 80년대 목전의 구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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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이 밝아올 즈음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드라마가 대단한 인기였다. ‘고교얄개’로 한때를 풍미했던 이승현은 요즘으로 치면 원빈이나 장동건급의 대스타였다. 임예진 또는 강주희와 콤비를 이뤄 갖가지 드라마, 영화에 등장하여 나도 언젠가 검은 교복에 교모를 쓰고 거수 경례하고 다니는 중고등학생이 될 테야 하는 요상한 꿈을 꾸게 만들었던 이승현은 1979년 소년 홍길동으로 대박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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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는 멘트를 날려 류승환 감독이 삼가 접수하여 영화 속 명대사로 써먹게 만들었던 강수연이나 그와 즐겨 콤비를 이뤘던 안정훈도 한창 커 가고 있었다. 나중에 둘이 크면 결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만큼 잘 어울렸던 그들은 온갖 CF와 잡지 모델을 섭렵하며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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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나도 그들의 팬이었고 일면식은커녕 먼발치에서 본 적도 없는 주제에 웬지 둘의 소식이 들리면 옛 친구 소식인양 귀가 쫑긋해지곤 했었다. 강수연이야 일찌감치 대스타 반열에 들어섰지만 안정훈은 아역 스타 때의 광휘에 비하면 좀 상대적으로 미진한 편이라 홀로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무려 20년 뒤 드라마 <태조 왕건>에 안정훈 자신이 연기지도를 했던 최수종 (왕건)과 까마득한 후배 염정아(장화왕후)의 아들 역을 맡았을 때 “안정훈은 너무 동안이라 문제야! 그렇다고 저렇게 캐스팅을 하면 되나?”하면서 비분강개하여 회사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도 만들었던 경험은 1980년 한반도 동남쪽 끄트머리에서 ‘바람돌이 소년 장영실’에 열광하던 한 동심의 잔재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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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벽두에는 새로운 드라마와 스타들이 등장했다. TBC에서 한 <서울은 내것이다>라는 드라마였다. 지금은 뭘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무척 개성있는 아역 배우였던 김주호가 주인공이었다. 일하러 서울 간 뒤 연락이 끊긴 엄마 찾아 상경한 ‘통통뼈’ 뚝배가 설렁탕집 안성집에 머물면서 겪게 되는 스토리가 흥미로웠다. 그때만 해도 머리숱이 꽤 많았던 이덕화가 뚝배를 따뜻하게 보듬는 체육관 관장으로 나왔고, 안성집 사장님이자 나중에 김주호를 마음으로 끌어안게 되는 배역은 김형자가 맡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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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는 장면 하는 인근 세차장에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쫓겨난 뚝배를 대신해 찾아간 이덕화가 분통을 터뜨리는 장면. “이래서 이 세차장이 악명이 높았군요. 애들 월급 떼먹고!” 드라마 속의 뚝배처럼 아무 준비도 없이 몸뚱이 하나로 올라와 서울은 내것이다 헛
고함 지르던 청춘들도그렇게 그들의 희망을 떼먹혀 나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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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즈음 나의 또 주된 관심은 새소년, 소년중앙, 어깨동무의 어린이 월간지 3총사였다. 여동생의 미모 덕에 새소년 표지 모델이 되어 본 이후 (진짜다. 증거를 사진으로 남긴다. ) 새소년을 정기구독하고 있었지만 재미있는 만화는 대개 <소년중앙>에 집중돼 있었기 때문에 소년중앙도 빠짐없이 사 날랐고 관심있는 기사가 뜨면 <어깨동무>도 사 달라고 졸라 어머니한테 벼락을 맞은 것도 여러 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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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1월이 오자 세 잡지는 한목소리로 ‘신년특대호’를 냈고 다양각색의 기획 기사를 냈다. 그 중 한 잡지의 1980년 1월 ‘신년특대호’에는 여러 기획들 가운데에는 여러 아역 스타들이 1980년, 즉 일, 구, 팔, 영을 운으로 하는 사행시를 지어 소개한 란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절대로 그들이 지은 게 아니라 해당 잡지 편집부 직원들이 머리를 짜낸 것들이겠지만 그래도 성실한 팬(?)으로서 그들의 사행시를 꼼꼼이 훑어 봤다. 물론 지금에 와서야 까마득한 망각의 흑연 속에 들어갔지만 딱 하나는 지금도 기억의 파울 선상에서 가물거리고 있어서 옮겨 본다. 물론 누구의 사행시였는지는 기억 안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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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일천구백팔십년대에는 구. 구차하게 살지 말고 팔. 팔팔하게 날아올라. 영.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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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를 맞은 사람들의 희망은 대부분 그랬을 것이다. 무려 18년 동안 나라를 지배했고 특히 말년 7년 동안은 세계에서 유례가 드문 철권통치로 숱한 사람들을 죽이고 상처 주고 입을 막고 콧구멍에 고춧가루 물을 들이부었던 대통령이 죽었으니 적어도 대통령 험담만 해도 자칫하면 사형 선고가 어른거리던 나라로부터는 벗어날 수 있으리라 여겼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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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가 태어나서 대학생이 될 때까지의 세월 동안 교무실 중앙에 높다랗게 걸려 았는초상화의 주인이 단 한 사람인 나라는 이제 없어지리라 기대해 마지 않았으리라. 유신은 살아 있었으나 유신의 주인은 이미 장례 치러 동작동에 묻었고 계엄은 여전히 살벌했으나 그 얼음 아래에서는 물 흐르는 소리가 치올라오고 있었다. 바야흐로 ‘구차한’ 기억들을 저버리고 ‘팔팔하게’ 날아오를 때가 아닐까. 그러나 구차함의 관성은 여전히 강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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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즈음 한국은 제2차 오일 쇼크에 시달리고 있었다. <소년중앙> 같은 어린이 잡지에도 심층 취재(?) 기사가 실리기도 했던 이란의 털복숭이 영감 야아툴라 호메이니는 국딩 사이에도 유명했거니와 그가 이끈 이란 혁명과 이란 이라크 전쟁 등으로 인해 산유량이 떨어지면서 기름값은 하늘이 낮다 하고 치솟았고 에너지 수급 체계가 석유 중심으로 전환돼 있던 한국 경제는 엄청난 손상을 입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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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툭하면 자기비하처럼 사용되는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의 관용어는 그 무렵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 2차 오일 쇼크가 대한민국을 휩쓸던 풍경 한 자락은 이랬다. “종이를 아끼기 위해 시험 문제지 대신 교사가 말로 문제를 내는가 하면 잊혀졌던 물레방아가 다시 등장했고 도시락을 싸들고 출근하는 직장인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기름이 들지 않는 돛배와 풍차발전이 각광을 받고 있다. 법규 외반차량과 경범죄 피의자도 줄어 경찰서 보호실이 비었다.” (동아일보, 1979,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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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는 대충 이해가 가는데 오일 쇼크에 즉심 피의자는 왜 줄어들었는가. 이유는 “술 마시는 사람들이 줄고, 술 마시는 시간이 짧아졌기 때문”이었다. 유흥가는 일찌감치 문을 닫았고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은 전설적인 불경기를 기록했다. 설악산이며 내장산이며 전국 관광지도 텅텅 비었고 사람들은 바짝 움츠려 있었고 그 지갑들은 사막처럼 말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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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신정 연휴, 동네에서 좀도둑 하나가 잡혔다. 대낮에 빈집에 들어와서 물건을 훔친 것까진 좋았는데 막 대문을 나가다가 운동하고 돌아온 체육관 관장님 이하 떡대 좋은 청년들과 마주친 것이 불운이었다. 좀도둑은 조리돌림 수준으로 두들겨 맞았다. 온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그때껏 최소한 한 번씩은 겪었던 도둑의 폐해를 토로하며 그 응징 모습을 구경했는데 도둑은 두들겨 맞으면서 하염없이 울었다. 그러면서도 연신 두 손을 모으면서 입을 열었던 것은 이 한 마디를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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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감옥 가면 아이들 굶어 죽습니더. 제발 경찰에만 넘기지 마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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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걱정하면서 이런 짓 하냐고 또 주먹이 날아갔지만 그는 같은 말만 반복했다. 알고 보니 그는 바로 윗동네 사람으로 전과도 없고 세 아이 건사하고 잘 살던 가장이었다. 하지만 오일 쇼크를 맞아 직장이 도산했고 그 뒤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아내는 도망갔고 혼자서 아금바금 살아내던 중 결국 남의 집 담을 넘고 만 것이었다. 체육관 관장님이 후배들과 함께 사내를 끌고 그 집까지 찾아가서 확인한 결과였으니 틀림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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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 전화까지는 했는데 나중에 오지 마라 캤어요. 아이들이 불쌍해가. 글마한테 굶어 죽어도 도둑질 같은 건 하지 마라 하고 나왔지요. 근데 사흘 굶어 도둑질 안하는 넘 어디 있겠능교.” 관장님이 세탁소 통장 아저씨한테 한 얘기였다.

학교 복도 곳곳에 나붙은 ‘민족 웅비의 현장 화보’에 따르면 이제 대한민국은 ‘중진국의 문턱’에 들어섰고 자동차도 만들고 배도 수출하고 용광로에서 쇳물을 우렁차게 흘리고 있었으며 ‘보릿고개’쯤은 넘어섰노라 자신했고 사진 속 공장 근로자들은 둘러앉아 노래를 배우며 해사하게 웃고 있었지만 세상은 아직도 많이 구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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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만 되면 분배된 채변 봉투에 똥을 담아내고 기생충이 발견되면 나눠 준 구충약을 배 고픈 형제가 밥 대신 쓸어먹었다가 큰일날 뻔한 사건도 있었고, 사고로 부모가 동시에 세상을 떠났던 한 친구가 당최 오갈 데가 없어 담임 선생님이 한동안 데리고 살았어야 할 정도로, 사흘 굶지 못해 남의 집 담을 넘다가 잡혀설랑 마음껏 때리되 경찰서에만 알리지 말아 달라고 울부짖던 좀도둑의 늘어진 어깨처럼 세상은 아직 암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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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탈출을 위해 “우리도 한 번 잘 살아 보세”를 부르짖으며 앞만 보고 달려오고 잘 살아 보자는 구호 아래 세계에서도 독기가 으뜸가는 독재를 감당해야 했던 한국 사람들은 오일 쇼크로 인한 경제난에 다리를 격하게 접질린 상황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즈음에 18년 1인 정권이 끝났고, 새로운 10년, 1980년대가 시작됐다.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기대한 사람은 많았다. 한 시대의 종말은 그 원인과 배경과 영향을 뛰어넘어 희망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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