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계의 무덤

지난 4년 내내 나는 “핑계 없는 무덤 없다”는 속담의 절묘함에 거듭 감탄해 왔다. 북어와 마누라는 사흘에 한 번씩 두들겨야 한다는 신조(?)로 날이면 날마다 뼈가 부러지고 살이 멍드는 밤을 연출하는 폭력 남편부터 제 자식을 앵벌이 시켜 벌어온 돈 가지고 피시방에서 날을 지새우는 아버지까지, 정상적인 사고의 범위에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선보이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 나름의 핑계가 없었던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마누라가 새벽 세 시에 술이 취해서, 외간 남자 차타고 돌아와서는 집 앞에서 빠이빠이~~하는 걸 보면 PD님은 눈 안 뒤집히겠습니까.” 열변을 토하는 폭력 남편의 핑계는 짐짓 그럴싸했다.  가슴을 치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남편이란 인간이 몇 년째 백수 생활을 하며 술이나 퍼먹는 재주만 길러서 아내가 식당 일을 나가며 근근이 일상을 꾸리고 있으며, 새벽에 외간 남자의 차를 타고 귀가한 진상이란 식당 회식 날, 식당 사장님이 아줌마들 집에 일일이 태워 주었던 것에 대한 트집이었다는 걸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지적장애자를 데리고 소처럼 일을 시키고 월급을 주기는커녕 수급비까지 챙기고 있었던 주인은 왜 월급 한 푼 주지 않고 수급비까지 가로채느냐는 질문에 ‘가족같이 지내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댔다. 고용인이 아니라 가족이니, 그 수급비도 가족이 함께 쓰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을 부려 온 사람에게 먹여 온 개밥만도 못한 식사와, 썩어가는 냄새 등천하는 숙소 앞에서 그 핑계는 처참하게 낯을 잃었다.    


부모를 상대로 폭행을 일삼아 온 패륜아 경우는 조금 더 맹랑하다. 바깥에서는 자기가 제일 존경하는 인물로 아버지를 꼽던 이 이중생활자는 내가 그러는 걸 당신들이 봤냐며 대들었다. 머리가 천정에 닿도록 뛰며 억울함을 호소하기에 우리가 확보한 영상을 들이밀었더니 다음 반응은 이랬다.  “이건 내가 아니에요.”  그리고는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내가 이렇게 된 건 부모님 탓이에요”라는 새로운 핑계로 우리를 경악시켰다.  또 자신의 행동이 결국 부모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불러들였다는 사실은 깡그리 차치하고서 왜 당신들이 남의 가정사에 끼어드냐며 언성을 높였다. 그런 다음에는 우리를 고발하겠다고 분연히 일어서서 좌중을 놀라게 했었다.    


핑계란 것이 그렇다.  핑계를 대는 사람 입장에서는 지극히 그럴싸하고 누구나 믿어 줄 것 같지만 조금이라도 객관적인 입장에서 지켜보자면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유리 가면에 불과한 것이다.  바보스러운 건지 뻔뻔스러운 건지 알 길은 없지만, 투명한 유리 가면을 귀에  걸어 그 주근깨투성이 얼굴과 뻐드렁니가 선연히 드러나 보이는데도 ‘영구 없다’를 부르짖는 ‘영구’들은 적지 않았다. 그런데 이 어설픈 영구 흉내가 폭력 남편 등 ‘상식의 범위에서 벗어난’ 인사들의 전유물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내로라 명함을 지닌 분들의 행동 패턴으로 전용될 때, 또 한 번의 아연실색을 경험하게 된다.    


연예인 김제동씨가 긴급하게 MC 자리를 내놓아야 한 데 대한 핑계로 '식상함‘이 들먹여졌다.  26년 한 프로그램의 MC로 지내왔던 허참씨도 날아가는 판인데 그 정도면 오래 했다는 핑계도 덧붙여졌다.  그럴싸하다. 하지만 이번 국정 감사 때 안형환 의원이 “정치적 좌우 논란을 일으킨 연예인을 제작진이 감당할 수는 없는 거 아니냐?”라고 질문한 데 대해 고개를 끄덕여 주심으로서 그만 그 뻐드렁니가 드러나고 말았다.  자신의 잘못과 처지는 쏙 뺀 체 새벽 3시와 외간 남자 등 몇 개의 단어만으로 두들겨 맞을 죄를 구성했던 남편의 팔뚝질처럼.


‘백분 토론’ 손석희씨의 하차에 대한 핑계는 ‘고비용’이었다.  7년여 동안 무리와 물의 없이 토론 프로그램을 이끌어 왔으며 언론인의 롤 모델로 즐겨 선정되던 MC가 그나마 2년 간 동결되었던 MC료 때문에 자리를 내놓아야 할 만큼 해당 방송사의 경영 사정이 어려워 진 것일까.


어떤 분은 방송에다 대고 “출연료 좀 깎지 그래요.”라고 충고(?)까지 하시던데 MC료 때문에 그 자리를 비워야 한다는 ‘핑계’ 말고 조금 더 그럴 듯한 사연을 만들어내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가족이니까 월급은 물론 수급비도 같이 써야 된다고 우기면서 개밥에 쓰레기집을 제공했던 촌로들보다는 세련된 핑계를 제시하는 것이 서로의 체면에 좋지 않았을까.  


법질서를 수호하느라 험한 일 궂은 일 가리지 않아서인지는 모르나 경찰의·총수께서 시전하시는 핑계의 내공도 만만치 않았다.  시위 진압을 지휘하면서 “인도에 있는 것들까지 다 소탕하라”는 명령을 서슴없이 내리고,  그들은 ‘잔당’으로 규정하는 감동적인 용기의 발산이 고스란히 담긴 녹취록 앞에서 경찰청장님의 1차적인 대응은 “내 목소리가 아니다”였다고 한다.  


오호라 경찰청에도 가게무샤가 있었던가.  그래서 위험한 시위 현장에는 경찰청장님을 대신하여 출동하고 무전기에 악 쓰는 누군가가 존재한단 말인가. 설사 그래도 그렇지.  대한민국 12만 경찰의 총수께서 어찌 변두리 동네 골방에서 부모 속 뜯어먹고 사는 패륜아와 동일한 수준의 핑계를 끌어대실 수 있단 말인가.  점입가경의 핑계 릴레이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최종 주자이자 화룡점정의 점박이는 자전가로 출퇴근하시기로 유명한 건각 유인촌 장관님이다.  


국경없는 기자회가 대한민국의 언론의 자유를 가나보다 못한 69위로 낙제점을 매겼을 때 왕년에 그보다 훨씬 높은 순위에도 언론 자유가 숨넘어간다고 소동을 벌였던 조중동은 무안해서인지 뻔뻔스러워서인지 고요히 침묵을 지킨 반면 장관님께선 “국경없는 기자회에 항의하겠다.”고 기염을 토하신 것이다.  1인 시위를 벌이는 학부모에게 “세뇌되셨네,”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던 교양과 “찍지마 XX"을 서슴없이 내지르던 결기가 뭉쳤으니 국경없는 기자회여 삼가 두려워할지라.   엄마 두들겨 패고 살던 패륜아가 나를 고발하겠다며 으름장을 놓던 때의 그 황당함에는 갖다 댈 것도 아닌 저 분기탱천을 뉘라서 감당할 수 있으랴.  


“백주의 테러는 테러가 아닌” 시절부터 “탁 치니 억”하고 사람이 죽었다는 해외토픽을 거쳐 “자연의 일부인 땅을 사랑해서” 부동산을 사들였다는 연애담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람들은 정말로 ‘말 같지도 않은’ 핑계의 홍수 속에 살아왔다.  거기에 ‘식상하고 고비용’이라는 핑계 이하의 핑계로 프로그램을 훌륭히 이끌어온 방송인들의 자리가 하루아침에 날아가는 광경을 보태게 되었다.

그리고 경찰청장은 경찰 조직의 녹취록 속 본인의 육성을 이건 내가 아니라고 부르짖었고, 정권 바뀐 지 2년 만에 스물 두 계단이나 굴러 떨어진 언론 자유 순위에 대해서는 핑계조차 댈 것도 없이 “항의하겠다.”고 장관이 뻗대는 가관 또한 감상하게 되었다.  뭐 대략 이 지점만 와도 “내게 그런 핑계 대지 마 입장 바꿔 생각을 해 봐. 네가 만약 나라면 넌 믿을 수 있니?”라고 옛 노래가 절로 흘러나오겠거니와, 지난 목요일 오후 나는 더 이상 할 말도 없고 범접하고 싶은 핑계의 절정 고수의 초식에 기함을 하고 말았다.


국회의원들이 대리 투표한 것도 인정되고, 법안 표결 전 적법한 절차를 밟지 않은 것도 맞고, 분명히 헌법 기관인 국회의원의 의사 결정권을 침해당한 것도 분명한데, 그 엉망진창밭을 통과한 법안은 유효하다는 헌법 재판소의 선언이 그것이다.   그럴싸해 보이지만 속이 뻔히 보이는 핑계를 대는 정도의 하수들은 꿇어 엎드릴 것이고, 전혀 그럴 법 하지도 않은 핑계를 대며 기를 쓰고 우겨대는 부류들도 경배하며 찬양할 터이며, 이건 내가 아니라고 부르짖은 경찰청장님은 “목소리는 내가 맞는데 하여간 나는 아니었다.”고 당당히 말하지 못하였음을 머리 쥐어 뜯으며 한탄하리라.


  자신들의 결론을 합리화하기 위한 핑계를 동원하기는커녕 그 결론에 이르는 과정이 어떻게 법적 절차에 어긋나는지를 조목조목 밝혀 주신 후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안은 유효하다고 결론 내린, 실로 거룩하기까지 한 ‘헌법 재판’ 앞에서 나는 넋과 기운과 할 말을 트리플로 잃는다.  차라리 “야당 의원들이 투표방해를 했으니” 원인 무효라든가, 하다못해 “대리투표를 한 자의 지문을 모니터에서 찾을 길이 없다”라든가, 정히 안되면 모든 걸 다 거부하고 “이건 헌재가 할 일이 아니라”고 파업을 해 버리는 것이 나았으리라.


  어떻게 법을 밥벌이삼아 평생을 지내 왔고, 그 중에서도 관록과 능력을 인정받아 헌법 재판관으로 뽑힌 이들의 입에서 “과정은 불법이지만 결과는 유효하다”는 말 아닌 말이 엄숙하게 흘러나올 수 있단 말인가.  핑계없는 무덤은 없다지만 이들의 핑계를 받아 줄 무덤은 과연 있을까.  
    

by 산하 | 2009/11/02 18:12 | 썸데이서울 - 이런저런 얘기들 | 트랙백(2) | 핑백(1) | 덧글(27)

주눅들지 말라 최선을 다하라

1983년. 나는 한강의 기적을 이뤘네 어쩌네 하는 영어 교과서 ‘아티클’을 보면서 영어 단어 miracle을 암기하던 중학생이었다. 잘 살아 보세의 물결을 따라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 길도 넓혀서 ‘중진국’을 넘어선 선진국 국민은 이래야 한다고 ‘선진 국민의 기본 자세’를 암기하여 교장 선생님을 흡족케 하던 시절이었다. 동시에 한국 축구팀이 세계 수준의 대회에서 8강 이상의 성적을 올린다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어나길 바라렴” 하는 악담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나날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티브이 앞으로 집결했다가 역시나 하며 자리를 박차기를 반복하고 있던 세월이었다. 세계의 벽이 높은지 낮은지 댈 것도 없이 아시아의 벽조차 안나푸르나였다.


 그러던 차에 한국 축구팀이 비록 청소년 대표일망정. ,그리고 북한이 출장금지를 당한 어부지리로 얻은 대타 출전이었을망정 오랜 숙적 호주와, 세상에나 개최국 멕시코 (이 경기도 정말 명승부였다)를 메다꽂고 당당 8강에 진출했다는 사실은 실로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북한의 월드컵 8강이 얼마나 부러웠던가. 가마모도가 이끈 일본의 올림픽 동메달이 얼마나 배 아팠던가. 8강전의 상대는 남미의 강호 우루과이였다. 우루과이가 어디라고 우리가 감히 어깨를 나란히 할 존재였던가, 7년 뒤 월드컵에서 우루과이 뿐 아니라 세계적인 스타로 이름 드높을 루벤 소사도 바로 그 팀에서 뛰고 있었다. 



  월드컵 첫 우승국에 빛나고, 자타공인의 축구의 나라 브라질이 우승컵 한 번 쥐어 보겠다고 자국에서 개최했던 1950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보기 좋게 역전승을 거두어, 마라카나 경기장을 가득 메웠던 20만 관중을 통곡하게 만들었던 ‘브라질의 호적수’ 우루과이 대 아시아의 자칭 호랑이 한국 


 
이 운명의 경기가 벌어진 것은 기독교인들이 주일이라 부르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우리 아들까지로 치면 5대째 기독교를 신봉하고 있는 집안이고, 나름 주일 성수를 하고 있었던지라 나는 대망의 8강전을 놓치게 될까 다소 조마조마하고 있었다. 아침 먹다가 오늘 교회는 가는 거지요? 라고 조심스럽게 여쭈었을 때 아버지의 대답은 실로 명료하고 핵심을 관통하는 한 마디였다. “오늘 축구하는 날이잖아.” 그럼요 야구하는 날은 아니죠.


 후일 로봇 축구라는 비아냥을 듣긴 했지만 박종환 감독이 이끄는 한국 청소년 대표팀의 패스웍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뻥 축구와 어거지 골에 익숙해 있던 내 눈에 이건 기존의 한국팀이 아니라 어디 실미도 쯤에서 특수훈련을 받고 나온 특공대로 보였다. 전반전이 얼마간 흘러가면서 우루과이 선수들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것이 내 눈에도 보였고 한국 선수들의 몸에 넘치는 자신감이 화면을 가득 적시고 있었다. 그건 수십 년 동안 주눅 든 한국 축구에 질릴 대로 질리면서도 익숙할 대로 익숙했던 우리 아버지한테도 전염됐다. “우루과이 별 거 아니다!
밀어라.” 아버지. 아침 먹을 때는 11대 0이라고 하셨나이다.

 얼마가 지났을까 우루과이 문전을 위협하던 김종부가 통렬한 슛을 날렸다. 골키퍼가 가장 막기 어렵다는 무릎 아래 골문 모서리로 빨려 들어가던 공을 우루과이 골키퍼가 동물 같은 반사 신경을 발휘하여 펀칭해 냈을 때는 온 동네에 아이고 소리가 드높았지만 잠시 뒤 천둥 같은 함성이 작년의 촛불처럼 일렁였다. 멋진 다이빙 펀칭의 주인공이 우루과이 골키퍼가 아니라 수비수였던 것이다. 페널티킥이었다.


 브라질도 한 수 접어 준다는 남미의 강호 우루과이에게 선제골을 먹일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언감생심 어찌 해 볼까 마음을 졸이는 아가씨로부터 “오늘 시간 되세요?”라고 은근한 데이트 신청을 받은 기분이랄까, 온 나라가 조용하지 않았다. 반 골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툭 차 넣기만 하면 나머지 반 골이 완성된다.
 

 키커는 멕시코 전에서 환상적인 터닝슛을 성공시켰던 주장 노인우. 그런데 슬프게도 공은 우루과이의 골대를 정통으로 맞추고 튀어나왔다. 망연자실...... 아이고오오오 소리도 차마 나오지 못했다. 때 빼고 광 내고 현금지급기에서 두둑히 빼서 데이트 장소에 나갔더니 “꼭 인사 시키고 싶었어요. 제 애인이에요.”라고 화사하게 웃는 아가씨를 마주하는 심경이랄까.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어허허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반갑습니다.”하면서 속 편한 체 해야 할 밖에. 아나운서도 그랬다. “빨리 잊어버려야 합니다. 빨리 잊어야 합니다.”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전에서 페널티킥을 실축했던 안정환은 “미친 듯이” 뛰었다고 술회한 바 있는데 83년의 노인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페널티킥을 못 넣은 그는 짖궂은 카메라에 계속 잡혔고 그때마다 푸르륵거리는 황소처럼 우루과이 선수들에게 달려들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드디어 그가 빚을 갚을 때가 왔다.
 

 후반전이 시작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공격적으로 나오던 우루과이 선수들 사이로 노인우가 우루과이 선수의 가랑이 사이를 뚫고 깊숙한 패스를 찔러 넣었고 그것이 신연호 선수에게 노마크 찬스로 연결된 것이다. 그리고 신연호가 마침내 골을 넣었다. 요즘은 멋있게 “골!!!!~”을 외치지만 그때는 아나운서도 즐겨 “꼬링”이라고 발음했었다. 꼬링의 절규가 태평양을 건너올 듯 아나운서는 꼬링을 외쳤다. 이춘제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그분은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이 신문의 사진 설명은 잘못이다. 이 상황은 분명히 첫골 상황이다. 


 
 
 하지만 우루과이가 그렇게 쉽게 주저앉을 리는 없었다. 오히려 한 골을 먹은 후 우루과이는 더욱 공격적으로 나왔고 한국을 압도하는 경기력을 보여 주었다. 남미 특유의 개인기는 눈에 띄게 둔해진 한국의 스피드를 눌렀고 공격의 칼끝은 한국팀의 심장을 여러 번 스쳤다. 한 번 한국 골문이 뚫렸지만 다행히 반칙이 선언되어서 가슴을 쓸어 내렸는데 가슴에서 손이 떨어지기도 전에 결국 한 골을 먹고 말았다.

 1대1 이었다. 우루과이의 맹공은 계속되었고 골키퍼 이문영은 무지하게 바빠졌다. 한 번은 문전쇄도하는 우루과이 선수와 몸싸움 끝에 공을 잡았다. 어어 소리가 터져나올만큼 심하게 부딪친 터라 부상을 염려했는데 나동그라졌던 이문영은 벌떡 일어나 늠름하게 공을 골 에리어에 꽂았다.  다행이다 싶은 찰나 이문영은 고꾸라지듯 그라운드에 다시 누워 버리는 게 아닌가.   우리가 리드하고 있었다면 시간 끌기라고 경고를 받을 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이문영이 처음 넘어진 곳은 골라인 안쪽이었고 극심한 통증이 엄습한 상황에서도 이문영은 자신이 골 라인 안쪽에 있다는 것을 알고 화들짝 놀라 일어났고 공을 바깥에 내놓은 다음에야 두번째로 길게 누워 버린 것이다.   그는 팀내에서 몇 안되는 고등학생이었다.  


 경기는 연장으로 이어졌다.  일진일퇴의 공방전.  실로 투명한 경기였다.   투명함의 의미는 이렇다.  구만 팔천리 밖에서 벌어지는 경기이며, 위성을 통해 14인치 티브이로 전달되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의 거친 숨소리와 뼈와 뼈 부딪는 소리, 이따금 내지르는 독려의 고함까지도 유채화처럼 진하고 두텁게 펼쳐졌다.  들리지 않아도 들을 수 있었고 보이지 않는 구석도 볼 수 있었던  경기였다. 


우루과이가 개인돌파를 시도하면 한국은 패스웍으로 우루과이 수비를 위협했다.   연장전 시작하고 얼마 안되어 한국 축구사 사상 최대의 비운의 스트라이커 김종부가 골 라인을 치고 들어가다가 크로스를 올렸고 이것이 문전을 쇄도하던 신연호의 발에 맞고 우루과이 골키퍼가 처절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데굴데굴 우루과이 골 네트의 품에 안겼다.  이날의 결승골이었다.   지옥같은 공방전 속에 들어간 골에 환호성이 벼락같이 터졌지만 아주 잠깐 불안한 의아함이 찾아들었다. 


 공을 넣은 신연호는 좋아 날뛰는데 다른 선수들은 어슬렁어슬렁 자기 위치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뭐야 뭐야 오프사이드인가?  아니었다.  오프사이드가 될 수도 없는 상황이란 건 중딩인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럼 신연호가 왕따인가?   몇 초 뒤 제풀에 경기장을 뛰어다니던 신연호에게 선수들이 다가서긴 했지만 결승골을 넣은 스트라이커에 대한 대접이 영 아니었다.  왜 저러지?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아버지의 분석이 뒤따랐다. 

 "지친 거야.  골 넣었다고 뛰어갈 기운조차 아까운 거야. "  


 


 골 하나를 보고 뛰었던 선수들이었지만 막상 골이 났을 때 그를 맘놓고 기뻐할 수도 없을만큼 힘겨운 승부였다.   골 세레모니하겠다고 날뛰는 힘마저도 아까왔을까.  내 큰형 뻘인 선수들이었건만 나는 그들이 대견스러웠다.  그리고 존경스러웠다.  어떤 목표를 향해서 매진하다가 목표의 달성을 보고도 기뻐할 힘조차 남지 않을 만큼 최선을 다한다는 것, 그만한 아름다움이 어디 있겠는가.  기뻐 날뛰며 신연호를 덮치지는 않았지만 그 뒤로도 선수들은 죽을둥살둥 그라운드를 뛰어다녔다.   우루과이의 회심의 슛이 한국편으로 돌아선 골대의 여신의 장난에 말려 골대가 흔들리도록 박치기한 뒤 튀어나왔을 때 나는 한국의 믿어지지 않는 승리를 확신했다.  이길 수 있었다.  그리고 곧, 그들은 이겼다.  


 좀 많이 지나긴 했지만 83년의 명승부를 떠올린 것은 이번 U 20 청소년축구 8강전을 보면서였다.  술을 진탕 퍼먹으면서 본 경기라 경기 내용은 기억에 나지 않으나 그 아쉬운 패전은 83년의 명승부를 또렷이 퍼 올렸던 것이다.   이번 U 20팀이 "골짜기 세대"라 불리우며 스포트라이트는 커녕 플래쉬 조명에 만족해야 했던 것처럼, 83년의 대표팀 또한 대타 출전에 별 기대주도 없었던 밋밋한 팀이었다. 


  세상 일이란 것이 그렇지 않은가.  항상 실마리는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풀린다.  절망적인 순간에 희망의 쏘시개가 던져지고, 가장 암담한 날에 빛은 그 존재감을 과시하며 구름 사이로 길을 낸다.  이제는 기억조차 아득해진 촛불도 그랬다.  중학생 몇몇이서 촛불을 들고 청계천 앞으로 나오던 날의 소박함이 스스로도 놀랄만큼 거대한 장으로 탈바꿈할 때, 촛불은 이미 하나의 역사가 됐다. 


  물론 스러져 버린 촛불처럼 4강 신화는 이어지지 않았고,  청소년 팀의 스트라이커 김종부는 스카우트 싸움에 휘말려 힘도 써 보지 못하고 사라지고, 신연호도 이렇다 할 활약을 하지 못하고 소리소문없이 은퇴했으며, 주장 노인우는 그 뒤에 아예 기억도 못할만큼 희미해졌지만, 그래도 4강의 신화는 역사이고, U 20 대회의 본받아야 할 선례로 남아 있듯 말이다.  아득하지만 지워지지 않는  것. 불현듯 사람들의 기억을 깨우고 혈관 속에 파문을 일으키는 존재.  어쩌면 역사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도 촛불 들었던 사람들 중 일부는 싸우고 있다.  그들에게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 



 어떠한 강적을 만나든, 무슨 금성철벽에 부딪치든 수이 주눅들지 않고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나는 우루과이 전에 출격했던 "대한 건아"들로부터 배웠었다.   도대체 왜 그들도 나이를 먹으면 백패스나 질질 하고 문전에서 헛발질하는 유전병을 이식받는지 알길이 없었지만, 적어도 그날 그 대회에서만큼은 그들은 한치도 물러섬없이 남미의 강호와 맞섰고, 몸이 부서지는 고통 속에서도 골 라인 안에 들어온 공을 바깥에 내놓고서야 정신을 잃었고, 목표가 이뤄져도 기뻐할 수 없을만큼 몸과 마음을 쥐어짜서 팔다리를 놀렸다.  그리고 그들은 30년 가까운 지금도 툭하면 불려나와지는 역사를 창조했다.  


 강적은 수시로 오고 그들의 중압감은 숨도 못 쉴만큼 클 수도 있다.   "군대스리가 병장 축구단"만큼 일병으로선 어찌해 볼 수 없는 강팀도 상대해야 하고, 힘 좋고 기술 좋고, 돈 많고, 경험까지 많은  뭐 하나 아쉬운 거 없는 주제에 쪼잔하고 치사하고 반칙 서슴지 않고, 심판까지 매수하는 더러운 강적도 만날 수 있다.   경기의 승패를 떠나서 그 팀을 위하여, 그 팀 성원들을 위하여 가장 필요한 마음가짐은 주눅들지 않는 것이다.   "너 우루과이? 나 한국" 같은 배짱으로 뛰는 듯했던 83년의 한국 청소년 국가대표팀처럼 말이다.  니가 개인기 부리면 나도 개인기 부릴 줄 안다며 우루과이 수비수 가랑이 사이로 킬 패스를 날렸던 노인우처럼 말이다. 


 주눅들지 말고 최선을 다해라.   골 세레모니할 기력이 없을 만큼 뛴 뒤에야 최선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쉽사리 지치지 마라.  가장 멍청한 짓은 뛰지도 않고 지치는 것이다.  83년의 멕시코에서 벌어진 경기는 26년 뒤 오늘 나에게 그렇게 말해 주고 있다.   


 http://sports.kbs.co.kr/bbs/exec/ps00404.php?bid=191&id=19

 클릭하시면 이날의 경기 하이라이트를 보실 수 있다. 

 
 

by 산하 | 2009/10/22 13:33 | 내 인생의 명승부 | 트랙백 | 덧글(4)

분노 후에

한겨레 21 노 땡큐


폭력 추방을 모토로 삼는 <긴급출동 SOS 24>의 첫 회 아이템을 장식한 사람은 엄마를 때리는 패륜아였다. 엄마에게 시옷자 지읒자 욕설을 퍼붓고 주먹질 발길질도 사양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시청자들의 격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징역 1년 가량을 선고받았었는데, 사람들은 그 형량이 터무니없다고 분통을 터뜨렸고, 후일담 방송에서 아들이 엄마에게 보낸 사죄 편지 가운데 출옥 후 장사 밑천을 대 달라고 요구한 구절이 발견되었을 때에는 어떻게 그런 작자가 반성을 했답시고 방송에 소개할 수 있느냐는 항의가 게시판을 뒤덮었다.    


나는 그 의로운 분노를 수긍한다.  병역 이행 기간보다도 짧은 징역 1년으로 어미를 쥐 잡듯이 잡은 죄악이 어찌 사해질 수 있을 것이며, 그 죄에 값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4년이 흐른 요즘, 우리 팀에서는 “자식이 부모를 두들겨 패는” 케이스를 굳이 다루려 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너무나 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진솔해지자면 시청자들에게 더 이상 ‘쇼킹’하지 않기 때문이다.


직업상 부모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아이들을 무시로 만난다.  방송을 통해 소개하지 않은 케이스를 합하면 열 손가락을 서너 번 구부려야 셈할 수 있을 정도다. 그들은 대개 학교에서는 문제아로 찍혀서 쫓겨난 이들이기 일쑤였고, 그 성장 환경에 가정 폭력이나 아동 학대의 시커먼 그늘이 드리워지지 않은 경우가 드물었다. 덩치는 커져 가지만 정신세계는 황폐해져 갈 뿐인 아이들의 위안은 골방 속 컴퓨터였고, 가장 만만한 상대는 부모였다.


그 아이들도 언젠가는 그나마 그들을 품고 있는 부모들의 울타리를 넘어 밖으로 나와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스스로도 사회를 외면한 채, 집 안에서 사람 죽이고 피가 튀기는 폭력적 게임에 밤을 지새우는 아이들이, 부모를 두들겨 패기도 하고, 심지어 장바닥에서 사온 병아리나 강아지의 목숨을 심심파적으로 거두던 아이들이 사회에 나올 제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사회적, 제도적인 도움과 거리가 멀었던 그들의 과거는 돌아볼 필요 없이, 그들이 저지른 행동을 준엄하게 꾸짖고 엄벌에 처하면 끝나는 것일까.  


‘나영이 사건’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나 자신이 그런 일을 당했다면 무슨 수를 쓰든 사적인 복수를 감행했을 것이다.  범인은 그의 행동을 통해 나영이를 한 인간으로, 인격체로, 자신만큼이나 소중한 생명으로 전혀 보지 않았음을 처절하게 증명했다.

이른바 ‘사이코패스’처럼 그는 어린 아이의 육신과 정신을 장난감처럼 유린했다.  그런데 그는 원래부터 범죄의 유전자를 지녔으며, 그런 이들을 영원히 사회에서 격리한다면 유사한 일이 줄어들 수 있을까?  사이코패스를 평생 연구해 온 로버트 드 헤어 교수의 말을 들어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상대방을 이해하는 마음 없이 경쟁만 강조하는 사회, 이기는 자만이 추앙받는 사회에서 사이코패스는 필연적이다.”  


분노의 화살을 시위에 재는 것은 좋다.  뻔뻔하고 잔악한 범죄를 저지른 이의 심장에 과녁판을 그려놓고 그곳을 겨냥하는 것까지도 좋다.  그런데 과녁이 고슴도치가 된 뒤, 우리들의 화살은 어디로 향해야 할까.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는 것은 정당하다.  하지만 무엇이 문제인지에 대한 진지하고도 실질적인 관심으로 승화되지 못하는 분노는 급속히 그 영양가가 떨어질 것이다.  아무리 의롭고 마땅한 분노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4년 전, 어머니를 사정 돌보지 않고 폭행하던 스물 청년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 청년의 행동에 치를 떨던 사람들의 분노는 어디로 갔을까.  인두겁을 쓰고는 도저히 저지를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짐승 같은 범죄자들을 대통령 말씀대로 “사회에서 격리”하면 분노의 근원 역시 우리로부터 분리될까. 우리가 할 일이란 우리의 분노를 고스란히 퍼다 부을 수 있는 괴물의 등장을 기다리는 것뿐일까.    



 

by 산하 | 2009/10/20 02:42 | 썸데이서울 - 이런저런 얘기들 | 트랙백 | 덧글(10)

광신에 대한 몇 가지 단상

지금까지 별의 별 사람들과 다 만났고 직간접적으로 백만 가지의 상황과 마주했는데 말이죠.  그 가운데 정말로 이건 좀 다른 방향으로 편집해서 어디 국제 호러 영화제 같은 데 출품해 봤으면 하는 아이템이 있었어요.  직접 그 엽기적인 공포와 대면한 것도 아니고, 동료 PD가 편집하는 모습을 어깨 너머로만 보면서도 손발이 오그라들 지경이었으니까요.

어느 작은 교회가 뭔가 수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어요.  예배를 본 다음 교인들의 얼굴에 시퍼런 멍이 든다거나 심지어는 피를 철철 흘리며 나오기까지 한다는 겁니다.  대관절 교회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촬영 테잎에는 그들의 모임 현장이 생생하게 담겨 있었지요.


교인들이 둘러앉아 있는 교회 사무실.  그 모임의 주재자는 목사가 아닌 여자 집사였어요.  목사와 그 사모는 ‘영적 능력이 탁월한’ 그 집사에게 감화(?)되어 있었고, 다른 신도들도 그 집사를 받들어 모시다 못해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한다고 했지요.  한참 무슨 얘기를 나누던 중 갑자기 문제의 집사가 벌떡 일어섰어요.


그리고는 손에 뭘 들고는 옆에 있던 여자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무시무시하게 두들겨 패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맞는 이는 저항의 몸짓은커녕 한 대라도 더 맞아야 한다는 듯 피하지도 않고 그 매를 받아냅니다.  매에는 장사 없다고 윽 윽 신음과 비명이 터져 나오는데도 때리는 자와 맞는 자 둘 다 초지일관이더군요.


“도.... 도대체 왜 저러는 거예요?”
“사람들한테 악령이 깃들어 있어서 쫓아내는 거랍니다.  저러면서 돈도 갖다 바쳐요. ”  


  악령을 쫓기 전에 사람 먼저 잡을 것 같아 우리가 확보한 영상을 근거로 부랴부랴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을 때 또 한 번 아연실색할 일이 벌어졌어요.  신도들 가운데 누구도 폭력 피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집사님의 행동은 자신들에게서 사탄을 몰아내려고 한 것일 뿐이라며 집사를 일치단결 감싸고 돈 거지요.   고관대작들은 물방울 다이아몬드를 도둑맞아도 잃어버린 것 없다고 잡아뗀다더니 피가 터지도록 두들겨 맞은 사람들이 자기는 은혜를 입은 것뿐이라며 아우성을 치니 경찰이고 제작진이고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어요,


그 와중에 문제의 집사가 카메라 앞에서 신도들 하나 하나에게 매우 정중하고 간절하게 사과를 하기 시작했어요.  “여러분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그러면 안 되는 거였어요.”


‘개전의 정’과 ‘재발 방지의 의지’를 보여 이 자리를 빨리 모면해 보자는 속셈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행동이었지요.  그런데 사과를 받던 아줌마 하나가 언성을 높이면서 집사에게 항변을 합니다.  “집사님이 뭘 잘못했어요? 집사님이 날 살렸어요.  날 살렸잖아요.”  집사는 계속 잘못했다고 연거푸 고개를 숙이는데 그에 따라 아줌마의 목소리도 더욱 단단해집니다.  

“집사님이 날 살렸어요! 집사님 사과하지 마세요!” 


 얼굴을 보니 이전 집회에서 막대기로 두들겨 맞아 피가 터졌던 바로 그 여자였어요.  푸른 멍 자국 채 가시지 않은 눈을 크게 뜨고선, 안타까워 못 견디겠다는 듯 주먹을 꼬옥 쥐고 집사님은 죄가 없다고 외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동정의 마음이 아닌 공포의 감정이 스멀거리면서 온몸을 뒤덮더군요.  대관절 집사의 어떤 영적 능력이 그들을 휘어잡았는지 모르나 집사에 대한 믿음은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있었고, 주위에게 전염되고 있었고, 그 공동체에 모인 사람들의 인생길을 송두리째 어긋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집사는 피해자들의 일치된 증언에 따라 풀려났고, 범죄 사실이 인정되지 않는 한 그들을 해산시킬 도리도 없었던 바, 공포의 예배는 암암리에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몇 달 뒤 목사의 사모 안에 파고든 악령(?)을 쫓아내려는 시도 와중에 목사 사모의 목뼈가 부러지는 끔찍한 비극을 맞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시신을 치우지도 않은 채, 그 남편 목사를 비롯한 신도들은 썩어가는 시체 앞에서 부활을 노래하고 있었지요.  



이 이야기를 들으며 “미친 사람들!”이라 일갈하지 않을 분은 드물 겁니다.  하지만 그 교회에서 집사에게 양순히 두들겨 맞던 사람들은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들이었어요.  정신질환자도 아니었고, 직장 생활도 버젓이 하고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단지 그들의 믿음이 지나쳤을 뿐이지요. 문제는 이런 류의 광신(狂信)이 비단 종교의 영역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오랜 동안 북한에 억류되어 있었던 현대 직원 유모씨가 국회에 불려 나와 자신의 북한 행적에 관해 얘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여자가 생겨서 그 여자와 함께 살고픈 욕심에 “같이 남으로 가자” 정도의 ‘탈북 음모’를 꾸민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 분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북한이 얘기하는 바 “반공화국 책동”을 벌인 것이 맞더군요.  “김정일 체제를 무너뜨리려는 마음”에 100명이 넘는 북한 사람의 교화(?)를 시도했고 그를 추궁하는 북한 관리들에게 “차라리 사형시켜라”고 대들었다고 합니다.  


북한과의 상생에 목숨을 건 현대 아산 직원으로서의 삶을 뿌리친 것이야 자신의 신념에 따른 것이니 고개를 끄덕여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의 견제와 감시를 한몸에 받고 있는 현대 직원으로서,북한 체제를 익히 아는 사람으로서 100명도 넘는 북한인들에게 일종의 ‘남한 천국, 북한 지옥’을 부르짖으며 그들의 ‘교화’를 시도했다는 것은 사람 잡는 교회 안에서 내 안에 든 악령을 축출코자 집사의 매타작을 감사히 받아내던 이들의 ‘용기’와 ‘믿음’을 넘어선다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모스크에 들어가서 가스펠 송을 부르는 걸 은혜롭게 여기다가 탈레반의 총구 앞에서 사선을 넘나들어야 했던 이들처럼, 악령을 쫓아내려다 끝내 자기 교회의 사모를 밟아 죽인 이들처럼, 유씨는 스스로의 인생을 뜻하지 않은 고통에 빠뜨렸고, 자신의 고용주를 곤경에 밀어 넣었으며 남북 관계를 파탄 직전까지 몰아갔습니다.  성경 타자 연습을 하면서 “차라리 사형시켜라”고 대들었다는 그의 과감함이 “집사님이 나를 살렸다”고 포효하던 충만함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유모씨가 아직 감금 생활을 벗어나기 전, 저는 또 한 명의 불운한 영혼을 뉴스를 통해 접했었습니다.  앞길이 십팔만 리 같은 푸르른 청춘이었던 그는 자신이 신봉하는 믿음의 대상을 배신하였다는 이유로 한 사람을 증오했고, 어떻게든 그를 겁박하여 볼 심산으로 사진에 시뻘건 물감을 뿌리고 “배신자는 반드시 대가 치른다”는 경고에다가 도끼 한 자루까지 얹어 소포로 보냈다가 덜미를 잡혔습니다.


  철부지 깡패도 코웃음을 칠 협박 소포의 주인공은 “6.15청학연대”라는 단체의 집행 위원장씩이나 되는 분이었고, 그가 사무치게 겁주고 싶어 했던 대상은 황장엽이었습니다.  
 황장엽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청학연대 집행위원장의 정치적 입장의 정당성을 차치하고, 나는 그 믿음이 두려웠습니다.   이글거리는 분노를 이기지 못해 한 늙은이의 사진에 시뻘건 물감을 뿌리고 “배신자의 대가”를 힘주어 쓰고선, 손도끼 하나를 알뜰히 동봉하는 순간의 그는 이미 신념에 투철한 운동가가 아니라, 신념의 포로가 된 광신도였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그 소포를 포장하던 순간 그의 눈은  목사 사모의 목을 밟으며 “사탄아 물러가라”를 외쳤던 이들의 눈과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그저 옥중에서는 사람 잡는 교회의 신도들처럼 목 부러진 시체가 부활하리라 우기지 말고, 자신의 행동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되짚고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만약 그가 그러하지 못한다면, 진실로 사람 잡는 교회의 핏발선 사람들과 터럭만큼도 다를 일이 없겠기 때문입니다.



대저 광신도란 믿음을 가로막으려는 모든 시도에 대해 적대적이며 모든 이성과 상식을 믿음의 흙 아래 매몰시키는 이들을 지칭합니다. 흙의 두께가 두터우면 두터울수록 스스로에게 만족하며, 서로 기꺼워하며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해 가는 것이 그들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흔히 생각하듯 미친 사람들이 아닙니다.다만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확신에 상식의 잣대와 회의(懷疑)의 수선이 가해지는 것을 거부할 따름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가슴 한 구석이 찔려 오는 것은 과연 나에게는 광신도적인 모습이 없을까 하는 다소 아찔한 반문 때문입니다.   적절한 반성과 합리적인 의문 없이 관성적으로, 그냥 이게 맞는 것 같아서, 그리고 어떤 의견이 나의 정치적 포지션에 부합하고 나의 경제적 이익에 맞아 떨어지므로 불문곡직 수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질문에 흔쾌히 난 아니야~ 라고 대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듯 합니다.  

by 산하 | 2009/10/14 02:44 | 썸데이서울 - 이런저런 얘기들 | 트랙백 | 덧글(24)

배반의 장밋가시

좋은 일에서건, 그 반대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가능성이 현실로 닥칠 때 그 반응은 극대화하게 마련이다. 일종의 배반이 주는 통렬함이라고나 할까. 베트남 축구팀이 한국 국가 대표 팀을 상대로 누구도 상상 못했던 1승을 기록했을 때 베트남 감독은 “해방 전쟁 승리 이후 최고의 기쁨이다.”라고 부르짖었다. 반면 1966년 월드컵에서 북한에 큰 코를 다치고 고향 앞으로 돌아갔던 이탈리아 팀은 당연히 썩은 토마토 세례를 받아야 했다.

좀 있으면 4년을 꽉 채우는 기간, 험난하기로 소문난 프로그램에 몸을 담다 보니 흔히 ‘인간 말종’이라고 일갈해 버리기에 충분한 이들을 꽤 만나 봤다. 그런데 정작 우리 분노의 임계치를 시험하는 것은 ‘원래 인생이 구린’, 즉 볕들 일 없는 쥐구멍에서 살아왔고, 그들 자신 정신적 외상을 입고 있던 사람들의 패악질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 말종과는 거리가 서울 부산은 될 것 같은, 또 응당 그래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거침없이, 부끄럼도 없이 사람을 짓밟고 무시하고 패대기치는 것을 보았을 때, 참을 인자를 허공에 쓰게 되는 것이다.


근처의 생활 수급자나 지적 장애인을 돌봐야 할 의무가 있는 이장 주제에 그런 사람들만 골라서 썩은 밥 먹이고 돼지우리 같은 초가에 재우면서 노예로 부리는 경우도 있었고, 불가에 귀의한 신분으로서 어떤 사건을 통해 훌륭한 관대함을 보여 주어 매스컴도 짜하게 탔던스님이 내연의 여자에게 즐겨 칼을 던지는 풍광을 목도하기도 했었다. 그 숱한 케이스들 가운데 나를 가장 격동시켰던 사람이라면 나는 서슴없이 어느 지역의 기독교 전도사 (목사일 수도 있다)를 들 것이다.


기실 나는 그의 코빼기도 보지 못했다. 가정폭력이 심하다는 그의 집을 방문했지만 그 아내가 방송을 하게 되면 목회자로서의 인생이 끝장나는 것이고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다고 울먹이는 것을 듣고는, 그러시라고 하고 돌아온 것이 인연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내가 그리 흥분했을까. 왜 몇 년이 흐른 지금도 좀 더 아내를 설득해서 그 성직자(?)의 이중생활을 까발리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주먹을 부르쥘까.


그것은 피해 상황을 증언하면서 아내가 했던 한 마디 때문이었다. 알콜을 금기시하는 한국적 기독교인답게 술 한 방울 입에 대지 않고도 주먹을 즐겨 휘두르던 남편이 하루는 모질게 한쪽 뺨을 돌려세운 다음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왼뺨 맞았으니까 오른뺨도 돌려 대. 이 X아. 넌 성경도 안 보냐. ”



 마 그 성직자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평생의 사표로 삼겠다고 서약했을 것이다.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도 대라는 예수의 말이 힘센 자에 대한 굴종이 아니라 부당한 폭력에 대한 연민이며, 그마저 감싸 안으려는 사랑을 표현한 말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도 교회 강단에 서면 그렇게 얘기할 것이고, 그 크신 사랑을 설파할 것이며, 자신을 평화의 도구로 써 달라고 두 팔 들어 올릴 것이다. 그래 놓고는 집에 들어와서는 그 두 팔로 아내의 왼뺨과 오른뺨을 골고루 때리며 성경을 폭력적이고도 파렴치하게 인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가 이 꼴을 보았더라면 아내에게 이렇게 부르짖었을지도 모른다. “당신의 옷을 팔아서라도 칼 하나 장만하십시오!”(누가복음 22:36)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한 성직자의 두 얼굴을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는 이유는 일종의 배반감 때문이다. 그래서는 정말로 아니 될 사람이, 남이 그런다 해도 오히려 신명을 다해 막아야 할 사람이 그 도리와 의무를 송두리째 저버리고 자신이 지켜야 할 가치를 제멋대로 해석하고 그를 강요할 때, 우리는 배반의 장밋가시에 손톱 밑을 찔리게 된다. 그리고 이 비루한 시대, 배반의 아픔은 계속된다.
 

 오늘 아침 신문에 수의 계약을 통해 자기 마누라가 속한 단체에 특혜를 주었다고 구설수에 오르신 ‘한국 노동 연구원’이라는 국책 연구 기관의 기관장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나는 비슷한 아픔에 가슴이 아렸었다. 노조 가입률이 10퍼센트를 갓 웃도는 나라, ‘정규직 노동자’가 되는 일이 점차 가문의 영광이 되어 가는 사회, 노동 3권은 커녕 “시키는 대로 일하고 따르고 주는 대로 받는” 것이 일상이 된 형편에서 전경련 산하 정책 연구원도 아니고, ‘노동’ 문제를 다룬다는 국책 연구원장님의 입에서 어찌 “노동 3권을 헌법에서 빼는 것이 내 소신이다”는 말이 튀어나올 수 있었을까. 그런 소신을 가진 분이 어쩌다가 저런 자리에 가시게 되었단 말인가.


 문제의 소신과 해당 직위는 서로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서로를 배반한다. 창조한국당 유원일 의원이 낸 보도 자료를 보면 ‘노동 연구원’ 원장님은 “모든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기염을 토한 적도 있으시다고 한다. 글쎄 이쯤 되면 배반에 발끈할 여유조차도 상실되고 만다. 이는 배반이 아니라 반역이기 때문이다. 대관절 저 사람을 저 자리에 앉힌 반역의 왕초는 누구일까.

by 산하 | 2009/10/05 12:22 | 썸데이서울 - 이런저런 얘기들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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