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로그


문제는 구체성이다 by 산하

문제는 구체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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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 지사가 세종 대왕의 리더쉽을 이야기했다. “우리 사회의 주제에 대해 대화를 하지 않는 것은 자기주장을 내려 놓지 않아서 그렇다. 세종대왕 정치는 내려놓으니까 황희를 쓴 것”이며 “헌법을 통해 민주주의가 작동 가능하게 해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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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그의 생각에 상당 부분 동의함을 밝혀 둔다. 나는 우리 사회를 현저하게 망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진영논리라고 생각한다. 어느 진영에든 들지 않으면 불안하고, 일단 진영을 표방한 사람이 다른 진영의 논리와 주장에 동조하는 것은 금기다. 다른 진영에 몸담았던 사람들은 대개 쓰레기에 벽창호고 자신과 다른 진영이라고 생각되는 사람과는 그냥 담을 쌓는다. 더 안된 것은 그 진영이 매우 버라이어티하게 갈라진다는 것이다. 한때 누군가의 당선에 환호한 몇달 뒤 그가 자신이 지지하는 사람에 반한다 싶으면 가차없이 18원 폭탄을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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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상황에서 안희정 지사가 자신의 세자 책봉에 끝까지 반대하다가 귀양간 황희를 등용한 세종의 리더쉽을 얘기하는 것이 일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건 동시에 지나치게 일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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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세종의 리더쉽은 태종이 한 번 땅을 갈아엎은 다음에 뿌려진 씨앗에서 발아한 것이다. 태종 이방원은 우리 역사에서 보기 드문 유능한 냉혈 군주였다. 그는 자신을 헌신적으로 도운 이숙번을 버렸고 이제 이거이 부자를 무력화시켰다. 그건 그렇다고 치는데 정말로 자신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가문의 명운을 걸었던 아내 민씨의 집안을 도륙내 버렸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맏아들을 제치고 세자로 삼은 충녕대군, 즉 세종의 처갓집까지 박살을 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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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이 세조와 다른 점이다. 세조는 자신을 도운 공신들을 지키고 그들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선에서 권력을 행사했지만 태종은 세종의 리더쉽을 위한 방해물을 피도 눈물도 없이 제거했다. 그 기반 위에서 세종은 자신의 역량을 한껏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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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안희정 지사의 현재는 그렇지 못하다. 이숙번, 이제, 이거이에다가 원경왕후 민씨의 4형제들, 세종의 장인인 심씨 가문,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아버지를 위협했던 정도전이나 삼촌 방간까지도 버젓이 살아서 세종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있는 형국 아닌가. 이들 앞에서는 황희 정도는 명함도 못내미는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황희를 등용한 세종의 리더쉽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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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렇다고 치고 넘어가자. 안희정 지사가 세종을 얘기한다면 생각해야 할 건 더 많다. 안희정 지사는 이렇게 얘기했다. “정치지도자는 디테일(세부공약)에 대해 약속을 남발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 (큰 틀의) ‘방향과 가치 그리고 원칙’을 얘기해야합니다. 구체적인 공약은 각 분야의 전문가의 의견을 듣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역시 일면 옳다. 그러나 세종은 방향과 가치 그리고 원칙을 제시한 임금이면서도 매우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던 인물이었다. 공자님 말씀을 내걸고 덕만 쌓은 임금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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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의 국경선을 이루는 압록강 두만강 유역 개척을 위한 사민정책은 깨놓고 말하면 피도 눈물도 없는 정책이었다. 남쪽의 백성들을 강제로 이주시켰고 엄청난 사람이 얼어죽고 굶어죽는 희생을 치러야 했다. 반발도 심했고 반대도 컸지만 세종은 뚝심있게 밀어부쳤다. ‘전문가’로서 김종서를 발탁한 건 세종의 역량이었지만 방향과 가치와 원칙을 제시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강제 이주된 사람들 절반이 얼어죽고 굶어죽어도 세종은 흔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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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하여 세종의 지시는 구체적이고 꼼꼼했다. “백성이 원하는 토지 세법 제도를 만드시오. 우리 조선은 농자천하지대본이오.”에서 그치지 않았다는 뜻이다, 몇 년간의 수확을 통계내어 그 평균 수익을 정해진 비율로 삼아 일정액의 세금을 부과하는 공법(貢法)을 추진하면서 세종 대왕은 이런 영을 내린다. “정부 육조와, 각 관사와 서울 안의 전함(前銜) 각 품관과, 각도의 감사·수령 및 품관으로부터 여염(閭閻)의 세민(細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可否)를 물어서 아뢰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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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서울의 관청은 말할 것도 없고 각 도의 관리들은 물론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공법에 대한 찬반 의견을 물어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형식적으로 “백성들의 뜻을 알아보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무려 5개월간 주관 부서인 호조는 물론 팔도의 수령 방백과 육방 관속들은 무려 17만 명이 넘는 백성들의 ‘낙점’을 받아 보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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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던 노비를 제외하고 여자와 아이들을 뺀다면 그 수는 결코 만만한 수준이 아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동원한 군 병력의 최대치가 17만 명 정도였다는 점, 그리고 19세기 초반의 영국 유권자가 전체 인구 중 20만 명 정도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더욱 그렇다. 즉 15세기에 행해진 일종의 ‘국민투표’였다. 세종의 리더쉽은 결코 추상적이지도 않았고 어렵지도 않았고 가이드라인만 내려 주는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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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세종의 리더쉽이 어느 정도로 단단하게 구체적이었고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했는지에 대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노비 출신이었던 장영실을 궁중으로 불러 들였던 것도 세종이었다. 음악에 능한 박연을 발탁한 이도 세종이었다. 조선 전기의 하늘을 수놓은 은하수같은 집현전 학사들도 결국 세종의 작품이었다. ‘전문가’들을 잘 발탁한 셈이다. 그러나 세종은 그들에게 상당한 재량권을 줬지만 동시에 그들을 경탄케 하는 식견도 보여 주었다. 무엇을 하겠다는 둔탁한 방향은 소중하다. 하지만 항상 문제는 구체적인 ‘어떻게’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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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도 이제는 ‘어떻게’를 보여 줄 때가 됐다. 그 어떻게를 수립하지 못한다면 안희정의 앞길은 그다지 밟지 못할 것이다. 세종 대왕 리더쉽은 단순한 반대자에 대한 ‘선의’의 인정만으로 설명될 일이 아니다. 세종의 위대한 점은 원칙의 천명 뿐 아니라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인물이었다는 데에 있다. 안희정에게도 필요한 일이다. 구체성 없는 원칙만큼 허약한 건 없다. 더구나 세종을 꿈꾼다면 말이다. 아이고 취한다. 에


간만의 기차여행1 부석사를 지나다 by 산하

간만의 길따라 사람따라 1 - 죽령을 지나 부석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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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여행은 오랜만이다. 일요일 아침을 서둘러 깨워 청량리역으로 향했다. 청량리역사 주변 건물에는 유난히 화재 소식이 많았다. 1972년 74년 75년 세 차례나 일어났던 대왕코너 화재를 비롯해서 이후 맘모스 호텔과 롯데 백화점에 이르기까지 화마(火魔)의 방문이 기이할 정도로 잦았던 청량리였다. 땅에도 기운이 있다면 화기(火氣) 충만이리라. 하지만 딴에는 그 화기(?)가 이해가 간다. 오늘날 하늘 공원이 된 난지도의 쓰레기더미의 태반이 바로 연탄이었고 그 연탄의 재료인 석탄이 바로 오늘의 여행 코스가 될 중앙선, 영동선을 타고 쏟아져 들어왔던 곳이 바로 청량리역 아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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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은 중앙선으로 시작했다. 그리 추운 날씨는 아니었던 것 같으나 여직 완전히 풀리지 않은 양평과 용문의 얼음 반 물 반의 한강을 지나 원주로 향했다. 원주 사람들을 만나면 느끼는 거지만 서울 사람들과 거의 구분이 안가는 표준말을 쓴다. 원주에서 첫 목적지인 영주 부석사까지는 ‘영서 관광’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데 이 아저씨도 깍듯한 표준말을 썼다. 가이드와 아저씨의 대화 가운데 치악산 얘기가 나온다 명산이라고. 악산 중에서도 악명 높은 치악산이라 감히 도전할 의사는 없었으되 치악산 얘기가 나오자 딸에게 해 줄 얘기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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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은혜 갚은 까치 이야기 기억나지? 구렁이로부터 새끼를 구해 준 나무꾼이 죽은 구렁이의 아내 구렁이에게 잡아먹힐 위기에 처하자 그를 구하기 위해 종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렸던 이야기 말이야. 그 종이 여기 치악산 상원사에 있던 거란다.” 어릴 때 딸에게 옛날 얘기를 해 줄 때 ‘착한 꿩’이 불쌍하다고 눈물을 글썽였던 기억이 있는데 이젠 커서인지 좀 심드렁하다. “아 그 종에다 머리 박은 꿩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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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는 예나 지금이나 군사 요충지다. 신라 시대부터 북원경으로 중시된 도시고 지금도 군사 도시라고 불리며 군인들의 들고 남이 잦은 곳이다. 6.25 때 원주는 한국 전쟁의 운명을 몇 번 바꿔 놓았다. 개전 초기 원주에 지휘소를 둔 6사단이 춘천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펼치지 못했다면 북한군은 동쪽으로부터 수도권을 죄어들어갔을 것이고 낙동강 방어선이고 뭐고 게임이 끝나 버렸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1.4 후퇴 이후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가 “원주를 점령하면 대구가 눈앞”이라며 12만 대군을 들이밀었을 때에도 원주는 떨어지지 않았다. 당시 미군 지휘관이었던 콜맨 중령에 따르면 “한국전쟁 판 게티스버그 전투”였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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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를 떠난 버스는 금새 충청도 영역에 접어들어 제천 단양을 지난다. 중앙고속도로 길은 과거 경상도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죽령길 코스와 거의 같다. 중부내륙 고속도로가 문경새재 상경길과 거의 일치하듯이. 아마 봉화 사람 삼봉 정도전도 봉화에서 영주로 와서 죽령 넘어 단양 제천 원주 양평 거쳐 경기도로 들어갔을 것이고 단양 현감 했던 퇴계는 지금 내가 달리는 코스로 단양읍에 이르렀을 게다. 소백산맥의 우람한 산세를 바라보다가 차는 문득 끝이 없어 뵈는 죽령 터널로 들어간다. 시속 100킬로미터를 놓고 악셀을 밟아도 한참을 가는 이 국내 최장 터널은 종종 1949년 8월 18일의 죽령 터널 사고를 떠올리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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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타고 달리는 중앙선 죽령 터널도 당시로서는 국내 최장이었다 무려 6킬로미터. 서울에서 안동으로 가던 중앙선 열차가 이 터널 한복판에서 원인 모르게 멈춰 서 버렸다. 석탄을 있는대로 집어삼킨 화차는 꽥꽥 거리며 연기를 토해 냈으나 기차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승객들의 숨을 막아 버렸다. 48명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60여명이 중태에 빠지는 대참사였다. 가족끼리 가는 즐거운 여행 자리에 재수없다는 타박 들을까봐 감히 꺼내지는 못했으나 죽령 터널은 갈 때마다 느끼는 바이지만 너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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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죽령을 넘으면 바로 풍기다. 지금은 영주시에 속해 있지만 풍기는 사연이 많은 고장이다. 우선 고풍 넘치는 소수서원이다. 오늘은 버스 타고 지나칠 수 밖에 없으나 어릴 때 와 본 기억이 남아 있지 않을 딸과 함께 꼭 다시 들러봐야 할 곳이다. 원래 백운동서원이었다가 사액을 받아 소수서원이 됐다는 교과서 이야기 말고 주세붕이라는 사람 이야기를 더 해 주고 싶어서다. 주세붕은 백운동서원을 세운 사람만이 아니라 조선 역사에서 손꼽는 청백리이자 유능한 지방관으로서 더 알려져야 할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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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삼 공납에 시달리던 풍기 주민들을 위해 인삼 재배법을 보급했다는 얘기도 있긴 하지만 무엇보다 그는 백성들의 고통을 제 몸같이 여겼던 보기 드문 관리 중의 하나였다. 지방관을 역임하다가 서울로 복귀한 뒤 황해도가 자연 재해로 쑥밭이 됐을 때 다시 황해도 관찰사로 임명된다. 이때 주세붕같은 이를 또 외직으로 돌리는 것은 아깝다는 주장이 나오자 임금 명종은 이렇게 입을 막아 버린다. “주세붕이 아니면 안되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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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그의 초상화를 검색해서 들여다본다. 한껏 근엄하게 그린 것 같으나 그의 얼굴을 보면 문득 웃음이 나온다. 얼굴이 동글동글해서 그런지 분명 부리부리한 눈매인데 어딘가 장난기가 엿보이고 덥수룩한 수염은 되레 코믹해 보인다. 공자왈 맹자왈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을 유학자지만 그냥 인상만 봐서는 엄숙한 체 하면서 주위 사람들 적잖이 웃기는 익살꾼이었을 것도 같다. 대개 화가는 그 사람의 일상과 인품을 아는 경우가 많았으니 그 필치에는 필시 주세붕의 엉뚱함도 담겨 있었던 게 아닐까. 그가 진행했던 송사 하나를 들춰 보면 그런 느낌이 짙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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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형제 간에 재산 다툼 송사가 벌어져 관가에 왔다. 저마다 언성을 높이며 제몫을 주장하는 형제 앞에서 주세붕은 뜻밖의 명을 내린다. 경상도 함안 사람이니 아마 경상도 말로 했을 것이다. “형은 동생을 업어라. 퍼떡!”  형은 엉겁결에 동생을 업는데 사또는 이내 다른 일에 몰두한다. 아이고 힘들어 형은 사또에게 묻는다. “이제 내려 놓니껴?” 그러나 주세붕은 단호했다. “내가 됐다 할 때까지 업고 있그라.” 한참을 끙끙대던 형에게 주세붕이 말한다. “니가 동생 어릴 때 업고 다닐 때에는 이런 생각 안했을 거 아이가. 동생 니는 형한테 업혀 다닐 때에는 이런 일 꿈에도 상상 안했을 거 아니가.” 형제는 화해하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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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하고 보니 주세붕의 초상이 입을 열어 “니 내를 뭘로 보고.. ”하며 뭐라 하실 거 같아 급히 검색창을 닫는다. 버스는 부석면으로 접어들었다. 부석(浮石) 뜰 부, 돌 석. 같은 지명의 이름이 충남 서산에도 있다 서산의 부석은 바다 물살이 워낙 세서 집채만한 바위도 공깃돌처럼 쓸려나간다고 해서 부석이지만 여기 부석은 잘 알다시피 공중에 붕 뜬(?) 부석이다.

딸 아이도 의상과 그를 사모한 당나라 처녀 선묘의 이야기는 알고 있었다. 의상이 절을 세우려 하자 토착민들이 반발했고 이에 용이 된 선묘가 바위를 띄워 그들을 깔아뭉개겠노라 위협하여 굴복시킨 이야기도 잘 알고 있었다. 의상과 선묘 이야기를 하면서 헥헥대며 가파른 계단을 오르고 보니 오랜만에 대하는 안양루와 무량수전의 고풍스런 자태가 눈에 들어왔다. 딸에게 말했다. “자 이제 뒤로 돌아라. 그리고 멀리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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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에 들를 때마다 나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태백과 소백이 갈라지는 자리에 들어앉은 부석사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산들의 파도는 항상 마음의 폭과 깊이를 넓히고 파낸다. 색깔로 구분되는 산줄기들은 해일이 돼서 부석사 안양루까지 들이닥칠듯 넘실대고 바다 안개같은 구름들 사이로 설핏설핏 그 마루들을 드러낸다. 가히 토착민들이 절 못짓는다고 개길만한 명당이고 선묘가 죽은 다음에도 현세에 나타나 의상을 도울만큼 가치 있는 절터랄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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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사진을 찍어대는 딸에게 이야기해 줄 옛 사람 두 명이 떠올랐다. 아마 둘 다 이 자리에 올랐음직한 사람이고 기억할만한 행적을 남긴 고려의 태동기와 막바지의 인물 궁예와 공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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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영화를 들여다보며 - 진짜 진짜 잼나네 by 산하

가끔 케이블 TV에서 해 주는 70년대 한국 영화들을 무슨 '사료' 보듯 꼼꼼히 들여다볼 때가 있다. 이덕화 머리가 자연산이던 시절, 임예진과 함께 나오는 '진짜 진짜 잊지마'를 보고 있는데 이덕화가 임예진 집에 인사를 가는 장면에서 피아노가 갖춰진 당시로서는 꽤 사는 집의 거실에 태극기가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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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예진의 아버지는 "6.25때 중대장으로 월남전에도 참전하셨고 5년 전에 예편하셨고 군인 정신에 투철한 분"인데 어디 지점장인데 딸의 친구를 만나서는 '차렷'을 외치며 교련을 배우고 있겠지? 하면서 '부동자세'의 의미를 묻고 이덕화는 또렷하게 답한다. 어 그런데 그 답변이 기억난다. 나도 배웠다. " "차려 자세는 군인의 기본 자세이다. 고로 내로는 군인정신이 충일하고 외로는 항상 엄숙단정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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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화가 이 답변을 기운차게 읊자 배우 문오장씨로 추정되는 임예진의 아버지역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한다. "장차 국가의 든든한 간성이 되겠군, 됐어! 내 집 출입을 허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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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트 가는 기차 안 바깥 풍경... 산은 녹색이긴 한데 민둥산을 갓 벗어났다. 남학생과 여학생이 (이덕화 임예진이 아닌.... 다른) 데이트하러 바다 위에서 보트 타다가 그만 사고로 익사했는데 이걸 학부모들은 아이들이 품행이 방정치 못하게 만든 교육의 문제이며 교사 사표 받으라고 아우성을 친다. 교장선생은 "우리도 학생들의 품행을 감시하고 있었는데...."하며 변명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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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보는데 갑자기 세제 광고가 좍쫙좍 소리를 내며 튀어나온다 순간 21세기로 돌아왔다 . 참 정말 압축적인 시간을 통과해 왔구나. 우리 나라는...... 그 직전에 학생주임 같은 사람에게 이덕화가 연애 사실을 들켰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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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지만 해도 성우 더빙에는 말 끝이 올라가는 오늘날의 북한 아아나운서같은 톤이 좀 살아 있다. 여고생들도 참여하는 분열이 벌어지고 아우.... 국기에 대한 맹세....... 여고생들도 저런 제식 훈련을 했었구나. 이어지는 목총 든 남고생들의 행진. 여학생들은 붕대 감고 들것 나르는 훈련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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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트 중 익사한 반 학생 문제로 사퇴 압박을 받을 때 단호히 거부한 여자 담임 선생님의 훈화 " 남자에게는 사회에 기여할 의무가 있어요.. 제군들이 민족을 사랑할 인재로 성장할 때 나라의 미래가 밝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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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영수가 이사를 간다........ 엇 정아의 고백 "이사 가지마. 우리 집에서 함께 살아." 쥐잡아먹은 듯 루즈칠을 한 임예진이 우는데 집에는 변변히 눈물 닦아 줄 수건이 없다. 이덕화가 수건 냄새 맡고는 던져 버리고 (으이 땀냄새) 루즈를 칠한 이유를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서."라고 말하는 임예진. 그런데 70년대 여학생들은 저런 빵모자를 썼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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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의 연애 문제는 처벌하는 게 시중을 들어서라도 선도해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 문제에 있어서 저는 여성이기 이전에 교사입니다. 부모님들이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해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또 등장하는 여자 담임 선생님. 아마 70년대에는 저 말만 해도 꽤나 래디컬(?)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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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의 패싸움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곤경에 처했던 이덕화를 보고자 여고생이 남고 교문에 들어서자 1년 전방에서 휴가 못나온 군바리들처럼 온 남학생들이 창문에 붙어 환호한다. 감옥에 갇힌 죄수들처럼. 트럭에 실린 군바리들처럼. 이덕화는 달려나와 임예진의 손을 붙잡고 운동장을 달린다. 어쩌면 저게 그 시대 저 청춘의 영화 <졸업>의 마지막 장면이었는지도 모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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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이 목포였다. 참 예쁜 곳이라 생각했는데..... 영산포 역이 나오길래 나주 어딘가 했더니. 그럼 저 오목조목한 산은 유달산이겠구나. 그런데 왜 전원이 서울말을 쓰고 있는 거냐.


윤용 교수의 추억 by 산하

윤용의 추억 

학창시절 정경대학 신방과에는 윤용 교수라는 양반이 있었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손자래나 조카래나 하여간 그걸 대단한 프라이드로 가진 양반이었고, 당시 교수들로서는 보기 드물게 학생들의 주장에 적극 동조하고 나아가 그에 합류하는 '행동하는 지식인'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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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현민 유진오 전 총장이 별세했을 때 학교 안에 분향소 설치를 반대했던 5명의 교수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고요. 이모 전 총장이 무리한 연임을 기도했을 때, 학생들과 함께 본관 앞에 드러누웠던을 뿐 아니라 항의 표시로 머리를 박박 깎아버리실 정도의 열혈한이었습니다. 그게 다냐구요? 설마요. 한 번은 친구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유인물 하나를 들고 보여 주더군요. 윤용 교수 수업 시간에 받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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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87년 대통령 선거 개표함을 두고 대치하다가 강제진압된 구로구청에서 70명이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유인물을 손수 찍어 일일이 나눠 줬다는 겁니다. 유인물을 당신의 돈으로 찍어 수업 시간에 배포하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구로구청 사망자 70명설은 썰 많고 헛소문 흔하던 학생운동진영에서도 그리 진지하게 받아들일 얘기는 아니었습니다. 

이런 전국적으로 보기 드문 정의파에 조국의 민주화에 관심이 지대한 ‘애국 교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학생들로부터 그렇게 존경을 받은 편은 못되었습니다. 좋게 말하면 외로운 돈키호테였지만... 나쁘게 말하면 음... 굳이 얘기하지는 않겠습니다만..... ‘또’ 라는 단어로 시작하는 단어로 많이 불렸습니다. 행동은 뜨겁고 거침이 없는데 그분의 행동에 수반되어야 할 철학이라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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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통계학과 친구 녀석이 절 부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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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대리출석 좀 해 줄래? 나 2시에 미팅이거든.”
“맨입에는 안된다. 띠발노마..... 너는 미팅가고 나는 대출하라고?” 
“저녁 사줄게” 
“라면 안먹어.” 
“고기 사줄게.”
“무슨 수업이냐”
“윤용 교수 매스컴론, 정경대 5층 대강의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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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이런 수작이 오고 간 뒤 저는 난생 처음으로 윤용 교수님을 뵈러 갔지요. 학원민주화 싸움 뒤 .삭발한 머리는 여지없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수업 시작..... 그 분이 강단에 오르시지는 않고 갑자기 빼곡히 들어찬 아이들에게 유인물을 나눠 주시네요. 이게 뭐야 이게 뭐야 무슨 페이퍼쯤 되나 싶어서 아이들은 우우 몰려들어서 가져갑니다. 이런 데만큼은 동작 기차게 빠른 저는 이미 한 장을 손에 넣었습니다. 그건....... 윤용 교수의 자작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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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양키야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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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 맞은 듯이 멍한 눈길로 교수님을 올려다보는데 교수님이 눈을 지그시 감으시더니 한 손을 머리에 얹으십니다. 그리고 비분강개의 어조로 시를 읽어 나가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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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아아앙키야 가아아아아라.... 네 나아아라로 가아라.... 네 정액같은 코 카 콜 라와 해액무기를 가지고..... "

한동안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얼음물을 끼얹은 듯한 강의실의 맨앞에서 교수님은 자아도취에 빠져서는 자작시를 암송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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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키는 가라~!!~~`양키는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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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마지막 소절이었던 모양인데.... 그때 한구석에서 큭큭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습니다. 저 있는 쪽이었는데 절대로 저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끝내 그 녀석이 책상에 엎어지면서 웃기 시작하면서 불경스럽게도 강의실은 폭소의 도가니로 화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미제의 각을 뜨자던 아이들까지 데굴데굴 구르면서 웃었습니다. 어찌나 웃었는지... 그날 수업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마 시 읽은 다음 바로 수업 종료였던가.. 하여간 그렇게 길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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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 교수님은 간혹 강의실 성명서를 통해 대단한 반미의식을 선보이셨습니다. 코카콜라 불매운동을 벌여야 한다는둥,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저 양반 미국서 공부할때 어지간히 데었나보다 농담을 나눌 정도였지요. 그때 성명서 중에 그런 구절이 있었던 걸로 기억납니다. "미국은 만악의 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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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로부터 한 십 삼년 정도 지났나? 윤용 교수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그 목소리를 드높이고 있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될 당시인데 온갖 헛소문과 3류소설과 반 김대중 노무현 감정으로 거의 미쳐 버린 듯한 사이트, MBC PD의 양심선언 ("MBC는 전라도 향우회입니다!!라는 '염병')부터 유명한 국정원 직원의 양심선언까지 없는 사이트, 일베의 할아버지격이라 할 '부패추방연대' (약칭 부추연)의 대표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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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90년대 초반에 학교에서 쫓겨난 뒤 (신방과 학생회가 억지춘향으로 윤용 교수님 해직 반대한다는 플래카드를 내걸긴 했지만 그 누구도 앞장서서 윤용 교수님의 복직을 외치진 않았답니다.) 국회의원 한 번 나와서 윤봉길 의사의 후예이며 나 같은 사람이 국회의원 해야 한다고 을 줄기차게 외쳐대다가 낙선한 뒤엔...... 소식을 모르겠더니 뜻밖에 그런 부추장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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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또 15년 정도가 흘렀는데 이분이 이른바 태극기 집회 (태극기를 존중하는 저로서는 아주 욕이 나옵니다. 왜 저런 저질들에게 태극기가 더럽혀져야 하는지)에 나와서 이러고 계시는군요. “ 지금 군대가 나와야 한다..드르르르륵~~!! 죽이자. 죽일 놈들은 죽이자. 군대가 나와서 죽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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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시위에 나서는 사람들을 이해합니다. 어린 시절 전쟁을 겪거나 그 포성의 여운 속에 살았고 그 전쟁이 언제 다시 일어나서 어린 날의 공포가 재림할 줄 모른다는 불안 속에 평생을 보냈고 실제로 당시 군대에서는 졸다가 북한측 특공대 칼에 목이 잘리는 일도 흔하게 일어났었고 (남측도 마찬가지로 북한에 가서 그 일을 했고) 남산 터널이 방공호를 겸하고 광화문에는 화단진지가 놓이는 세상에서 좋은 날 다 보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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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악으로 깡으로 일해서 꿀꿀이죽 먹던 나라를 어쨌든 번듯한 반열에 올려 놓았노라는 자긍심만큼은 버릴 수가 없기도 하겠죠. 그 자긍심은 박정희 정도에 투영돼서 신화가 되고 종교가 되고 그를 모독하거나 거역하는 건 신성모독 이상으로 반응하게 되는 거겠죠. 이 공포와 자긍과 신앙이 어우러진 삼위일체를 어떻게 깨겠습니까. 

그런데 그 자리에 한때 공포가 허위라고 외치고 민주화의 역사에 자긍을 느끼고 역사의 진보를 신앙했던 이들, 전 경기도지사 김문수나 좀 경우는 다르지만 윤용 교수 같은 양반들이 와서 설치는 걸 보면 좀 다른 생각이 듭니다. 아니 다짐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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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서 저 사람들만큼 떠들고 다니거나 설친 것도 없지만 적어도 늙어서도 저렇게 추물이 되지는 말자는. 그냥 약이라도 가지고 다니다가 내가 손가락이 길어지거나 송곳니가 돋거나 털이 숭숭 덮이는 조짐이 오면 그냥 콱 먹고 죽어버리자는 다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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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 출마에 즈음하여 by 산하

안희정 출마 선언과 멕시코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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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멕시코 올림픽은 사연이 많았다. 세계의 내로라 하는 선수들이 멕시코 고원에 집결했다. 인간이 100미터 경주에서 10초 벽을 땐 것도, 고지대였던지라 공기 저항이 별로 없어서 그랬는지 넓이뛰기에서 기존 기록보다 무려 55센티미터나 더 나간 8미터 90센티미터라는 경이적인 기록이 등장한 것도 이 올림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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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멕시코 올림픽에 출전한 스타 가운데 가장 관심을 끈 사람은 역시 이디오피아의 마라토너 비킬라 아베베였다.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챙겼고 1964년 동경 올림픽에서는 맹장 수술이라는 치명적 핸디캡을 극복하고 마라톤 2연패를 기록하면서 동경 올림픽 조직위원회를 패닉으로 몰아넣었던 (“아베베가 우승 못할 줄 알고 이디오피아 국가(國歌)를 준비하지 않았고 일본 국가를 틀었다.....) 불세출의 마라토너 아베베가 세 번째 올림픽을 위해 멕시코에 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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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는 내 조국과 같은 고원 지대다.” 아베베는 자신만만했다. 무릎 부상 소식이 있었으나 그는 20킬로미터를 거뜬히 달리며 건강 회복을 과시했다. “두고 보시오. 이번에도 금메달은 내 것이니까.” 로마 올림픽 당시에는 일등병 계급이었으나 금메달을 딴 후 하사로 승진했고 이후 파격 승진을 거듭, 멕시코 당시에는 중위였던 서른 여섯 살 관록의 마라토너는 출전한 모든 나라의 마라토너의 최우선 경계 대상이었다. 아베베만 잡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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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경기가 시작됐다. 아베베는 기운차게 달려 나갔다. 3연패를 향한 기세가 대단했다. 초반에 벌어지면 따라잡기 어렵다! 아베베를 잡아라. 다른 선수들 역시 페이스를 높였다. 헌데 그렇게 선두 그룹을 유지하며 달리던 아베베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눈을 의심케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17킬로미터 지점에서 별안간 아베베가 코스에서 벗어나 버린 것이다. 기권이었다. 올림픽 3연패를 자신하고 누구나 그 가능성을 의심하지 않던 우승후보 아베베의 레이스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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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을 달리는 선수들이나 중계방송하던 사람들이나 연도에 늘어선 관중들이나 경악을 금치 못하는 상황, 바로 그때 역시 이디오피아의 젊은 선수 마모 윌데가 치고 나왔다. 아베베에 정신을 못차리고 있던 다른 경쟁자들을 압도한 윌데는 기운차게 멕시코시티의 아스팔트를 박찼고 마침내 이디오피아에 마라톤 3연패를 안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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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데가 영광을 돌린 사람은 비킬라 아베베였다. 알고보니 아베베의 무릎 부상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아니라 치명적인 골절상이었다. 그는 이를 숨기고 출전했고 후배의 페이스메이커를 자임했으며 상대방 선수들의 기운까지 빼 버려 윌데의 우승을 뒷받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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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에 드리우는 국가주의를 예찬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아베베는 한국의 손기정만큼이나 극적인 역사적 승부의 주인공이요 국가적 영웅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이디오피아를 침공한 이탈리아군에 맞섰던 이디오피아 군의 일원이었다. 그 아들인 일개 이디오피아 일등병이 한때의침략국의 수도의 가도를 맨발로 달리며 개선문을 통과한 ‘정복자’가 되는 모습은 실로 드라마틱한 순간이었다. 셀라시에 황제가 왕관을 벗어 씌워 줄 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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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맹장 수술을 딛고 극한의 승부를 펼쳐 또 한 번의 우승을 거머쥔 아베베는 비단 이디오피아 뿐 아니라 전 세계 스포츠 선수들의 영웅이었다. 훈련 때, 극한의 상황에 처할 때마다 “아베베!”를 부르짖으며 이겨냈다는 선수도 있었다. 한마디로 거물이었다. 그런 그가 후배의 페이스메이커로 나섰고 골절상을 입은 다리를 딛고 후배 마모 윌데의 우승까지도 이끌어냈다는 것은 매우 놀랍고 범상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아베베는 그걸 했다. 그를 통해 일궈낸 이디오피아 남자 마라톤 3연패의 기록은 아직 깨지지 않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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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많이는 알려지지 않은 멕시코 올림픽의 비화 하나 더. 아베베가 달리고 윌데가 우승한 마라톤에 출전한 선수 가운데 탄자니아의 아크와리가 있었다. 그는 애당초 메달권에서 벗어났고 다른 선수들이 다 레이스를 마친 뒤에도 거리에 있었다. 관중들 태반이 자리를 뜨고 경기장 분위기도 어수선할 무렵 갑자기 장내 아나운서의 힘차면서도 떨려 나오는 목소리가 사람들의 귀를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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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라톤 경주의 마지막 주자가 지금 골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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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와리는 경기 중 부상으로 붕대를 감고 있었고 붕대에서는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절뚝거리면서도 그는 마지막 골인 지점을 향해 악착같이 뛰었다. 마침내 아크와리가 결승점을 통과한 순간 남아 있던 관중들과 경기 진행 요원들과 기자들은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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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게 겨워 아크와리를 찾은 기자들은 앞을 다투어 아크와리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런 의지를 발휘할 수 있었습니까?” 그때 아크와리의 대답은 스포츠 역사에 길이 남을 명답이었다. “탄자니아는 나더러 참가만 하라고 지구 반바퀴 돌아야 하는 이곳에 보낸 게 아니라고요. 완주하라고 보낸 거라고요. 포기하지 말라고 보냈단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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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는 스포츠일 뿐이지만 동시에 스포츠에 그칠 수 없는 이유는 가장 정직하게 인간의 욕망과 의지가 발현되는 장이며 인간의 미덕과 악덕이 그럴 수 없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무대이기 때문이다. 올림픽 3연패를 노리는 마라톤의 영웅이 천연덕스럽게 자신의 우승을 장담하는 한켠으로 후배를 은밀히 불러 “내가 네 페이스메이커가 되겠다. 내가 쓰러지면 네가 치고 나와라.”고 굳은 악수를 내밀고, 골절상을 입은 다리로 후배를 위해 악으로 깡으로 다른 선수들 진을 빼기 위해 달리기도 하고, “참여에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경기를 완주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발이 지축을 박찰 때마다 피가 뭉근하게 배어나는 부상을 딛고 달리기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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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전에 열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를 ‘구태여’ 회고하게 된 배경은 오늘 안희정 지사의 대통령 선거 출마 선언이다. 오랫 동안 그는 ‘페이스메이커’로 불렸다. 사람 속이야 알 수 없으니 그가 그 호칭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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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에사 본인이 이를 부정하고 이미 본인도 금메달을 노리는 출전 선수라고 선언한 마당이지만 어떤 이들은 아직도 페이스메이커라는 생각을 거두지 않는다. 아베베를 위한 마모 윌데라는 얘기다. 그러나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듯 페이스메이커란 상황에 따라, 경우에 따라, 가능성에 따라 바뀔 수 있고, 또 바뀌어야 한다. ‘마라톤 2연패의 관록’이나 ‘세계인의 우상’ 의 이름값에 연연하지 않고 아베베가 윌데의 승리를 위해 페이스메이커로 나선 이유다. (아베베가 윌데에게 양보하라는 얘기냐?고 발끈하실 분들은 안계시리라 믿는다. 그런 얘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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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모든 경기는 참가에 ‘의의’가 있지만 참여가 ‘목적’이어서는 곤란하다. 경기는 이기기 위해 하는 것이고, 안희정 지사는 아크와리처럼 무슨 난관이 닥치든, 무릎에 붕대를 감든 뼈가 부러지든 ‘페이스메이커’를 넘어서 결승점까지 달음박질칠 능력과 의지가 있음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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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모양인데 나를 지지한 사람들이 페이스메이커나 하라고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자신있게 본인이 얘기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 지지자들이 “모르는 모양인데 안희정을 페이스메이커나 하라고 내가 지지하는 게 아니야. 그는 이런 사람이라고!”라고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는 여건과 수준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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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멕시코 올림픽은 참으로 사연이 많았다. 올림픽개최에 반대하는 학생들 수백명을 학살한 틀라텔로코 참사 열흘 뒤 개막의 팡파르를 울렸고 IOC가 인종차별 국가 남아공과 로디지아의 참여를 거부했지만 정작 올림픽 시상대에서의 인종 차별 반대 시위를 한 이들은 선수촌에서 추방당했다. (메달은 빼앗지 않았다지만) 그러나 검은 장갑을 낀 손을 치켜드는 동료 메달리스트들의 행동의 의미를 깨닫고 자신도 인종차별 반대 배지를 달았고 그로 인해 말못할 고난을 겪었던 백인 은메달리스트 피너 노먼처럼, 그리고 아베베, 윌데, 아크와리처럼 인간의 가치와 품격을 드러내는 이들도 그 역사를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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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우리가 이러려고 대한민국 국민을 했나 자괴감으로 충만한 2017년 한국.....에서도 그런 울림이 퍼져나기를 바라 본다. 안희정 지사의 대통령 출마 선언을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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