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은 지금 참을 때가 아니다

 

 인내란 참을 수 있는 것을 참는 것이 아니라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것이라 했던가.  참을 인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했던가.  인내는 쓰나 그 결과는 달다고 했던가.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자보다 낫다고 했던가.  그럴 지도 모른다. 아니  지당하신 말씀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MBC에서 적을 두고 일하는 자칭 노동자라면, 그가 PD이든 카메라 감독이든, 일반직 사원이든 인내에 대한 모든 격언을 잠시 지하창고에 가두고 철문을 내려야 한다.  



 참지 말아야 할 것을 참는 것은 인내가 아니라 굴욕일 뿐이다.  자신에게 칼을 휘두르는 자 앞에서 참을 인 자를 되뇌는 것은 지혜가 아닌 아둔함에 지나지 않으며, 달콤한 결과만을 바라고 쓰디쓴 굴욕을 참는 자는 비겁한 자이며, 노해야 할 때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자는 커녕, 시궁쥐만도 못한 미물에 불과하리라.  



 MBC 노동자 여러분.  “우주에서 제일 좋은 직장”의 정규직 여러분.   “대기업보다는 훨씬 많은” 처우를 받으며,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력한 노조의 보호 안에서 빼어난 복리 후생을 누리며 구조조정의 위협으로부터도 상대적으로 자유로왔던 MBC 노동자 여러분.  이제 여러분이 시샘 받으며 누려왔고, 부러움을 사며 일궈온 여러분의 권리가 여러분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입증해 보일 때다.   지금이 아니라면 대체 언제 여러분의 가치를 입증해 보일 것인가?  여러분의 수장의 의사가 무뢰한들에 의해 내동댕이쳐지고 그들의 입맛에 맞는 벙거지들을 여러분의 상전으로 들어앉히려는 지금이 아니고서야 도시 어느 제에 여러분의 트레이드 마크인 ‘공영방송’의 기치를 세울 수 있으랴. 



  상대가 권력이든 자본이든 나름 짖는 법을 배웠다 자부하던 개들이 꼬리를 사타구니에 감추고 헥헥거리는 꼬락서니는 이미 KBS에서 진물나게 보았다.  낙하산 사장을 물리치겠다고 결기 드높이던 것들이 되레 그 낙하산을 이불 삼아 쌔근쌔근 잠을 청하는 자들의 몰골도 이제는 쳐다보기도 귀찮다.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는 결국 제 밥그릇을 튼튼히 할 자유였고,  함께 공(共)자를 쓰는 공영방송은 결국 공염불에 불과하였으며, 그래 놓고도 자기네 철밥통은 시청료 인상이라는 초합금으로 보장해 보겠다는 파렴치가 넘친다.   MBC 여러분.  여러분도 그 전철을 밟을 것인가.  여러분이야 시청료를 받지 않으니 국으로 가만히 있어도 KBS보다는 낫겠는가. 



 MBC 정규직 노동자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껏 따먹어 온 과실은 여러분의 땀방울만으로 영근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자랑스레 내미는 작품 목록들은 MBC 정규직들만의 힘으로 뚝딱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정권과 자본의 칼날으로부터 여러분의 목덜미를 보호하는 갑옷은 여러분, MBC 노동조합원의 손으로만 짠 것이 아니다.  여러분과 같은 노동을 하였지만, 결코 같을 수 없는 댓가에 만족해야 했던 사람들, 여러분의 임금 보전을 위해 피눈물나는 제작비 삭감을 감수해야 했던 이들, 여러분이 수상 트로피 쥐고 소감 발표할 때 그 시상식에 참여한 연예인들에게 인터뷰 하나 따고자 손금이 닳는 군상들의 노력과 경험과 성원도 엄연히 그 재료로 사용되었다. 


 그 과실과 성과와 갑옷을 독점 내지 과점해 온 MBC 여러분.  그래도 당신들을 인정한다.  하루 아침에 나무로 깎은 목각인형이 되어 버린 KBS 따위와는 질적으로 다를 수 있다고 여긴다.  우리 역시 당신들이 목 놓아 지키는 공영의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이고, 적어도 여러분은 그 가치의 빛을 더한 적이 있었기, 아니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이름값을 하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며, 얄밉고 야속해도 그 정을 거둘 수 없는 존재임을 여러분이 증명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완성된 퍼즐을 위해서는 아직 한 조각의 퍼즐이 남아  있다. 거사적으로 하나 되어 들어 올렸던 공영방송의 깃발 속에 당신들의 이기주의를 감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그것이다.



 이제 퍼즐을 완성할 때다.  조각에 싸인 의문들을 털어버리고 자신 있게 공영방송의 퍼즐판을 깔끔하게 결말지어라.  이럴 때 나서라고, 이런 때 주먹을 휘두르려고 내가 지금까지 체급을 키워 왔다고 선언하라.  지금이 80년대 전두환 소장이 설칠 때도 아닌데 언론을 자기 입맛대로 지지고 볶고 끓이고 튀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저 시대착오자들에게 두들겨 맞을지언정 이 정도는 거뜬히 버틸 맷집을 키우기 위해 우리가 공영방송의 소중함을 논했노라고 만인에게 외쳐라.  처음엔 목청 높이다가 뒷구멍으로 뱀처럼 배 땅에 기고 기어다녔던 KBS의 잘난 노조 꼴을 따르려면 그냥 초저녁에 백기 들고 지금보다 더 월등한 호의호식이나 추구하라. 괜히 사람들 헛갈리게 만들지 말고.



 MBC랑은 일점 인연도 없고, 아는 사람도 몇 안되는 판에 이렇게 열 내는 것이 이상한가?  하지만 나는 적어도 MBC 노조원이라면, MBC라는 테두리 내에서 생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의 나보다 백 배 천 배는 열통을 터뜨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정권의 하수인들이 몰려와서 제 맘대로 조직을 닦고 조이고 기름치며 갈아치고 후려치는 이 아사리판에서 자존심이 허물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철인(鐵人)일까 철인(哲人)일까 아니면 천치일까.   여러분의 뉴스데스크에 “내 귀에 ‘공정방송’(또는 MBC개혁)이 들어 있습니다“라고 외치는 천둥벌거숭이가 뛰어들어 앵커의 목을 조르고 있다.  생방송 중이다.    참을 인자 셋을 되뇔 것인가.  노하기를 더디할 것인가.   달콤한 결과를 꿈꾸며 참을 것인가.  그래도 참아야 하느니라 참선에 들 것인가.  당신들은 지금 참을 때가 아니다.

       

by 산하 | 2010/02/08 18:46 | 썸데이서울 - 이런저런 얘기들 | 트랙백(1) | 덧글(25)

관심의 빈익빈부익부

<PD수첩>에 대한 무죄 판결 소식에 나도 모르게 환호를 내질렀던 것도 벌써 보름이 넘었다.  애초에 기소하기 성립하기 어렵다고 보았던 사안을 검사를 바꿔 가며 기어코 기소하고, 개인의 이메일을 뒤져서 그 내밀한 대화 속에서 범행 의도를 끄집어냈던 장하디 장한 대한민국 검찰에게는 안 된 결과이지만, 그리고 5월 8일이 되려면 아직 멀었건만 밑도 끝도 없이 앞뒤 분간도 없이 나타나시는 ‘어버이연합’ 분들의 노기야 밤하늘의 은하수를 가르겠지만, 대략 두 해 동안 가장 유쾌 통쾌 상쾌한 순간 가운데 하나였음은 부인할 수 없겠다.


  무죄 판결은 찬반을 망라하여 온 나라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며칠 동안 뉴스의 중심은 단연 <PD수첩>이었다. 잘된 판결이라는 여론이 60%에 육박했지만 입만 열면 법치를 부르짖던 분들은 신영철 대법관을 의연히 지켜내던 왕년의 소신을 싹 뒤집고 정치적 성향의 판사는 시민운동이나 하라는 등의 막말을 퍼부어 댔다. 어찌 되었든,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판결에 망연한 검찰이나 그에 맞서던 제작진이나 고심 끝에 무죄 판결을 내린 판사나 힘겹기는 했어도 외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 일생에 이런 초미의 관심의 대상이 될 일이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세상 이치가 공평한 것만은 아니어서 재물이든, 연애든 되는 사람은 척척 손에 붙고 불처럼 일어나지만 안 되는 집안은 하는 일마다 자빠지고 쪽박만 깨뜨리게 되는데 이걸 학문적 용어로는 ‘빈익빈부익부’라고 부른다.  <PD수첩> 무죄 판결의 후폭풍을 지켜보면서 나는 ‘관심’의 영역에도 이 현상이 적용된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뜨겁다 못해 화상을 입을 듯한 관심의 세례를 받고 있는 <PD수첩>에 반해, 목이 찢어져라 외치고 몸을 던져서 호소해도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무관심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숱하였기 때문이다.


 벌써 7년이 지났다.  2003년 한 노동조합의 위원장이 무려 129일 동안 수십 미터 상공의 크레인에 올라가 농성을 벌이던 끝에 목을 매어 세상을 떠난 지도. 그 해는 매미라는 이름의 전설적인 태풍이 부산 앞바다를 휩쓸고 지나간 해였다. 15층 높이의 선상 호텔이 맥없이 쓰러지던 그 무지막지한 태풍에 휘말려 180도로 휘청휘청 돌아가는 크레인 위에서 한진중공업 노동조합 김주익 위원장은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를 비롯한 노조 간부들에게는 7억 4천만 원의 가압류가 걸려 있었고, 김 위원장이 소유했던 5천만 원짜리 낡은 연립주택에까지도 법원은 가압류를 인정했다.  당시 해당기업의 21년 근속 노동자의 기본급은 105만원이었다.

 
<PD수첩> 제작진은 비록 이메일까지 뒤짐을 당하고 결혼을 앞두고 수갑을 차는 형극을 치르기는 했으나 무죄 판결을 받아 웃을 수 있었고 만인의 격려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김주익 위원장은 자기 일 찾아 종종걸음치는 수백의 까만 점들을 향해 내 말 좀 들어달라고 수십 미터 상공에서 똥오줌 받아내 가며 호소했지만 결국 시체가 되어서야 크레인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관심은 “우주에서 제일 좋은 직장”으로 이름 높은 MBC의 노조원이 받은 그것의 천분지 일 만분지 일도 되지 못했다.  


괜히 옛날 일을 끌어와서 까탈을 잡으려는 것이 아니다. <PD수첩>이 무죄를 선고받기 1주일 전, 이미 고인이 된 김주익 위원장의 동료였으며 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인 김진숙씨가 단식을 시작했다.  고 김주익 위원장의 장례식에서 “1970년에 죽은 전태일의 유서와 세기를 건너 뛴 2003년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를 비통하게 읊조렸던 김진숙씨는 크레인을 오르지 않고 그냥 밥을 끊었다.  지난 7년 동안 조선업의 호황 속에 이익을 챙길 대로 챙겼으면서도 이제 형편이 안 좋으니 자를 사람은 잘라야 하겠다는 회사에 맞서서 할 수 있는 일은 ‘단식’ 뿐이라고, 죄송하다고 했다. 이것 밖에 할 것이 없다고.  혹시 들어 본 적은 있으셨는지 모르겠다.  2월 5일 그녀는 24일만의 단식을 끝냈다.  


그녀는 굶고 있는데 당신은 무얼 하고 있는가 하고 비분강개할 의사는 전혀 없다. 더더구나나 당신은 왜 무관심한가 힐난할 자격은 정말로 터럭 위의 티끌만큼도 없다. 하지만 이 팍팍한 세상에서 감사히 월급 받으며 살아가고, 구조조정 말만 나오면 온몸에 소름이 돋는 모든 사람에게 결코 그녀의 단식이 무심할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지 않을까.   언론의 자유도 중요하고 민주대연합도 요긴하긴 한데, 언론의 자유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며 민주대연합은 누구를위한 것인지 관심을 나눌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적어도 관심의 영역에서는 ‘빈익빈부익부’의 사슬을 벗어나야 옳지 않을까.


<PD수첩>제작진이 받은 무죄판결의 소중함만큼이나, 나에게는 역시 고인이 된 MBC 여성 노조원이 보여 준 애틋하지만 강렬한 언어 한 자락이 산화되지 않는 금빛으로, 바래지 않는 옥빛으로 남아 있다.  고 정은임 아나운서가 2003년 10월 21일 새벽 3시의 영화음악실에서 남겼던 오프닝 멘트가 그것이다.  

    새벽 세 시,
    고공 크레인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1백여 일을 고공 크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해 봅니다.
    올 가을에는 진짜 고독한 사람들은
    쉽게 외롭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 계시겠죠?
    마치 고공 크레인 위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
    이 세상에 겨우 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난 하루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
    저 FM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나 자신에게도 이른다.  먹고 살기 바쁘고, 당장 내 비정규직 후배한테 우리한테 해 준 거 뭐가 있냐고 욕먹는 무능한 직딩이라도, 태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마르더라도 내 먹을 거, 내 새끼 입힐 거 가르칠 게 우선으로 보이는 일상이라도 가끔은 정말로 외로운 사람들을 위해 응원해 보자.  그래서 내 목소리 들리냐고 나지막하게라도 물어 보자.      

by 산하 | 2010/02/06 12:52 | 썸데이서울 - 이런저런 얘기들 | 트랙백 | 핑백(1) | 덧글(12)

꺼벙이와 꺼실이

내가 다녔던 중학교 (고등학교였는지도 모르겠다.  이거 청년성 치매인가)에는 미술 선생님이 두 분 계셨다.    한 분은 남자, 한 분은 여자 선생님이었는데 그 두분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두 분은 학교에서 가장 만만한 선생님으로 수위를 다투셨다.  왁자지껄 떠들다가도 선생님이 슥 훑고 지나가면 예의상으로라도 입을 닫는 것이 암암리에 확립되어 있던 관례였지만 그 두 분께는 그 관례가 적용되지 않았다.   "샘 온다 샘....."이라는 말에 허둥대다가 "꺼벙이다 꺼벙이." 라는 정찰 보고가 들어오면 더 큰 목소리로 웃고 떠들어 제꼈던 것이다. 꺼벙이는 남자 선생님의 별명이었다.  여자 선생님의 별명은? 당연히 꺼실이였다.  

 

 그놈의 장학사가 방문한다고 해서 시간에 없는 청소를 하느라 유리창에 달라붙어 있는데 갑자기 앙칼진 목소리가 창문을 뒤흔들었다.   "어느 놈이야 나와~~~~~"  아주 짧은 순간 아이들은 얼어붙었다.  수학 선생님인가 영어 선생님이가 아니 대체 누가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러나 이들의 호기심 어린 눈망울이 한곳을 향하여 앙칼진 목소리의 주인공을 파악했을 때 분위기는 우수날 대동강 풀리듯 삽시간에 녹아 버리고 말았다.  나도 그랬다. 피식 웃으면서 아주 낮게 뇌까렸던 것이다.  "난 또 누구라고 꺼실이 아이가." 



 꺼실이 선생님의 분노의 이유는 별 다른 게 못되었다.  복도를 지나가는데 창문에 매달려 있던 한 녀석이 그 뒤통수에 대고 "꺼실아~~~"를 정답게 불렀던 것이다.  본인의 별명에 대해 무한한 불만을 갖고 계시던 꺼실이 선생님은 그 즉시 뒤돌아서서 누구냐를 절규했지만 뉘라서 그 호명에 응할 것인가.   아무리 독기를 세워 불러도 아이들은 흥얼거리면서 유리창을 닦았고 귀마개를 한 척 선생님의 채근을 무시했다.   


 "니가 이 반 반장이쟤?  똑바로 대라 어느 놈이고?"

 꺼실이 선생님은 단단히 화가 난 듯 했다.  기어코 자신을 꺼실이라 부른 넘을 골라내어 교무실로 끌고 갈 기세였다.   아마도 다른 선생님이었다면 반장부터 얼굴이 파래졌을 것이다.  물론 반장의 얼굴도 파래지기는 했었다.  웃음을 참느라 말이다.  반장은 가까스로 웃음을 물리치면서 답했다.  "지는 못들었는데예." 

 
 그러나 아이들은 반장만큼 인내심이 좋지 못했고 폭소를 터뜨렸다. 그리고 그 폭소 뒤에 폭포와 같은 이죽거림이 따라붙었다. 샘이 잘 못들은 깁니더.   아니 누가 샘보고 꺼실이라 캅니꺼.  맞아죽을라고.......   어 샘이 꺼실이라예?  샘 별명 꺼실이 아인데...... 샘이 꺼실이였습니꺼?  내 몰랐네.......   꺼실이 샘의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은 이제 하얀 분노로 덧칠되고 있었다. 입술이 부르르 떨렸고 부르쥔 주먹은 금새라도 로켓 펀치로 날아들 것만 같았다.   아이들은 분위기가 묘하게 되어 가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꺼실이 앞에서 장난기를 거둘 정도로 겁을 먹지는 않았다.  마침내 꺼실이 선생님의 벼락같은 호통이 터져 나왔다.

 "2학년 4반 너희들 다 꼼짝 말고 있어.  오늘 죽을 줄 알아." 

 꺼실이 선생님은 종종걸음으로 교무실 쪽 계단을 내려가셨다.   어 이건 아니었다. 원래 시나리오는 꺼실이답게 처음에는 방방 뜨다가  "정말 꺼실이라 안했지?" 정도로 물어 주시고 "네~~~~~" 대답해 드리면 끝나는 것이었다.  어 그런데 교무실로???   으악 잘못하면 단체로 엉덩이에 불이 나거나 오리걸음으로 알 좀 배길 일이었다.  갑자기 눈앞이 시험 빵점 맞은 만화 속 꺼벙이처럼 암담해졌다.   이 일을 우짜면 좋노.  처음 꺼실이라 부른 녀석은 곧 적발되었고, 역적으로 몰렸다.   "니는 선생보고 꺼실이가 뭐고 대놓고."  "아 싸가지없는 쉐이..... 니 땜에 다 죽었다 아이가."  

 

 1분 후 쿵쾅거리는 소리와 함께 꺼실이가 기세등등한 남자 선생님 한 분을 모시고 되돌아왔다.  죽었다고 복창하고 있던 우리는 찬물을 끼얹은 듯 불안한 침묵을 지키고 있었는데 교무실 쪽 동정을 살피던 녀석의 한 마디가 다시 우리를 해방시켰다.  "야 꺼실이가 꺼벙이 데리고 온다."  뭐이? 학생주임 독사도 아니고, 하다못해 팔힘 좋기로 유명한 학다리도 아니고 꺼벙이라고???   동료 미술 선생님을 놀린 악동들에게 분기탱천하여 달려오고 있는 건 아...... 꺼실이 선생님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동원한 선생님은...... 아..... 꺼벙이였던 것이다. 


 
 아무리 애들이 떠들고 설쳐도 "조용히 좀 해라"고 말할 뿐이고, 단 한 번도 몽둥이를 들어 본 적이 없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아이들을 때리려다가 부들부들 떨고 말았다는 심약한 교사.  아이들에게 카리스마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꺼벙이 선생님이 꺼실이 선생님의 봉욕을 응징하고자 달려온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아이들은 또 한 번 왁자지껄 웃으며 능글능글 꺼벙이와 꺼실이의 분노를 피해 나갔다.  


 "샘 진짜로 아닌데예.   아무도 안그랬십니더." 
 "샘이 진짜로 들었다 카는데 이노무 쉐이들." 
 "미치고 팔짝 뛰겠습니더. 하나님에 맹세코 아무도 안그랬십니더. 잘 못들은 깁니더." 
 "니 교회 나가나?" 
 "지난 주부터 나갑니더.  인자 열심히 나갈 끼라예." 
 "참말로 아무도 안그랬나? " 
 "와 샘... 믿어 주이소.  누가 샘보고 꺼실이라 캅니꺼. " 
 "선생보고 꺼벙이 꺼실이라 카면 안된다."
 "푸하하하하하 예~~~~~~~~"


 결국 그 흔한 엎드려 뻗쳐 한 번 시키지 않고, 오른속에 나름 폼나게 들고 있던 몽둥이를 제대로 휘둘러 보지도 않고 꺼벙이 선생님은 아직 분이 덜 풀린 꺼실이 선생님을 모시고 사라졌고 우리는 통쾌하게 웃어 댔었다.  꺼실이 진짜 웃긴다.  데리고 온 선생이 하필 꺼벙이란 말이냐.......  하지만 교무실 청소하던 녀석들은 다른 얘기를 했다.   꺼실이 선생님이 교무실에 갔을 때 힉생 주임 이하 매 타작에 능하고 애들 고통 주는 정도는 엿가락 꼬듯 할만한 선생님들이 즐비하게 계셨다. 꺼실이 선생님이 자신이 당한 일을 호소했을 때 엉덩이를 방석에서 뗀 선생님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분들이 떴다면 우리 반은 어깨동무해서 오리걸음으로 운동장 다섯 바퀴는 돌아야 했으리라.    그런데 그를 만류한 이가 꺼벙이 선생님이라고 했다.    "놔 두이소 내가 가서 혼내겠습니다. "   


 같은 미술 선생님이 당한 데 대한 분노였을까.   그는 어울리지 않는 몽둥이 하나를 들고 기세등등 달려 왔지만 끝내 혼찌검을 내기는 커녕 유야무야 훈계만 하고 꺼실이 선생님을 달래며 물러났다.   역시 꺼벙한 것이었나?  일정 정도 사실이기는 하나 완전한 사실은 아니었다.  한 녀석의 해석이 그를 뒷받침했다.   "꺼벙이가 우리 봐 준 기다.   일이 커질 거 같으니까네 자기가 온 기다.  꺼벙이 샘 딴 샘들이 애들 줘 패고 기합 주는 거 디게 안좋아한다 아이가."  


  4차원같은 발상과 시의적절하지 못한 발언의 전담자였던, 그러나 한없이 착하기만 했던 미술 선생님은 그대로 꺼벙이의 현신이었다.    군것질하느라 이발비를 다 날리고 10원어치만 머리를 깎아 달라고 해서 머리에 땜통 자국이 났던 꺼벙이......  방학 숙제를 하지 않고 '전기숙제기'를 사러 온 서울 시내를 헤매던 꺼벙이,  무하마드 알리가 스핑크스에게 타이틀을 뺐기자 자신이 무하마드 알리를 이겨야 하는데 꿈이 사라졌다며 펑펑 우는 꺼벙이........ 허구헌날 빵점을 받고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아 혹이 선인장같이 열려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던 꺼벙이라는 별명은 교사로서 아이들을 휘어잡지는 못했지만 아이들이 매 맞는 걸 보는 것조차 싫어했던 미술 선생님에게 잘 어울리는 별명이었다.  


 
  꺼벙이와 꺼실이......   두 미술 선생님을 뜻하지 않게 떠올린 것은 꺼벙이와 꺼실이를 세상에 내놓았던 작가 길창덕 선생님의 부음을 접했기 때문이다.    꺼벙이 만화를 뒤늦게 발견하고 소년중앙 과월호를 찾아 온 동네를 뒤집고 서울 외갓집까지 쑥대밭을 만들었던 유년 시절의 추억 또한 간만에 마음 속에서 햇빛을 보았다.   잘 생기지도 않았고 모범생도 아니며 허구헌날 두들겨 맞기가 일쑤였던 꺼벙이, 그래서 더 아이들에게 인기있었던 꺼벙이의 아버지이며,  우리 나라에 이런 곳이 있다는 지리 공부를 처음으로 시켜 주었던 "선달이 여행기"의 저자이고, "신판 보물섬"을 통해 유쾌한 모험을 들려 주었던 만화가 길창덕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양갱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숨겨놓았던 오징어 뒷다리처럼 구수하고 짭짤했던 유년 시절의 추억.  그를 내 손에 쥐어 주셨던 분 중의 한 분이 또 저 세상으로 가셨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가나보다.   



by 산하 | 2010/02/02 15:54 | 썸데이서울 - 이런저런 얘기들 | 트랙백 | 덧글(4)

소백산맥 이쪽이 소백산맥 저쪽에게

사이트 하나가 폭파되어서 거기 올라 있던 글들 다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어떤 분이 퍼 가신 걸 발견해서 다시 퍼와 둡니다. -- 보존용. 

 8년 전에 끄적인 것인데..... 인터넷에서 글 장난하기 시작한 초반이라 그런지 감회가 새롭네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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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백산맥 이쪽이 소백산맥 저쪽에게
                           - 어떤 돌이킴

제 아버지 고향은 함경북도이고 11살 되던 해 1950년, 눈보라 휘날리던 바람찬 흥남부두에서 배타고 나오셨습니다 이후 대구 (그래서 제 본적은 대구죠) 제주, 거제도 등 각지를 주유하시다가 서울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셨고 "반드시 서울 색시를 얻겠다."는 각오로 노총각을 고수하시다 서울 토박이였던 저희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신 후 직장을 옮기면서 부산에 정착, 지금까지 살아오셨습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지난 이력을 주워섬기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지금까지 제게 보여 주셨던, 그리고 제가 지켜보았던 아버지와 그 주위 분들의 모습을 통해서 지긋지긋하고도 꺼내기조차 난처한 화두인 '지역감정'의 한 단면을 이야기해 보기 위해섭니다.

도대체 부산 사람들의 그 고집불통의 지역색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하루에도 두어번은 듣는 요즘, 저는 내심 과거 아버지께서 '지역색'을 드러냈던 기억의 퍼즐들을 맞춰 왔었습니다. 따라서 물론, 지금부터 늘어놓는 소리들은 지역감정에 대한 과학적인 해명은 전혀 될 수 없겠습니다. 그러나 토박이는 아닐지라도 뜨내기 부산사람으로 수십년을 살아왔던 아버지와 그 밑에서 머리가 굵어졌던 저의 추억 역시 그 얽히고 설킨 지역감정의 속을 들여다보는 아주 자그마한 틈은 될 수 있을 겁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그 일이 있을 때... TV 아나운서는 광주에서 불순분자들이 퍼뜨린다는 유언비어의 실례를 주욱 읽어 주고 있었습니다.
"계엄군이 여학생의 가슴을 찔렀다." "도청 지하엔 시체 몇 구가 안치되어 있다"
"계엄군이 탱크로 몇 명을 깔아뭉갰다.." 등등의 리얼한 내용의 '유언비어'가 광주 시내 일원에 떠돌고 있다는 것이었는데 그 중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들 씨를 말리러 왔다“

온몸에 소름 돋은 채 TV를 지켜보던 열 살난 소년이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저게 무슨 소리냐??

“경상도하고 전라도가 사이가 원래 안좋아.”
“왜요?”
“음...... 거 뭐냐 신라 백제 알지? 그때부터 그랬어.”

열 살난 꼬마에게 ‘신라 백제’론은 아주 훌륭한 대답이었죠. 사실 우스운 이야긴데 더 웃기는 건 지금도 이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사람 많다는 겁니다. 대충 술자리에서 '지역감정의 뿌리가 뭘까?' 안줏꺼리로 물어본다면 어김없이 ‘신라 백제’ 이야기하는 사람 꼭 있습니다. 어쨌건 그 '신라 백제론'은 제가 ‘지역감정’을 처음 접한 순간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신라 백제’론은 그만큼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그것이 “뿌리깊은” 전통(?)이라는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겠지요. 얼마 전 개봉된 영화 '황산벌'에선 계백과 김유신은 전라 '앗싸리하고' '학실하게' 영호남 사투리들을 쓰고 있지 않습니까.

언젠가 전라도에서 어떤 아이가 동네에 이사 왔을 때 동네친구들은 그에게 바로 ‘깽깽이’라는 별명을 붙이더군요.

“와 깽깽이라카는데? 깽깽이가 뭐꼬?”
“절마 전라도에서 왔다 안카나. 그라이 깽깽이지.”
“전라도에서 왔는데 와 깽깽인데?”
“몰라. 하이튼 깽깽이라 앙카나.”

아이들은 그 이유를 모르는 채 깽깽이라는 말을 쓰고 있었고 이미 그것이 그 사람을 비하하는 말임을 체득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다 아는 걸 모르고 있다는 열등감(?)에 시달린 저는 퇴근하는 아버지께 인사도 않고 소리높이 물었습니다.

“아부지 깽깽이가 뭐에요? 전라도가 왜 깽깽이에요?”

뜻밖에도 자초지종을 들은 아버지는 저를 무척 혼냈습니다. 그 말 어디서 들었느냐... 친구한테 그런 말 쓰는 거 아니다. 한바탕 혼난 뒤에도 예나 지금이나 궁금한 것 못참는 저는 동네 형들한테 찾아다니면서 물어 궁금증을 해결했습니다. 해결한 뒤의 부산물이 오히려 더 많았습니다. ‘하와이’니 ‘개땅쇠’니 전라도 사람을 빗대는 비칭이 깽깽이 외에도 많다는 것, 그리고 전라도 사람에 대한 다양한 정보(?)까지 말입니다. 이른바 ‘밥상머리 교육’이죠. 전 밥상머리에서 받은게 아니라 동네어귀에서 배웠습니다만.

이를테면 “전라도 사람들은 면전에서는 간이라도 빼줄 것 같은데 뒤통수를 치는데 선수다.” “전라도 사람들은 겉다르고 속다르다.” “음식하고 거짓말 하나는 끝내주게 한다.” 등등.....
    
즉, 제가 어렸을 적만 해도 이른바 ‘지역감정’의 감염통로는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밥상머리 교육’을 받은 적도, 아버지가 지역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신 적이 없으니까요. 언젠가 가족끼리 전라도 일주여행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되레 제가 ‘전라도’라는 곳에 처음 가는 것에 대해서 약간의 우려를 표했을 때 아버지가 코웃음을 치면서 “그런 거 없다. 사람은 다 똑같다.”라고 일축하신 적도 있습니다.
    
이건 제가 보기에도 상당히 합리적이신 아버지의 성품 탓도 있을 것이고 아버지께서 일하시던 회사의 사장이 전라도 출신이었고 따라서 그 직장에 전라도 사람들이 평균치 이상 포진해 있었던 배경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다행히도 제 친구들에 비해서는 ‘전라도’에 대한 편견을 거의 주입받지 않고 자랄 수 있었지요. 빨간색 상의에 까만 바지 입은 해태 타이거즈는 웬지 보기 싫었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래서 하늘색 유니폼의 롯데가 해태한테 만판 깨지면 기분이 저윽이 상했던 것도 사실입니다만.

87년 겨울..
뜨거웠던 6월 항쟁이 가시고 789 노동자 대투쟁이 잦아들고 본격적인 대선 국면으로 접어들었을 때 고려대에서 김대중과 김영삼이 서로를 외면하는 사진이 신문 1면에 실렸을 때, 이른바 김대중의 4자 필승론과 김영삼의 군정종식론이 서로에게 소리없는 스트레이트로 날아들 때, 아버지의 분위기는 지금 기억에 놀랄만큼 많이 바뀌었습니다. 아니 아버지가 바뀐 게 아니라 주위 사람들 모두가 바뀐 듯 했습니다.

“부산 남바(넘버) 달고 광주 갔더만 아 주유소에서 기름을 안넣어 준다 카네. 주유소 주인이 나와가 김대중 선생님 만세 세 번 부르면 넣어 준다 하능기라.” 이 말은 가장 대표적으로 떠돌았던 유언비어입니다. 이 유언비어는 제가 여러 사람에게 들은 기억이 나는데 그 공통점은 그들의 가장 가까운 누군가가 직접 당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자신이 그 꼴을 당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저희 아버지조차 그랬습니다. “너도 아는 **상사 박 과장 있잖아. 그 사람이 당한 얘기라니까. ” (며칠 뒤 만난 박 과장님은 자기가 아니고 자기 처남 얘기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들은 피해담(?)의 주인공들만 해도 수십 명은 되었을 것이고, 저 주위에 그런 말 안들은 사람이 없었던 것으로 볼 때 아마도 선거철을 전후해서 수천 명의 부산 시민들이 차를 몰고 전라도를 방문했고, 하필이면 기름이 떨어져, 그것도 재수없이 돈도 마다하고 김대중 만세를 부르라는 김대중 광신도의 주유소에 들렀다는 재미있는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만, 문제는 그 전파 속도는 빛과도 같았고, 그것이 설마?에서 역시!로 전이되는 속도는 광속을 돌파했다는 점입니? ?
  
김대중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모조리 “너 ‘라도’냐?”라는 질문을 받았고 실제 전라도 출신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전 그때 동네 이발소 아저씨가 ‘라도’였다는 걸 처음 알았고 우리가 축구할 때 시끄럽다고 맨날 아우성치던 아줌마도 ‘라도’라는 것도 자연스레 알게 됐지요. 실험실의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전라도 사람들은 또렷이 구별되기 시작했습니다. 제 학교 동기 중에 이동화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자기는 김대중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말을 꺼내는 순간, 주위에 있던 대여섯 명이 놀란 눈초리와 목소리를 모아 그에게 내던졌습니다.

"니 전라도가?"

71년도에 김영삼이 양보했으니 이번엔 당연히 대중이가 양보해야 한다는 것이 부산 사람들의 확고한 인식이었습니다. 아니 혹시 그러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반작용이었는지도 모르지요. 마침내 김대중이 통일민주당을 깨고 또 하나의 민주당 평화민주당을 창당한 순간, 그는 노태우보다 더 미운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기꾼...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시키, 결정적인 순간에 뒤통수 치는 놈, 역시 라도 맞구만..... 그리고 그는 하나의 아이콘이 되어 갔습니다. 한때 신민당 창당 대회 때 김대중의 연설 테잎을 듣고 환호와 박수를 보냈던 부산 시민들이었지만 이제 김대중은 전라도 깽깽이들의 ‘교주’로 받아들여졌고 때마침 안기부가 만들어 냈던 ‘동교동 24시’는 동네 문방구에서도 ‘동교동 24시 판매!’를 써붙여 놓고 팔 정도로 공전의 히트를 쳤습니다.
    
그 위에 기름을 부었던 몇 몇 사건들이 더 있었지요. 김영삼의 광주 유세 시 보였던 군중들의 위협적 행동이 그랬습니다. 전남대 총학생회장이 올라가서 이러면 안됩니다 하고 절규를 해도 돌들은 계속 날아왔었고 마침내 몰려드는 군중들 때문에 연단이 기우뚱했었습니다. 그리고 김영삼은 연설도 못한채 대한민국 만세 삼창을 하고 내려왔었지요. 김대중씨도 물론 부산에서 푸대접 받긴 했습니다만 그 정도는 아니었지요. 이날, 대학 입시를 한 달 앞뒀던 고3 수험생의 일기 한 자락 펼펴 보면 이렇습니다.

“오늘 광주에서 전라도 사람들이 김영삼씨 유세를 박살냈다. 대체 그 대가리엔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 걸까. 김대중씨가 부산에서 당한 것에 대한 복수? 그것치곤 좀 심했다. 하여간 묘하다. 남북 갈라진 땅에 이젠 동서까지 이렇게 갈라지냐....”

그리고 며칠 뒤 노태우 후보의 전주 유세..... 수백 명의 학생들이 각목을 들고 연단을 향해 돌진합니다. 문제는 부감 카메라가 (높은 지대에서 내려다보며 촬영하는 그림) 그들을 생생하게 잡고 있었다는 겁니다. 도대체 그 카메라는 어떻게 그렇게 멋진 그림들을 잡아낼 수 있었을까요? 그 카메라가 부감을 찍기 위해 어느 건물 옥상에 올라갔을 때, 때맞춰 학생들이 돌진을 해 온 걸까요? 과연 학생들이었을까요? 아무튼......


바로 그때 둘러앉아 있던 동네 아저씨들 입에서 황당한 말이 튀어 나왔습니다.
“저런 미친 놈들... 저러니까 총맞았지.”


조금 거슬러 올라가 85년 2.12 총선 때 ‘광주’는 부산에서도 역시 크나큰 화두였습니다. 모든 신당 후보(당시 신한민주당이었죠?)들은 유인물에다 “보라 광주의 이 끔찍한 광경을!”이라며 시커멓게 처리된 사진을 싣고 있었습니다. 뒷날 보니 그 사진은 공수부대원이 고개 숙인 대학생의 머리 위로 곤봉을 치켜든 그 사진이었더군요. 광주항쟁 사진전이라도 열릴라치면 구름같은 사람들이 모여들기도 했구요.
      
아버지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80년 광주는 전두환이가 정권 잡으려고 본보기로 족친 것...”이라고 하셨고 제가 그럼 시민들은 죄 없네요? 반문을 했을 때 아버지는 분명히 “4.19 때 죽은 사람들은 뭐 죄 있냐?”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러니까 총 맞았지”라고 누군가 뇌까릴 때 아버지는 맞장구까지는 아니었지만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변해 가고 있었던 겁니다. 아니 어쩌면 전두환 정권의 말도 안되는 폭정과 그 기간 속에 끓어올랐던 열기 속에서 감추어졌던 속내가 드러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김대중씨 생애의 가장 큰 실책 중의 하나가 그 당시 “4자 필승론” 아닌가 싶습니다. 경상도 포기를 전제로 호남 표와 수도권 표를 얻겠다는 발상은 (4자 필승론이 그게 아니었다면 뭐 할 말 없습니다만 부산 사람들은 분명히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지요) 명백한 지역 분할론의 원조였다고 생각합니다. 전두환 정권은 오히려 그걸 즐기고 있었는지도 모르죠. 펌프질을 한일 자동 펌프 갖다 놓고 해 대면서 말입니다.....

결국 6월 항쟁 때 누가 누가 잘 싸우나 대회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하던 부산의 열기는 엉뚱한 방향으로 번졌습니다. 김대중과 전라도 혐오라는..... “죽 쒀서 개 줄라”라는 우려가 “개를 주면 줬지 니는 못주겠다”는 저주가 되었다고 할까요.
지극히 당연한 망월동에서의 김대중의 눈물, 또 지극히 절실하게 거기 내걸린 “선생님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십시오.”는 플래카드 역시 사람들의 감동보다는 감정의 선을 건드렸습니다. 그때 우리 아버지 그 사진 보고 이렇게 소리지르셨으니까요.
“선생님은 지랄할 선생님이가? 또라이 새끼들. 대통령병 걸린 선생 많이 많이 모시라 캐라."

그로부터 2년 전 김대중씨가 미국에서 귀국할 때 “아키노같이 되면 어쩌나요?”라는 질문에 “그러면 대한민국 뒤집어지지.”라고 당연하게 이야기하던 아버지셨습니다.

무슨 어린 아이들 장난하는 것처럼 수영만에 김영삼이 백만을 모으면 조선대에선 김대중이 백만을 모았습니다. 여의도에선 노태우 김대중 김영삼이 번갈아 가면서 백만을 모았습니다. 그 어린아이들 병정놀이같은 선거판에서 바로 6개월전만 해도 지긋지긋하게 미워하던 노태우는 상대적으로 논외로 밀려나고 부산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김대중이 천하의 몹쓸놈 명부의 선착자로 올랐습니다. “전라도에서는 김영삼이 밉다고 김대중 사퇴하면 차라리 노태우 찍는다 칸단다.”는 말까지 돌았는데, 이는 후일 아버지가 ‘지역감정’ 이야기만 나오면 전가의 방패처럼 꺼내 드셔서 제 혀를 더듬거리게 했던 논리, “우리만 그렇나? 호남은 더하다.”는 주장의 원초적 싹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선거를 거치면서, 감정의 벽은 그대로 철의 장막이 되어 버렸습니다. 호남에서의 김대중 지지율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던 기억은 지금도 선연합니다. 구십 몇 프로에 이르는 이른바 ‘전라도 몰표’는 “역시 전라도 것들 뭉치면 무섭다”는 밥상머리 교육헌장의 한 대목을 시멘트처럼 굳혀 놨습니다.

그들이 대관절 왜 저렇게 몰표를 던지게 되었을까?의 질문이 화제가 된 기억은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나지 않습니다. 그저 “와 빨갱이도 아니고 구십구프로가 뭐냐? (아버지 왈) ”이거는 김대중교 광신도들이라고 해야 맞다.” (역시 우리 아버지 왈) 는 식의 몰표 그 자체에 대한 시비와 공포섞인 경멸만이 ‘밥상머리’에서 난무했었지요.
    
그때 무슨 생각이 들어서였는지 저 역시 전라도 몰표에 황당해 하면서도 제가 아버지께 “뭐 부산도 만만치는 않잖아요. 70% (뭐 대충 이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인데”라고 딴지를 걸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대뜸 “우리는 그래도 대중이한테 15%는 줬어.”라고 힘주어 말씀하시더군요. 재미있는 건 며칠 전 아버지가 분명히 “부산에선 김대중 한 15%는 나온다. 전라도 인구가 그만큼은 돼!(그러니까 김대중이 될 지도 몰라. 큰일인데....)”라고 발언하신 점입니다. 전라도 고정표 15%가 부산 시민의 관용표(?) 15%로 둔갑을 하는 애매한 순간이었습니다. 그 둘은 수시로 편의에 따라 왔다 갔다 합디다.

87년.....그 해가 제가 집을 떠난 부산에서의 마지막 해입니다. 길떠나는 홍길동 아니 길 떠나는 김형민에게 참으로 때늦은 밥상머리 교육(?)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이전까지는 지금 생각해도 지극히 합리적이었던 저희 아버지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괴상한 열병을 앓았던 해이기도 합니다. 그 해 6월은 뜨거웠습니다. 하지만 그 해 12월은 더 뜨거웠던 것 같습니다. 그 해 6월의 화인은 이미 지워진 것 같지만 12월, 사람들 가슴에 꽂힌 불화살은 아직 꺼지지도 않은 것 같으니까요.

대학 1학년 여름방학 때, 아이들이 부산 집에 놀러 왔었습니다. 원래 부산에 적을 둔 사람들은 여름방학이 되면 해운대나 기타 등등 바다가 있고 동양 최대의 나이트 (당시만 해도 부산에 있었다고 합니다. 안 가봐서 모르겠습니다만) 등등 놀기 좋다는 이유로 산지사방에서 몰려드는 친구들 덕에 바가지 옴팡 쓰곤 했습니다. 우리 집에도 한 열 댓 명이 왔다 갔었는데..... 그 중에 전라도 아이가 몇 명 당근 끼어 있었죠.

아이들이 몽땅 서울로 돌아간 후 아버지가 '밥상머리'에서 황당무계 그 자체인 말씀을 꺼내셨습니다.

"어제 술먹고 토한 애 고향이 어디냐?"
"(우걱우걱 밥먹으면서) 광주요"
"응... 그렇게 생겼더라."
"웨..페페.. 뭐라고요?"

저 그날 거의 처음으로 밥숟갈 놓고 아버지한테 엉겼습니다. 지난 대선 때야 철없는 고3이었지만 지금은 나름대로 대가리가 큰 청년학도 아닙니까? 대체 아들 친구더러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그래 내가 어디 가서 경상도 놈같이 생겼다는 말 들으면 기분 좋겠냐... 대체 왜 그러시는 것이냐. 아버지가 부산 지사 아닌 광주 지사로 갔으면 난 거기서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나왔을 거 아니냐... 그래서 전라도 놈 되는 거 아니냐..... 옆에 있던 엄마가 놀라 말릴 정도로 따따부따 기관총을 쏴 댔지요.

그때 아버지는 분명 잘못된 표현임을 인정하고 "미안하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뜻은 아니었다"고 했지만 충격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어릴 적 지역감정을 별로 드러낸 적이 없으시던 아버지가 왜 이리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셨을까.... 87년의 선거도 한 이유겠지만 그를 즈음해서 아버지가 전라도 사람들한테 피해를 몇 번 당하신 이유도 있을 겁니다. 밥상머리 교육헌장에 첫 머리에 나오는 대로 "친할 때는 간이라도 빼 줄 것 같다가 뒤통수를 치는" , 외곽을 때리는 노련한 기술(?)에 당한 적이 있으시거든요 후후...

물론 경상도 사람한테 당하면 그 놈이 나쁜 놈일 뿐이지만 전라도한테 당하면 그 새끼가 전라도라서 그런 걸로 치부하는 괴이한 습관이 있다는 건 저희 아버지도 잘 아시고, 실제로 말씀은 그렇게 하십니다. 하지만 막상 일이 터지고 눈 앞에 닥치면 생각이 자연스럽게 그리로 간다는 것이죠. 이건 비단 아버지 뿐 아니라 밥상머리 교육의 충실한 장학생들은 물론 저같이 불성실한 날나리들에게까지도 영향을 미칩니다. 나쁜 말로 하면 '세뇌'지요. 그 세뇌가 얼마나 무서운가 하면 말입니다. 사실 저는 지역감정으로부터는 순결함에 가깝게 자유롭다고 생각했습니다. 헌데 언제였던가 한총련 출범식에서 이른바 '좌파'들의 대자보를 쇠파이프로 찢고 다니던 남총련 오월대와 마주쳤을 때, 그들의 거만한 태도와 험악한 욕지거리에 부딪쳤을 때, 그들의 부당함을 이야기하면서도 언뜻언뜻 "이 전라도 깡패같은 놈들..."이라는 중얼거림이 무슨 자동차 깜박이같이 머릿 속에 왔다갔다 하더라는 거지요. 그냥 깡패같은 놈들이면 되는데 왜 전라도 깡패같은 놈들.....이 입에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일이죠. 아니 모를 일은 아니겠지요.

92년 대선 때 갑자기 집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일상적인 안부를 물은 뒤 아버지는 제게 누구를 찍을 것인지 물었습니다. 그래서 생각 없이 백기완이요. 그랬더니 아버지 반색을 하시는 겁니다. 어? 그래? 꼭 그 사람 찍어라. 그 사람도 괜찮은 것 같다 민주화 투쟁도 열심히 했고...... 이상타 했지요. 아무렴 빨갱이라면 이를 갈다가 그 이빨 부서지시는 분이 '민중 후보' 백기완을 좋다 하실 이유는 전혀 없거든요. 곰곰 생각해 보니 그건 김대중 표를 하나라도 갉아먹기 위한(?) 전화였습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좀 무서워지더군요. 아들한테 김영삼 찍으라 그랬다가는 고운 소리 안나올 것 같으니까 차라리 백기완을 찍으라고 하신 겁니다.

얼마 있다가 "김대중 죽이기" 책이 나왔었지요. 부산에다가 그 책을 슬쩍 놓고 왔었습니다. 보셨냐고 여쭤 보니까 그 따위를 왜 보냐..고 일갈하시면서도 보시긴 보신 모양입디다. 왜냐면 저에게 이렇게 공박을 하셨거든요.

"거기 보니까 김대중이 이제 나오고 싶어도 못나온다고? 조선일보가 김대중 추켜세우는 게 확인사살이라고 했지? 정계복귀가 불가능하다고 했지? 너 나랑 내기하자 김대중이 반드시 또 나온다. 그 인간은 대통령병 환자야."

김대중이라는 이름은, 그 사람의 역량이 어떻든 업적이 무엇이든, 그 과거가 아무리 빛나든, 거짓말장이에 대통령병이 중증에 이른 환자명일 뿐입니다. 거기에 호남 광신도들을 이용해 먹는 가짜 선생님이라는 것이 가미가 되지요. "전라도 사람들은 그 인간 또 99% 찍어 줄 거니까." 김대중당=전라도당......

김대중이 정계복귀를 선언한 날 (물론 구체적으로 선언한 게 아니라... 하여간 활동을 재개한 날) 우연찮게 아버지와 통화를 하는데 아버지께서는 의기양양, 득의양양 제게 호령하셨습니다. "봐라 내 말이 맞지?" 아마 이 말은 그 날 부산 시민들을 포함해 거의 모든 영남 사람들이 똑같이 내뱉지 않았을까 합니다. 거짓말쟁이 김대중의 신화의 벽 위엔 아마 전기 철조망이 쳐졌겠지요.

97년 대선 때 아버지는 또 전화를 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솔직히 불쌍해서, 정말 불쌍해서 김대중 찍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김대중을 탐탁치 않게 바라보는 제 주위 사람들에게 "이번에도 안되면 그 사람 귀신 돼서 청와대 창문에 나타날 거야...이번엔 찍어 줘라 웬만하면"이라고 설득하고 다니고 있을 무렵이었지요.

누구 찍을 거냐? / 김대중이요. / 야 나라 망한다. 제발 생각 바꿔라. / 이번엔 호남으로 한 번 넘어가 줘야죠. / 그 사람들 지금까지 못해먹은 거 다 해먹을 거다. 또 김대중 그거 사상도 불그죽죽하고.... / 진짜 불그죽죽했으면 80년도에 목매달았죠./ 하여간 김대중 되면 큰일난다. / 더 큰일날게 뭐 있어요? 영삼이가 큰일 다 냈는데... 서울선 부산 사람들 손가락 자르라고 난리에요./ 웃기네, 김대중이였으면 별 수 있을 줄 아나? /

대충 이런 내용의 통화였는데..... 아버지의 말씀에 지금 부산 사람들이 가진 반 김대중 논리는 대충 들어 있습니다.

이번 정권 출범 후 전라도 사람들이 덕을 봐도 너무 봤다는 것... 즉. 김대중 자신이 박지원 같은 입안의 혀를 끝내 놓지 않은 채 버티고 있는 걸 봐도 얼마나 지독한 인사 편중인가 알 수 있고, 최규선 같은 사기꾼에 무슨 게이트에는 조폭도 끼어 있고 이희호 여사는 명품 아니면 안입었다더라에서... 마침내 홍삼 트리오의 줄줄이 비리사탕까지 완전히 나라를 ‘아도’치고 있다는 생각이 하나... 그리고 처음 해먹어서 그런지 무척이나 서툰 죄.. (세상에 청와대 사정팀장이 해외 도피를 하는 희한한 상황)까지 버무려서 크게 하나요..

둘.. 북한한테 마구 퍼줘서 김정일하고 6.15 회담 한 번 한 다음에 노벨 평화상 타고... 김정일 언제 오나 목 빼고 앉아 있고..... 이 정권 들어서는 간첩 한 번 못잡았다잖아.. 그노무 햇볕은 뭣 주고 뺨 맞는 정책인가? 하는 게 둘이요

IMF 끝내고 경제 안정 이끌어냈다고 자화자찬 대단한데.. 이 부산 대구 바닥 경제는 말 그대로 바닥이다.. 살기가 좋아져? 언놈이 그래? IMF 때보다 더 장사 안된다고 아우성인데.. 준비된 대통령? 놀고 있네.. 하는 게 셋이었지요.,.

논리적으로 반박하면 금방 무너질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첫 번째 죄의 경우는 맞장구를 치면서 들어가야 두 번째와 세 번째 이야기를 어째 볼 수가 있으니까요.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죄는 논리적으로 해명 가능한 부분이지만 사실 첫 번째의 경우 감정이 워낙 많이 개입되어 있는 문제라 잘못 건드렸다간 벌집 쑤신 꼴 됩니다.

저 경우... 그나마 덜 해 먹지 않았냐? 는 식으로 접근했다가 “정권 끝나면 이거 백 배는 나올 꺼다. 전두환이 얼마 해먹은 지 언제 알았나?”라는 아버지 말에 깨갱거리며 퇴각했고 IMF 극복 어쩌고 얘기를 꺼내자 “치아라... 니 말로 경제 개발은 박정희가 한 거 아니라며? 근데 와 IMF 극복은 김대중 혼자 공인데?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라.”(어떤 내 또래 친구 얘기)가 입이 막혔습니다. 무슨 소리든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데는 더 붙일 말이 마땅한 게 없습니다.

"한나라당더러 부패정권 심판하라는 말이 가당키나 하냐"는 네거티브로 나가도 별반 효과 없습니다. 선거전 와중에서 이회창 진영에 결정적인 타격이 되었던 뉴스가 천문학적 액수의 ‘세풍’이 아니라 ‘100평짜리 빌라’였던 것처럼 ‘대통령 아들들’의 비리는 가깝고 한나라당의 과거는 그만큼 먼 것이었으니까요.

후후 쓰다보니 암담하군요.... 암담하죠? 하지만 적어도 이 글을 쓰게 만드는 중요한 모티브였던 우리 아버지를 비추어 볼 때 꼭 암담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결혼하려고 할 때 걱정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제 처가가 원래 전라도 태인 쪽이거든요. 물론 일가가 상경한지 수십년이 흐르긴 했지만 아직 장인장모님은 전라도 사투리 앗싸리하게 구사하시는 형편이고... 큰 걱정은 아니더라도 그다지 기꺼워하시지는 않을 듯하여 나름대로 그 모면을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어느날, 무심하게 너 사귀는 아가씨 고향은 어디냐고 물으시더군요.

그래서 정색을 하고 (즉 한판 붙을 각오를 하고) 전라도라고 했더니 그래? 하고는 미동도 없으십니다. 그래서 되레 머쓱해져서 “괜찮아요?”라고 설레발을 쳤더니 아버지 저를 빤히 쳐다보면서 이러시는 겁니다.

“야 우리 때나 그랬으면 됐지 느그들 때까지 그런 거 따져서 뭐하노?”

아 아버지 우리 아버지..... 그리고 더욱 결정적인 변화는.... 작년 지방선거에서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이헌을 찍었고 대통령 선거에서는 노무현을 찍었다는 것이지요. 물론 이유는 ‘국민통합’ ‘동서통합’과는 어림도 없이 먼 “젊은놈”이기 때문이긴 했습니다만 김대중을 지금도 끔찍이 싫어하고 전라도당 민주당 찍은 적이 한 번도 없으신 아버지이기에 저는 그 변화를 예사롭지 않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요즘은 땅을 치고 후회한다고 하시긴 합니다만... 그건 지금까지와는 다른 이유이리라 억지로 믿어 봅니다) 혹시 지난 지방선거와 대통령 선거에서의 아버지의 한 표가 “우리 때나 그랬으면 됐지, 느그들 때까지 그런 거 따져서 뭐하노?”라는 감격스런 멘트의 정치적 표현이 아닐까 하는 기대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저 한 사람의 경험을 돌이켜 봐도 눈앞에 금성철벽이 있는 기분인데 지금 이 사회를 살고 있는 수많은 영남인 호남인 충청인 강원인 경기인 제주인들의 경험 속에는 또 얼마나 많은 감정의 벽과 골들이 가로지르고 있겠습니까. 답답도 하실 것이고 ‘깽판’을 치고 싶은 욕구가 머리 끝까지 치솟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제 지금까지 일요일 저녁 동안 좌판을 두드리며 제 과거 여행을 마친 소감은 그렇게 갑갑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갑갑해 하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은 들기 때문입니다.

또 '지역감정'의 문제는 사실 '감정'의 문제이지만 그 감정을 감싸고 있는 것은 억지든 합리적이든 갖가지의 논리들입니다. 그것을 깨 나가는 것은 당연히 논리적이어야 하겠지요. 때로 말이 통하지 않는 갑갑함을 풀기 위해서 지나치게 서두르거나 조급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만한 실수도 없다고 봅니다. 더군다나 과거 영남 사람들이 보여 주었던 그 패악질의 방식을 차용한다거나 그에 걸맞는 편견을 무기로 사용한다는 건 있어서는 안될 일이겠지요.
    
쓰다보니 정말 두서없고 내용 없네요.. 내일 아침 일어나면 이 글을 여러분께 보내기 전에 제 손으로 지워버릴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디서 시작해서 어떻게 이야기 풀어서 무슨 결론을 내려야 할까의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글을 썼고, 써놓고 보니 제가 무슨 말하는지 모르겠다 싶은 기분이 드니까요.그런데 원래 지역감정이 그런 거잖아요. 어디서 시작되어서 어떻게 풀어 무슨 결론을 낼 것인지에 대해 아무도 답이 없는... 아니 답은 많으나, 그 답이 다른 사람들끼리는 결코 다른 답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 하지만 그것 자체와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만큼은 하시라도 없어져야 할 것임에 분명한.......

by 산하 | 2010/01/30 23:44 | 썸데이서울 - 이런저런 얘기들 | 트랙백 | 덧글(6)

민주노동당 10주년, 그리고 최규엽 소장

1999년 밀레니엄 망년회가 꼬리에 꼬리를 물던 시절, 왕년의 통신 동호회 또래들이 모였다. 술자리가 싯누렇게 무르익고 혀들이 트위스트를 출 때쯤 한 녀석이 뭔가를 돌렸다. 녀석이 LG인가 삼성인가 하여간 잘나가는 월급쟁이인 걸 익히 알고 있었건만 내 입에서 “너 보험하냐?”가 튀어나왔으니 어지간히 취했다 싶다. 술김에 눈을 박아 보고 싶지도 않아서 대충 사인해서 넘겼는데 그것이 민주노동당 입당원서인 줄을 뒤늦게 깨달은 것은 1년쯤 지나서였다. 꼬박꼬박 정체 모를 곳으로 돈이 빠져나가는데 도대체 이게 뭐냐는 아내의 힐문을 받고서야 어이쿠 이마를 쳤던 것이다.


대학 졸업장을 쥐고 사회 물을 먹고 내쳐 달려온 몇 년 동안 나는 그렇게 무심한 ‘직딩’이었다. 동시에 민주노동당이 무슨 정당인지, 뭘 하자고 하는 정당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만 뭔지 모르는 거라면 당장 끊으라는 아내의 요구에 나는 엄숙하게 대처했다. “냅두지?  내 참정권이야.”


가물가물한 과거에 민중 권력을 이야기하고,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부르짖었던 사람들이 아직 그 깃발을 부여잡고 있다고 대충 통밥을 짚었고, 내 무관심과는 별도로 그들은 내 월급에서 돈 만 원과 가끔 전화 와서 요구하는 특별 당비 얼마 정도는 챙겨갈 가치가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인가 내 당원 번호는 무척 빨랐다. 혹자의 표현대로라면 중앙위원급 번호였다. 하지만 빠르면 뭐하나. 지역 모임 한 번 안 나간 부실 당우인데. 내 번호가 그렇게 빠르다는 것도 나는 당원증을 버린 뒤에야 알았다. 정치적 지지를 표방한 정당이기는 했으나 꼬치꼬치 뭐하는 곳이냐고 캐묻지도 않았고, 어떤 사람들이 당권을 쥐든 말든 관심을 두어본 적도 없었다. 2002년 내가 인터넷이라는 신천지(이미 구세계가 된지 오래였지만 컴맹인 나에게는 무척이나 경이로왔던)에 빠지기 전까지는 더더욱 그랬다.




그 민주노동당이 10주년을 맞았다고 한다. 또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친구에게서 입당원서를 받아들 때 당은 출생신고 전이었다. 이거 이거 나는 거의 발기인 수준이었던 것이다! 이미 맘도 몸도 떠난 당이지만 10주년이라니 ‘꺾어지는 해’를 맞은 대한민국 원내 정당에게 덕담 한 마디를 빼놓을 수는 없겠다. 민주노동당 10주년을 축하드린다. 10년 묵은 정당이 드문 대한민국의 정당 역사를 감안해 볼 때 장차 몇 주년까지 기념하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10년이란 무시 못할 세월의 금자탑이라 할 것이다.



10주년을 맞아 그 과거를 반추하고 미래의 길을 모색하는 토론회가 열린 모양이다. 그래도 생애 최초로 가입했던 정당이라고 외면하려는 시선을 애써 붙들어 내용을 살폈다. 건성건성 읽어내리다가 그만 이름 석 자에서 덜컥 급정거를 당하고 말았다. 그 큰 이름은 새새세상연구소 소장이라는 직함을 지니신 최규엽 선생이셨다.



"민주노동당 10년의 가장 커다란 오류이자 패배는 2008년 2월 3일의 집단 탈당과 분당"이라는 굵은 글씨를 보면서 나는 적잖이 반가와했다. 드디어 이 축농증같이 갑갑하던 분도 머리가 트이시는구나. 분당 사태에 대해 반성하고 분당의 원인에 대해 자성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에게 말이라도 미안하다고 할지도 모르겠구나..... 하며 말대가리에 물소 뿔 날 기대를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게 웬 걸.


“2007년 대선에서 민중들이 민주노동당을 버린 것이 아니었다. 보수로 돌아선 민심이라는 불리한 객관적 조건, 민주노동당의 무능력과 분열상에 경고를 보낸 것이지 '또 권영길‘이라 패배한 것이 아니었다”


대선 당시에 이명박 후보와 권영길 후보를 이틀 간격으로 만났었다. 대선특집 방송을 위해서였다. 이명박 후보 쪽은 자료가 참으로 많았다. 방송꺼리도 많았다. 몰랐던 사실도 부지기수였고 그가 무슨 말을 할 때 귀를 쫑긋 세울 정도로 호기심이 일었다. 하지만 권영길 후보쪽은 그 반대였다. 농담 삼아 이런 말이 오가는 판이었다.


“그냥 5년 전 자료화면으로 편집할까요?”

“응 없으면 10년 전 자료 뒤져봐 그럼 대충 다 있을 거야. 촬영 가지 말고 놀자 킥킥”


출연했던 네 후보 가운데 그 집이며 가족이며 개인사며 각종 자료 등등이 권영길 후보처럼 지겹게(?) 공개된 사람은 없었다. 뭘 찍어도 그 나물에 그 밥이었던 것이다.




권영길 후보의 지난한 과거와 빛나는 개인사를 폄훼하고자 하는 맘은 추호도 없다. 문제는 개인 권영길이 아니라 명색 진보정당 주제에 정책적으로도, 또 후보의 참신성으로도 차별성을 부각시키지 못한 채 대통령 선거라는 기회를 사장시킨 세력이 내세운 대표선수가 권영길 후보였다는 비극일 뿐이다. 97년과 2002년과 달리 추가된 게 있다면 그 무슨 “코리아 연방 공화국” 뭐시깽이인가 하는 구호였을 뿐인 진보정당과 그 삼수생 후보......




“코리아 연방 공화국”이 부처의 깨달음이라도 되는 양 후보의 어깨띠에, 후보 부인의 손 플래카드에 바지런히 들이밀던 세력의 대표격인 최규엽 소장님께서 “패배는 그 때문이 아니라 분열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건 가히 아무데나 기소장 들이밀고 설치는 대한민국 검찰과 비슷한 지적 수준이거나, 전여옥 의원급으로 도타운 안면 근육을 보유하셨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어느 쪽에 가까울까. 검찰? 전여옥 의원?




그놈의 분열 탓하는 버릇은 유서도 깊고 이력도 났다. 하지만 이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 허구헌날 바람을 피우고 마누라 안방에서 자는데 대놓고 건넌방에 여자 데려다 놓고 재미보 면서 그거 뭐라하면 가정에 분란 일으킨다고 지랄 지랄하던 인간이, 참다 참다 못 참고 집나간 마누라더러 왜 집 나갔냐고 눈 부라리고 가정의 평화를 위해 돌아오라고 으름장 놓는다면, 그걸 어찌 제대로 된 인간이라 하랴.


언감생심 내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눈물바람까지는 바라지도 않더라도, 무명지 끊어 혈서로 맹세하는 엽기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내 그때는 잘못했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마.” 정도로 머리는 긁적거려 줘야 집나간 마누라도 들어올까 말까를 고민해 볼 거 아닌가.



노회찬 심상정 의원이 “출세주의” 때문에 나갔는가? 단순히 ‘당권 투쟁’에 지니까 불뚝밸 나서 나간 것인가? 최규엽 소장님께서는 보다 솔직하실 필요가 있다. 솔직할수록 떳떳하고, 사람들 사이에 거리감을 없애고, 조직의 신임을 받을 수 있다는 교시 잊으셨는가?


그리고 겸손도 늘리셔야 할 것 같다. 제 잘못은 쏙 빼고 남에게만 으르대는 오만은 그 누구의 가르침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 할 것이다. 그리고 용기도 좀 기르셔야겠다. 당 간부가 당원 정보를 보고서로 만들어 북한으로 올려부치는 ‘비자주적인’ 행각을 벌일 때 설사 그와 정치적 의사를 같이 하더라도, “니가 자주파냐. 어떻게 이런 비자주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느냐?”고 꾸짖고 읍참마속 정도는 할 용기가 있어야 소장이고 대장이고 빛날 수 있지 않겠나.



솔직 겸손 용감.. 또 뭐더라? 아차 그래 좀 소박하고 성실하게 사람들을 설득할 자세는 갖추시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하기도 끔찍한 해당 행위를 저지른 자들을 징계도 못 하겠다, 조사도 못 하겠다 뻗대어 결국 사람들을 밖으로 내몰았던 처지에 목 뻣뻣이 들고서 “돌아오라 빤스 끈 줄여 놨다”고 외친다면 이건 소박맞아 마땅한 소박이요 실성한 성실 아니겠는가 말이다.




하아 이거 최규엽 소장님께 품성론 강의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토론회에서의 최규엽 소장님의 모습은 품성론에 대한 복습이 필요해 보였다. 오죽하면 20년쯤 전에 공부하던 내용을 이렇게 끄집어내서 말씀드릴까. 솔직해지시라. 용감해지시라. 소박해지시라 겸허해지시라. 그리고 성실하시라. 후배들한테 골백번도 더 훈계하셨을 터에 왜 그렇게 체화가 더디신지 아흔 아홉 번 알다가 한 번 모를 일이다.



김민웅 교수가 쓴소리를 하셨다는 기사를 읽었다. 민주노동당은 2D라고 말이다. 3D, 4D가 판치는 세상에 2D에 머물러 있다는 말씀이겠거니와 내 귀에는 그것이 쓴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민주노동당을 2D에 비한 것은 너무도 인자하시며 관대하신 발상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번 망년회에서 만난 내 친구처럼 아직도 민주노동당이 노회찬 당인 줄 알고 돈 꼬박꼬박 내고 있는 착한 백성들 말고, 각 지역구 바닥에서 사회의 진보를 위해 묵묵히 일하는 민주노동당의 진성당원들 말고,

자주 깃발은 하늘같이 모시어도 하는 행동은 로봇같이 비자주적인 상층부, 피땀 흘려 함께 일군 당을 깰지언정 ‘본사’ (북한)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네이버에 나온 정보’ 좀 알려 주었을 뿐인 동지를 해칠 수는 없다고 선언했던 광신자들의 민주노동당에게는 2D라는 평가도 아깝다. 적어도 그들의 민주노동당은 변사가 출연하는 무성 흑백 영화에서 한 치도 벗어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미 백골만 남은 변사가 간혹 쉰소리로 외칠 뿐이다. “이 땅은 미제의 식민지였던 거디었다.~~~~~” “단결만이 살 길이라는 거디었다~~~” “우리는 마침내 승리할 거디었다~~~~~”





이번 연말 정산에는 진보신당으로부터 받은 서류를 부쳤지만 나는 진보신당 당우로서 얘기한다기보다는 비상식에 적대하며 비이성에 항의하고픈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 민주노동당 산하 새세상 연구소장님의 발언에 대해 항의한다.  


자칭 진보정당의 원로라면, 거기서 지도급 위치에 있는 분이라면 이런 억지를 부리셔서는 안된다. 뻔뻔하다고까지는 차마 말 못하겠지만 이렇게 두꺼우셔서는 안된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면 팔을 꺾는 고통을 감수하는 반성을 한 연후에야 남에게 반성을 요구할 권리가 생길 것이다.


“탈당 사태, 분당이 가장 큰 패배”라고 하셨던가. 그 사태를 부른 가장 큰 책임은 바로 최규엽 소장님 이하 눈에 보이는 것을 없다고 우겼던 민주노동당 지도부에게로 돌아간다. 출세주의도 아니고 분열주의도 아닌 종북주의 탓이었다. 북한의 사상을 자신의 이념으로 수용했으면서도 “북한에 대해 아는 게 뭐 있냐?”는 거짓말을 눈 하나 깜짝 않고 하던 가증스러움 때문이었다. 그러고도 단결하자? 돌아오라? 어디 물귀신이라도 내림받으셨는가?


민주노동당 10주년을 축하한다.   그리고 이제는 좀 바뀌기를 바란다.  변사 해고하고 토키는 갖추고 2D 영화 정도는 틀기 바란다.

by 산하 | 2010/01/27 09:53 | 썸데이서울 - 이런저런 얘기들 | 트랙백 | 덧글(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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