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1.29 국채보상운동 시작

산하의 오역


1907년 1월 29일 국채보상운동 시작



 대구의 출판사 ‘광문사’ 특별회의장. 200여명의 청중들이 숨을 죽이며 충청도 사투리 배어나오는 사장의 연설에 귀를 기울였다. 사장 이름은 김광제. 충청도 보령 출신으로 동래 경무관을 지내던 중 을사조약에 항거하여 상소를 올렸고, 기타 등등의 이유로 섬에 끌려가 유배 생활을 마친 사람이었다. 그는 영남 물류의 중심지였던 대구에서 보부상 출신으로 독립협회 활동을 했던 서상돈과 손 잡고 ‘광문사’를 조직했는데, 1907년 1월 29일 김광제는 특별한 발표를 할 예정이었다. “.......나 사장 김광제, 부사장 서상돈부터 흡연 도구들을 만장하신 여러분 보는 앞에서 부숴 버릴 것입니다.”


 난데없는 금연 선언이었지만 듣는 사람들의 표정은 진지했다. 200여명의 청중 가운데에는 서울에서 일껏 내려온 장지연도 있었다. ‘시일야방성대곡’을 썼던 바로 그 사람. 사장의 열변은 계속 불을 뿜었다. “황천(皇天)이 감응하여 전국 인민으로 하여금 한 마음으로 힘을 모아 대사를 무사히 이루시고, 민국을 보존케 하옵소서!” 사장과 부사장의 재떨이와 곰방대를 부숴 버리는 것으로 시작하겠다는 ‘대사’란 바로 1300만원에 이른 국채를 인민의 손으로 갚는 일이었다. “가장 나라를 망치고 가장 시급한 일은 1300만원의 국채올시다!”


 일본의 차관 공세는 1904년 제1차 한일협약 이후 더욱 노골화되었다. 국사 교과서에 ‘고문 정치’라는 단어와 함께 등장하는 일본인 메가타는 대한제국의 재정고문으로 와서는 무려 1150만원의 차관을 도입했다. 그 이전부터 있었던 차관까지 합쳐서 무려 1300만원의 거금이었는데 이는 대한제국의 1년 예산과 맞먹었다. 이것을 갚자는 것이었다. 1907년 2월 21일자 대한매일신보에는 서상돈과 김광제 연명의 발기 취지서가 실렸다. “국채 1천 3백만 원은 바로 우리 대한제국의 존망에 직결되는 것으로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인데, 국고로는 해결할 도리가 없으므로 2천만 인민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국고를 갚아 국가의 위기를 구하자!”


 이후 국채보상운동은 그야말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광문사는 일단 사장의 각오대로 단연회(斷煙會)를 설립하여 모금 운동에 나섰다. 요즘에야 흡연자가 야만인 취급을 받지만 구한말 한국인들의 끽연은 외국인들을 놀라게 할 만큼 광범위한 습관이었다. 오죽하면 서양 선교사들이 성경에도 없는 ‘금연’을 기독교 교리로 가르쳤을까. 즉 금연이란 꽤 커다란 자금원의 산출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담배를 끊었다. 남정네들만이 아니었다. 대구 남일동의 일곱 부인들은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 어찌 남녀가 다르랴’라고 외치며 지니고 있던 은비녀, 은가락지 등 비상시가 아니면 내놓지 않는 패물을 의연했고 여학생들은 머리를 잘라 팔아 돈을 냈고, 경기도 양근에서는 숯장수들이 나무 팬 돈을 모아 냈고 갑오경장 이후 사람이 되긴 했지만 여전히 사람 취급 못 면하던 백정도 돈을 냈다. 심지어 대구에서는 장애자였던 거지가 20전을 내놓아 사람들을 울리기도 했다. 하와이에서 짐승 취급 받으며 일하던 교포들고, 블라디보토크에서 바닥 쓸고 다니던 한인들도 돈을 모아 보냈다. 나라로부터 받은 은혜라고는 쥐뿔만큼도 없는 사람들이 나라에 어려움이 닥치면 먼저 일어나고, 되든 안되든 해 보겠다고 들이박았던 독특한 역사적 DNA가 유감없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고위층의 참여는 90년 뒤의 금모으기 운동 때처럼 부실했다. 일단 돈으로 수백 억의 내탕금을 보유하고 계셨던 고종 황제께서는 ‘금연’으로 동참하셨다. 동참하셨던 것은 황송한 일이나 금연만으로 그 동참을 끝내신 것은 좀 야속한 일이었다. 물론 그조차 하지 않았던 다른 관료들에 비하면 낫다고 치하해 드려야겠지만.


 일본은 애초부터 이 운동을 “국채보상운동을 표방하고 있지만 내용은 국권회복을 의미하는 일종의 배일 행위” (통감부 경무총장)로 규정하고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친일파 송병준은 국채보상연합회의소에 나와서 “한국이 무슨 수로 거금을 모으냐. 헛수고 말고 일찍 해산하라.”고 바람을 빼기도 했고, 미국의 교사라는 둥 엉뚱한 비난을 하면서 운동을 방해해 봤지만 소용이 없자 운동의 기관지 노릇을 하던 <대한매일신보>를 공격한다. 그리고 1908년 뜻밖의 일이 벌어진다.


 대한매일신보사 사장 베델이 상하이의 영국 영사관에 불려간 동안, 총무 양기탁을 횡령 혐의로 구속한다. 모인 의연금이 13만원인데 신문을 통해 6만원이라고 발표했으니 7만원이 빈다는 혐의였다. (독립기념관 자료) 이후 돌아온 베델의 증언과 주변의 증언으로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고, 애초에 증거 자체가 없었던 탓에 일본인 판사는 양기탁에게 무죄 판결을 내린다. 하지만 일본으로서는 전혀 손해 볼 것이 없었다.


 “아니 그 돈이 어떤 돈이라고 횡령을 해?”라는 분노부터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어?”하는 의심까지 골고루 불러 일으킨데다가 국채보상운동 지원금 총합소장으로 형식상 대표를 맡고 있던 윤웅렬 (아 이 사람 얘기는 좀 길게 하고 싶은데 생략한다)은 베델에게 3만원 내놓으라고 소송까지 걸게 만들었던 것이다. 무죄 판결은 났지만 상처를 입은 것은 일본이 아니라 양기탁이었고, 대한매일신보였고, 국채보상운동 전체였다. 불신의 바람은 처음의 열기만큼이나 나라를 휩쓸었고, 결국 국채보상운동은 유야무야되고 만다. 일본 통감부는 양기탁의 무죄 판결을 들으며 이렇게 키들거렸을 것이다. “아니야? 아니면 말고.” 아 어디서 많이 본 풍경......



 전직 하급관리 김광제와 보부상 출신의 서상돈이 주도하고 골초들의 용단과 여인네들의 은가락지와 걸인이 구걸해 받은 돈, 인간 이하 취급을 감수하는 백정이 내민 고기 판 돈, 하와이에서 채찍질 받아가며 일해 모은 달러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은 루블이 합쳐진 돈은 어영부영 쓰일 곳을 모르다가 한일합방 후 일본 제국의 아가리에 삼켜지고 말았다. 허탈한 일이다. 하지만 그 결과가 허탈하다고 해서 1907년 오늘 대구에서 열변을 토하던 광문사 사장 김광제, 부사장 서상돈,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최초의 시민운동’ (강만길 교수 왈)의 의미까지 잊어버린다면 일제의 약아빠진 횡령 혐의에 엉뚱한 칼춤을 춘 윤웅렬 이하 심지엷은 사람들과 다를 게 없을 것이다. 1907년 1월 29일은 나라의 빚을 백성이 갚아 보자고 떨쳐 일어섰던 날이었다.   



 “대한 2천만 민중에 서상돈만 사람인가. 00군 이곳 우리들도 한국 백성 아닐런가. 외인 부채 해마다 이식 불어나니 많은 그 액수 어이 감당하리. 적의 공격 없어도 나라 자연 소멸되면, 아아, 우리 백성들 어디 가서 사나. 이 나라 강토 없게 되면 가옥, 전토는 뉘 것인고” (당시 사람들이 부른 국채보상가 중에서)

by 산하 | 2012/01/29 23:19 | 산하의 오역 | 트랙백 | 덧글(4)

1958.1.28 한반도 핵무기의 시작

산하의 오역


1958년 1월 28일 남한 핵무기 배치 확인


 그 품질에 대해서는 심대한 의문이 있고, 방사능이 거의 검출되지 않았다는 점도 좀 기이하지만 어쨌건 북한은 핵실험을 했고, 그 운반체인 미사일 실험도 감행했다. 제 나라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핵무기에 집착하는 꼬락서니는 심히 유감스럽긴 하다. 심지어 북한을 방문하여 공동선언도 했던 이쪽의 전직 대통령이 서거하는 국상이 났는데 그 기간 중에 핵실험을 감행했을 때에는 참 구제불능인 종자들이라고 한탄도 했었다. 북한 정권의 핵에 대한 추잡하기까지 한 집착과 그를 “자위적인 핵” 따위로 미화하는 덜떨어진 자칭 진보들을 옹호할 생각도 없다. 핵무기는 우리 편 남의 편 골라 죽이는 ‘주체의식’ 따위는 없는 무기이기니까.

...


 하지만 조금 달리 생각해 보면 그들의 집착이 측은해 보이기도 한다. 당장 ‘대량살상무기’가 존재하지 않았고, 당사자도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량살상무기의 존재를 이유로 전쟁이 벌어지고 한 나라의 국가원수가 몇 년을 숨어지낸 끝에 목이 매달렸던 이라크의 예를 보면서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으며, 그를 모면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행동이 무엇이겠는가 말이다. 정상적인 아이큐를 보유한 사람이라면 “이라크에 핵무기가 진짜로 있었더라면 저런 꼴은 당하지 않았으리라”는 계산을 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그들에게는 이라크보다 더 오래 되고 깊숙한 트라우마가 있다. 이 트라우마는 1958년 1월 28일로부터 비롯된다.

 1957년 6월 21일 판문점에서 열린 군사정전위원회 제75차 본회의에서 유엔군 측은 정전협정 조항 중 하나를 폐기한다고 선언한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한반도로의 무기 반입을 금지하는 13조 D항이었다. 이후 미국은 주한민군의 현대화 작업에 착수한다. 현대화는 곧 핵무장화의 동의어였다. 그리고 마침내 1958년 1월 28일 주한 유엔군 사령부 (즉 주한미군 사령부)는 한국 영토 내 핵무기 도입 사실을 정식 발표한다. 한 술 더 떠 미국은 2월 3일 원자포와 지대지미사일 어네스트 존을 공개한다.


 “원자폭탄을 만주에 몇 개 떨어뜨리고 동해에서 황해까지 방사선 코발트를 뿌리고 싶었다.”는 맥아더의 회고가 아니더라도, 전쟁 중 미국은 ‘신중하게’ 핵무기 사용을 검토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그러던 차에 전쟁 끝난지 만 5년도 안된 차에 남한 내에 핵무기가 공식적으로 배치된 것이다. 그냥 까불지 마라는 겁주기 차원이 아니었다. 1959년에는 공군 핵무기도 한국에 배치되었다. 이후 핵이 장착된 마타도어(Matador) 크루즈 미사일 1개 비행중대가 이남에 상시 배치된다. 마타도어는 1,100km까지 날 수 있는 미사일로서 이북 뿐 아니라 중국과 소련까지를 겨냥한 것이었고 점차 사정거리 긴 미사일로 대체됐다.


 1991년 공식적으로 핵무기를 철수할 때까지 미국은 이남내 미군기지에 약 1720여개의 전술핵무기를 갖다 놨었다. 이것은 한반도 1백 평방키로미터당 한 개 이상의 핵무기가 배치된 셈이며, 동해에서 서해까지 200m에 하나씩 핵무기가 배치된 격이었다. 인구밀도는 한국이 방글라데시와 대만에 뒤졌는지 모르지만, 핵 밀도만큼은 전 세계에서 최고였다. 위력면에서도 10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히로시마 급 핵폭탄의 1700배에 달했고, 히로시마의 희생자 수치를 놓고 계산한다면 1억 명을 훨씬 넘는 생명을 앗아갈 위력을 갖고 있었다.


 북한이 핵을 개발한 이상, 핵무기를 머리에 이고 살 수는 없지 않느냐며 비분강개하는 분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얼마나 불안하실까. 나도 솔직히 불안한데. 고양이한테 몰린 쥐는 너도 날 먹으면 죽는다고 쥐약을 삼킨다는데, 체제의 위협 앞에서 그들이 핵무기를 ‘자위용’으로만 묻어둘 가능성은 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으로 나는 북한이 얼마나 불안했을까 하는 오지랖도 갖게 된다. 조잡한 핵무기 몇 개 머리맡에 있다고 이리 불안한데, 핵탄두 수십 발을 보유하고 있던 군산 공군 기지에서 별안간 폭격기가 떴을 때 그를 포착한 북한 병사들은 얼마나 두려웠을까. 도봉산 탄약 본부에서 미심쩍은 폭탄이 반출되었다는 정보가 있다면 또 얼마나 신경을 썼을까. 1980년대 중반 핵탄두 장착이 가능한 랜스 미사일이 배치됐을 때 저 물건이 대체 어디로 갈 것인지 얼마나 가슴을 조였을까.


 나는 북한의 핵 집착이 짜증나고 우려스러운 만큼 그들이 느꼈을 불안감에 대해 짐작의 폭도 넓어진다. 그들은 그 공포를 1958년 1월 28일 이후 지속적으로 가져 왔었다.


 

by 산하 | 2012/01/29 23:16 | 산하의 오역 | 트랙백 | 덧글(4)

저기 떠나가는 최

저기 떠나가는 최, 기자들 틈 외로이
겨울비에 젖은 낙엽같은
종편 시청률 안고서
내가 잘못했다는
허튼 사과도 없이
양아들 도망간
... 따사로운
싱가포르 땅 찾는가
가는 최여
가는 최여
그 곳이 어드메뇨
정연주 치고 MBC 꿇린
영화는 간데없고
멘토와 함께 어둠 속으로
저기 멀리 떠나가는 최

책임 통감한다는 흔한 예의도 없이
폐허돼 가져 갈 것 없는
방송판 땅을 떠나
가는 최야
가는 최야
꿈에 볼까 두렵다
남김 없이 작살내고
홀로 떠나 가는 최
봉투 냄새 수갑 냄새
어둠에 젖어서 밀려올 뿐
봉투 냄새 수갑 냄새
어둠에 젖어서 밀려올 뿐

by 산하 | 2012/01/28 21:57 | 트랙백 | 덧글(2)

1945.1.27 아우슈비츠 해방

산하의 오역


1945년 1월 27일 아우슈비츠 해방


 2차대전 막바지, 복수심에 불타는 소련군은 기진맥진한 독일군을 거칠게 몰아부쳤다. 히틀러의 나찌 군대가 북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기나긴 소련 국경을 유린한 이래 죽어간 소련 인민과 군인의 수는 가히 천문학적이었다. 이제 독일이 그 댓가를 치를 차례였다. 따발총을 든 소련군은 눈에 핏발이 서서 독일로 독일로 몰려들었다. 그 도상에 폴란드가 있었고 코니에프 장군이 이끄는 우크라니아 전선 제 1군은 폴란드의 작은 도시 아우슈비츠에 이르렀다. 그들은 이곳에서 가공할 현실과 맞닥뜨리게 된다. 1945년 1월 27일이었다.


 “사람의 머리카락입니다. 700킬로그램 분량입니다.” 보고하는 소련군 병사의 목소리는 떨려 나왔다. “뼛가루도 엄청나게 많습니다. 사람의 뼈입니다. 그리고..... 의치와 안경테도 산더밉니다.” 20세기 인류가 후세에 전할 최대의 악몽 중의 하나인 아우슈비츠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전장에서 볼 것 못 볼 것을 다 목도하고 별의 별 일을 치뤘던 병사들도 아연실색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폴란드 안에 만들어진 최초의 강제수용소인 아우슈비츠는 친위대 대장인 하인리히 히믈러의 지시에 의해 건설됐다. 최초에는 폴란드 정치범들을 점진적으로 살해하기 위한 장소로 이용되다가 1942년 유태 인종을 유럽에서 완전히 말살하려는 이른바 "유태인 문제에 대한 최종해결책"이 수립되면서부터는 유럽 전역의 유태인들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어 가스실에서 죽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트럭의 배기 가스를 사용했다. 그런데 다 죽기는 하는데 시간이 너무 걸렸다. 연구 끝에 사용하게 된 것이 찌클론 B라는 독가스였다. 수용소장 헤스는 그 효과를 이렇게 자랑했다. “배기 가스를 사용한 곳에서는 시체들이 땀과 오줌과 똥투성이가 됐지만 찌클론B를 사용하면 그런 일이 없다.”



 이 찌클론 B를 아우슈비츠에 공급하는 임무를 맡은 이 가운데 쿠르트 게르슈타인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독일 내에서 정신질환자와 장애자를 죽여 없애려던 히틀러의 계획에 의해 여동생을 잃었다. 이에 분노한 그는 “독가스 운용 계획을 자세히 조사하여 세계에 공표하기 위해” 친위대에 자원입대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그는 이 악마의 시나리오를 베를린의 사제나 스웨덴 대사관, 네덜란드 레지스탕스들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하지만 네덜란드 레지스탕스는 그의 정보를 거짓으로 치부했고 스웨덴 사람들도 조소 어린 침묵을 지켰다. 설마 그런 일이.... 설마 그런 일이..... 게르시타인은 전후 자신의 기록을 남긴 후 자살해 버린다. 자신의 의도가 아니었다 해도 자신이 공급한 가스를 마시고 죽어간 수백만의 생명들을 감당할 수 없었으리라.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고 한 아도르노의 한탄은 적절했다. 아우슈비츠는 인간의 바닥이 어느 정도로 내려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시장이었고, 인간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쉽게 야수성으로 대체될 수 있는가를 입증하는 바로미터였다. 하지만 어떤 끔찍한 상황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을 지키고 인간으로서의 감정과 용기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들은 있었고, 그들이 일궈낸 이야기가 질릴 대로 질려 버린 사람들의 굳은 얼굴을 풀어내는 것도 역사의 한 장이었다. 아우슈비츠에서도 그런 일은 일어났다.


 1944년 레지스탕스로 의심받아 4년 동안 아우슈비츠에 (폴란드 정치범들도 많이 있었다) 갇혀 있던 폴란드 청년 예지 비에레즈키는 탈출을 결심하고 있었다. 그 자신 때문이 아니었다. 1년 전 만나 사랑에 빠진 유태인 처녀 실라 시불스카가 죽어가는 것을 도저히 지켜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실라의 가족은 그들이 만나던 그날, ‘샤워실’에서 처리됐었다. 친위대 군복을 구한 비에레즈키는 시불스카를 압송하는 체 하면서 아우슈비츠의 삭막한 출입문을 빠져나왔다. 며칠을 걸어서 고향에 돌아온 비에레즈키는 실라를 안전한 곳에 숨긴 후 바르샤바로 가서 레지스탕스가 됐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결혼하자.”는 약속을 남기고.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비에레즈키가 돌아왔을 때 실라는 없었다. 이미 한 달 전에 비에레즈키의 고향은 해방됐고, 돌아오지 않는 비에레즈키를 기다리던 실라는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비탄에 빠진 채 다른 유태인들과 함께 미국으로 가 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이별한 지 38년이 지나서 실라는 다시 바르샤바를 찾는다. 그녀는 호텔의 여직원에게 폴란드에서의 추억을 털어놓으며 옛 사랑의 사연을 이야기했는데 그때 기적같은 한 마디가 흐른다.

“이상하다. 당신하고 똑같은 얘기를 하는 남자를 내가 아는데.”



 “당신하고 똑같은 얘기”를 하고 다녔던 남자는 역시 비에레즈키였다. 얼마 후 비에레즈키의 고향의 공항에서는 백발이 다 된 노인과 세련된 50대의 미국 여자 실라가 눈물에 젖은 해후를 한다. “실라야? 정말 당신이 실라란 말이야?”를 부르짖는 비에레즈키의 손에는 그들이 헤어져 살았던 햇수만큼의 서른 아홉 송이의 장미가 들려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길 수 없어서 목숨을 걸었던 한 청년과 그에게 목숨을 맡겼던 여인은 서른 아홉 송이의 장미를 주고 받음으로써 평생의 그리움을 대신해야 했다. 아우슈비츠의 열 아홉 유태인 소녀와 스물 셋 폴란드 청년은 그렇게 다시 만났고, 그 한 번을 끝으로 다시 자신들의 삶의 터전으로 돌아갔고 몇 해를 사이에 두고 세상을 떠났다.



 아우슈비츠가 해방되던 날, 그 비인간의 극치가 흉물스럽게 세상에 공개되던 날, 실라 시불스카와 유라세크 비에레즈키의 장미꽃을 떠올린다. 어떤 진흙탕에서도 연꽃이 피고, 최악의 시궁창에서도 생명의 끈이 끊기지 않듯, 아우슈비츠에서도 사랑은 피어났고, 그 사랑은 위대한 용기를 낳았으며, 이뤄지지 못했기에 더욱 감동적인 장미꽃의 향기로 찌크론 B의 유독성을 잠재운다. 이것 역시 역사의 한 자락일 것이다.

by 산하 | 2012/01/28 03:00 | 산하의 오역 | 트랙백 | 덧글(2)

1987.1.26 카인아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1987년 1월 26일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1987년 1월 14일 박종철이 죽었다. 그것은 하나의 임계점이자 전환점이었다. 그 전 해가을 무려 1300여 명의 대학생이 한꺼번에 구속됐다. ‘공산혁명분자 건국대 점거 난동 사건’ 때문이었다. 대학 상공에 헬리콥터가 날고 중세 공성전같이 전경이 사다리를 오르고 학생들이 그에 저항하는 그림이 방송을 통해 전파되고, 이유 불문 그 모두가 공산혁명분자로 매도된 뒤 사회 분위기는 얼어붙었다.


이데올로기 공세는 상당히 먹혀 들어갔다. 보도지침 하의 언론은 이른바 ‘센 그림’만 골라서 내보내며 과격 학생들의 실태를 반복해서 비췄고 시민들은 그에 감응했다. 그 가을과 겨울 사이 시위에 나선 학생들은 시민들이 내민 발에 걸려 넘어졌고 목이 찢어져라 외쳐도 외면하는 사람들의 등에 절망해야 했다.


하지만 박종철의 죽음은 그 동토를 녹이기 시작했다. 아니 말라붙은 듯 보였던 땅에 갑작스런 봇물을 틔우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설마 설마 하던, 성고문이다 뭐다 해도 다 빨갱이들의 모략이라 믿었던 사람들의 억지스런 이해력에도 커다란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이건 아니다..... 이럴 수는 없다...... 어떻게 생사람을 저렇게 잡는 정부가 우리 정부란 말인가. 전환점이었으며, 임계점이었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


존경하는 언론인 중의 하나인 김중배가 1월 17일에 쓴 칼럼은 그 임계점을 대변한다. 고3이었던 내 기억에도 그 글줄은 쩌렁쩌렁한 청룡언월도와 같았다.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기 바란다. 태양과 죽음은 차마 마주볼 수 없다는 명언이 있다는 건 나도 안다. 태양은 그 찬란한 눈부심으로 죽음은 그 참담한 눈물줄기로 살아있는 자의 눈을 가린다.

그러나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군. 스물한 살의 젊은 나이에 채 피어나지도 못한 꽃봉오리로 떨어져간 그의 죽음은 우리의 응시를 요구한다. 우리의 엄호와 죽음 뒤에 살아나는 영생의 가꿈을 기대한다.
"흑, 흑흑..."
걸려오는 전화를 들면, 사람다운 사람들의 깊은 호곡이 울려온다. 비단 여성들만은 아니다. 어떤 중년의 남성은 말을 잇지 못한 채, 하늘과 땅을 부른다. 이 땅의 사람다운 사람들을 찾는다........“


그리고 1987년 1월 26일 보통 사람들의,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일상을 살아가던 사람들의 속을 뒤집는 발언이 대한민국을 뒤흔든다. 아니 물론 그날은 사람들은 몰랐다. 보도지침 치열한 언론에서 그 발언을 제대로 보도하기는 어려웠으므로. 오히려 그 후에 유명해진 이 이야기는 공화국의 시민으로서, 아니 눈 질끈 감고 제 새끼들 챙기기에 부산한 장삼이사로서도 참아내기 어려운 창끝을 들이밀었다. 그 전환점의 주인공은 김수환 추기경이었다.

1987년 ·1월 26일은 월요일이었다. 이날 명동성당에서는 박종철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한 특별미사가 열린다. 이 날 김수환 추기경은 대한민국의 역사가 기록되는 한 영원히 남을 강론을 남긴다. 두 손을 모으고, 때로는 흐느끼던 그의 교우들 앞에서, 그리고 성당 밖 선술집에서 욕지거리 내뱉으며 술잔만 비우던 무력한 사내들을 향하여, 고문 받고 죽어간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님을 안도하면서도 슬퍼하던 어른들의 머리 위로.


“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지난 1월 14일 하늘마저 노할 경찰의 포악한 고문으로 숨진 서울대학 고 박종철군의 참혹한 죽음을 애통해 하면서 이자리에 모였습니다. 솟구쳐오르는 의분 속에 온나라의 모든 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할 말을 잊고 하늘만 바라 보고 있는 어제, 오늘입니다.

민주 국가, 법치 국가, 정의 사회라는 대한민국 안에서 백주에 한 젊은이가 경찰에 연행된지 수시간 후 시체로 변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여야 하는 오늘의 우리 현실을 한없이 아파하면서, 이제 정신을 가다듬고 각자가 처해 있는 위치에서 과거에 대한 뼈 아픈 반성과 앞으로의 나아갈 길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미사의 제1 독서에서는 야훼 하느님께서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네 아우 아벨은 어디있느냐?" 하고 물으시니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고 잡아떼며 모른다고 대답합니다.창세기의 이 물음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지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 아들, 너희 제자,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탕' 하고 책상을 치자 '억' 하고 쓰러졌으니 나는 모릅니다." "수사관들의 의욕이 좀 지나쳐서 그렇게 되었는데 그까짓 것 가지고 뭘 그러십니까?" "국가를 위해 일을 하다 보면, 실수로 희생될 수도 있는 것 아니오?" "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니 우리는 모르는 일입니다."라고 하면서 잡아떼고 있습니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 (중략)

오늘 이 성전에서 근본적으로 박종철 군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이 정권에 대해 우선 하고 싶은 한마디 말은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느냐?"하는 것입니다. 이번 박종철 군의 참혹한 죽음은 우연한 도발적 사고가 아닙니다. 이번 고문 사건은 지난해 6월에 있었던 천인공노할 부천 경찰서 권 양의 성 고문 사건과 역시 재작년 9월에 있었던 전 민청련 의장 김근태 씨에 대한 경찰의 잔혹한 고문 사건, 이 밖의 연속적으로 일어난 수많은 고문 사례들 중의 하나이며, 다른 한편으로 헤아리기 힘들도록 많은 수의 양심인들이 감옥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발생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하략)


우리는 모두 카인의 후예일지도 모른다. 인류사가 진행된 이래 계속된 전쟁과 투쟁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자는 대개 살인자였을 것이고, 죽은 자가 자손을 남기지 못하는 이상, 세상에 태어난 우리 거의 대부분은 살인자의 후예일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네가 죽인 그 사람은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아벨의 이름은 연속하여 뒤바뀐다. 박종철이었고 그 이전에는 전태일이었고, 그 사이의 수많은 사람들이었으며, 그 이후로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아벨이 있었다.

얼마 전 대구에서 아버지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죽어간 학교 폭력의 희생자 앞에서 우리는 분노했다. 그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온갖 저주와 욕설을 퍼부었다. 그 카인들은 응당 욕을 먹어야 한다. 지당하다. 하지만 ·1987년 1월 26일 김수환 추기경이 물었던 질문에서 우리는 자유로운가. “죽은 친구가 그렇게 괴로워할 줄은 몰랐다.”고 흐느끼던 카인과 우리는 얼마나 다른가. 평생 살아온 터전에 느닷없이 송전탑이 세워지는 것에 반대하다가 두들겨 맞고 몸을 불살라버린 촌로의 아픔을 (며칠 전 일이다), 몇 년 동안 찬바람 맞으면서 농성해도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면서 이제는 피골이 상접하고 죽을 일 밖에는 남지 않았다는 사람들의 흐느낌을, 그 많은 아벨들 앞에서 “우리는 모르는 일입니다.”라고 되뇌는 카인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과연 우리는 "하느님이 두렵지 않은가?"라는 질문에서 자유로운가.


오늘의 역사를 검색하면서 1987년 1월 26일 침착하지만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칼이 돋는 김수환 추기경의 육성을 들었다. 그 칼끝은 4반세기가 흘러도 날카로운지 모르겠다.

 

by 산하 | 2012/01/27 00:52 | 산하의 오역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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