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로그


선자령과 우이령 발가락이 닮았다? 길 따라 사람 따라 - 기행

선자령과 우이령 발가락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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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을 보거나 어떤 만남을 가질 때 가장 부러운 사람은 여행을 자유롭게 다니는 사람이다. 돈과 시간에 큰 구애 받지 않고 원하는 곳을 원하는 시간만큼 즐길 수 있는 여유란 내게 가장 큰 로망이다. 그래서 틈만 나고, 여건이 허락한다면, 어딜 나다니고 쏘다니고 이것저것 구경하는 모임에는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 일환으로 지지난 주 토요일에는 북한산 우이령을 넘었고, 지난 주는 대관령 옆 선자령 길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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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령은 학교 동기들의 트래킹 모임과 함께 했다. 트래킹 모임의 장으로서 코스를 짜는 친구의 사전 안내가 자상하다. “우이령길은 사전 예약제이므로 사전 신청이 필요하고, 함께 움직여야 하므로 평소처럼 지각생 기다려 주지 않으며, 미리 답사해 본 결과 눈이 녹지 않은 길도 있으므로 아이젠이 있으면 구비하는 것이 좋겠다. 코스는 우이령 오봉 전망대에서 석굴암을 들렀다가 원점 회귀하는 것으로 하고, 뒷풀이는 두부전골이다.”



우이령은 도봉산과 북한산의 경계이자 서울 우이동과 경기도 양주시 교현리를 잇는 고개다. 내가 이 이름을 처음 들었던 것은 2000년께, 도봉동에 있는 설렁탕집 무수옥을 촬영할 때였다. 그때 무수옥의 오랜 단골 한 분이 인터뷰 중 이런 얘기를 했기 때문이다. “양주에서 나뭇짐을 지고 우이령을 넘어온 사람들이 나무 다 팔고 이 설렁탕 한 그릇 먹고 다시 넘어갔지.” 대로(大路)는 아니었다. 대동여지도에서도 이름 없는 오솔길 정도로 표기되고 있으니까. 그래도 해발 327미터 정도로 북한산과 도봉산의 험산준령 중에서는 팍팍한 길이 아니었으니 사람들의 발길은 끊임이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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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령을 넘으며 가장 크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역시 도봉산 오봉 능선이다. 높이가 660미터가 넘으니 우이령의 두 배로 높은 셈인데 다섯 개의 봉우리가 인공적으로 조성하기라도 한 듯 나란히 서서 우이령을 넘는 사람들을 굽어 보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어느 원님의 절세미인 딸에게 장가들고 싶었던 총각 다섯 명에게 원님이 바윗돌을 들어 던져 그 힘을 입증하라고 하자 다섯 명 모두가 집채만한 바위를 던져 오봉을 만들었다고 한다. 원님의 딸이 얼마나 예쁘면 그럈을까 싶기도 하지만 오봉의 우람한 능선을 보면서 나는 좀 다른 생각을 했다. 오봉을 올려다보며 나뭇짐 지고 서울 방향으로 길을 잡던 젊은이들은 이렇게 넋두리하며 한숨 쉬지 않았을까. “진짜 장가가기 힘들었구나 예나 지금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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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늘날 우이령길은 오솔길 느낌은 아니다. 전쟁통에 미군 공병대가 교통로를 개척하면서 길을 확장하고 넓혀 놨고 정상 근처의 전차 방어막에서 보듯, 한국군 역시 이 길을 군사적 요충지로 관리해 왔다. 이 일대에 설치된 ‘오봉산 유격 훈련장’에서는 지금도 유격 훈련이 벌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우이령 곳곳에는 험상궂은 ‘유격’ 표시를 비롯해 군에 갔다 온 사람들이면 바라만 봐도 서늘해지는 흉물(?)들이 도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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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자식들이 군대 제대했음직한 여자 동기들에게도 유격 훈련장이 마냥 신기했던 모양이다. 석굴암 오르는 길에 담장넘기 코스 훈련장이 별반 통제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는 죄다 거기에 달라붙었다. 무슨 익스트림 스포츠라도 되는 양 웃고 떠들면서 줄을 잡고 오르고 정상에서 환호도 한다.그러다 한 명은 호되게 어깨를 부딪쳐 끌끙거리기도 했다. 어이구 군 복무를 하거나 마친 아드님들이 봤다면 칠색팔색을 할 곳이다 이놈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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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우이령길이 사람들의 번다한 발길로부터 보호받고 환경이 잘 유지된 것은 이런 군사적 특수성 외에도 좀 어이없다 할 과잉 대응 탓도 있었다. 세간에는 1968년 ‘청와대를 까기 위해’ 내려왔던 김신조 외 124군 부대가 이 우이령을 통해 서울로 진입했고 그 때문에 우이령이 통제됐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김신조는 문산 법원리쪽을 거쳐 노고산 등 서울 서북쪽으로 파고들어 진관사 계곡을 지나 사모바위 아래에서 습격 전 마지막 밤을 보냈다. 즉 이른바 ‘김신조 루트’와 우이령은 관계가 없었다. 하지만 이 사건의 여파로 경기도 양주와 서울을 잇는 이 교통로는 공비 침투로로 이용될까 두려워 지레 폐쇄됐고 그예 수십년 세월이 쌓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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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우이령=김신조는 일종의 팩트로 사람들 뇌리에 박힌다. 심지어 우이령길이 오랜 봉쇄에서 관광객들을 받기 시작한 2009년 당시에도 김신조 목사가 초대돼 왕년의 감회(?)를 밝힐 정도였다. 그때 김신조 목사님은 “결과적으로 나 때문에 이 숲이 보존된 것” (대한민국 정책 브리핑 2009.1020) 이라며 농담반 진담반의 말을 하고 있는데 사실 그도 우이령을 구경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험악한 분단의 논리, 그 와중에 서로 까고 죽이는 소모전의 와중에 우이령길은 억울한(?) 공비 침투로의 타이틀을 뒤집어썼고 덕분에 40년 이상 보호(?)받았다.

1968년의 김신조 2009년 우이령에서의 김신조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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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선자령은 대관령 길이 개척되기 이전에 영동과 영서를 이어 주었던 고개라고 한다. 16세기 신사임당이 강릉 친정을 떠나 한양 시댁에 갈 때 ‘대관령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다’((踰大關嶺望親庭)는 제목의 시를 짓고 있으니 대관령에 주 교통로를 내준 건 꽤 오래 전의 일이리라. 대관령보다도 3백미터 정도 높지만 대관령 휴게소에서 출발하면 그다지 험한 구석 없는 멋진 트래킹 코스고 한반도의 등뼈라 할 백두대간 태백산맥 구간을 그야말로 일망무제로 굽어볼 수 있는 장관을 취할 수 있어서 사시사철 인기가 높다. 대관령 휴게소 주차장이 미어터질 지경으로 사람들이 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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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영서 지역에는 대설이 내렸고 주말까지도 선자령은 눈밭이었다. 너무나 경치가 좋아서 선녀들이 아이들까지 데리고 내려와 놀아서 선자령(仙子嶺)이라 했다는 유래를 들으며 고새를 여러 번 끄덕일만큼 절경이었다. 몇 걸음만 옮겨 둘러봐도 풍경이 달라졌고 홀연 세찬 바람에 고개를 돌리면 새로운 정경이 연속부절로 펼쳐졌다. 산들이 파도같이 일렁이고 먼 바다는 산처럼 평온하다. 또 한 번 눈 퍼부을 양 푸른 빛 하나 없는 하늘과 겹겹이 눈쌓인 땅은 경계가 없이 하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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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높은 선자령길을 넓히고 우마차 정도는 통행할 수 있도록 길을 낸 사람은 조선 중종 때 사람 고형산(高荊山,1453~1528)이었다. 강원도 관찰사로 오면서 영동 지역 순시하며 백두대간 넘을 때 고생을 했던지 그는 사람들을 동원해 선자령 길을 닦았다고 전한다. 그런데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이 이 선자령을 넘어오면서 적에게 이로운 길을 제공했다 하여 고형산이 부관참시를 당했다는 전설이 있다. 가슴 아픈 사연이긴 한데 그런데 이게 또 ‘우이령 김신조 루트’와 비슷한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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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은 강원도 깊숙이 들어온 적이 없었다. 철원, 김화 쪽에서 전투를 벌인 것이 다였을 뿐이다. 선자령을 넘어 강릉을 친 적도, 동해안으로 남하하여 선자령을 넘어 남한산성으로 간 적도 없었다. 즉 강릉이나 평창 사람들은 청나라 군의 변발을 구경조차 한 일이 없었다. 오지도 않은 적의 침략을 소재로 사람들 위해 좋은 일 한 고형산을 부관참시까지 시키는 기묘한 전설이 창조되고 전승된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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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것은 1,21 사태 이후 우이령이 ‘김신조 루트’가 되고 폐쇄된 이유와 비슷할 것 같다. 일종의 강박이었다. 적이 올까봐 우리에게 유용한 길조차 가로막고 좁혀야 했던, 있는 길도 없애고, 평탄한 고갯길도 요새로 만들어야 했던 스트레스, 우리 집에 오신 손님 간첩인가 다시 봐야 했던 시절과 어느 적이 어느 고개로 넘어올지 노심초사해야 했던 시대가 빚어낸 ‘발가락이 닮은’ 사연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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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땅은 좁지만 넓다. 차 타고 돌아다닌 인생이라면 차고 넘치지만 두 발로 걷는 나그네 인생은 아직 걸음마 단계인 나로서는 실로 ‘한국은 넓고 갈 곳은 많다’ 외칠 뿐이다. 자연도 자연이지만 거기에 이슬처럼 맺히고 열매처럼 익어가고 낙엽처럼 떨어진 사람들의 이야기, 길마다 고개마다 적잖은 세월 속 여러 대의 사람들이 머물렀다 떠나면서 그 발길로 새긴 사연의 흔적들을 곱씹는 일 또한 매우 즐겁다. 선자령과 우이령에서 만난 조상님과 우리 아버지 세대의 ‘공포’를 뜯어보며 생각에 잠긴다. 그 공포를 우리 아이들이 맛보는 일은 없었으면 정말로 좋겠다.


입암산성에서 만난 사람들 - 비운의 무장 송군비 길 따라 사람 따라 - 기행

입암산성의 이야기들 1 – 비운의 무장 송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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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山城)을 즐겨 찾는다. 별반 관심없는 가족들 데리고는 가기 어렵지만 친구들이랑 다니거나 답사를 잡을 때 근처에 산성이 있다면 가급적 빠뜨리지 않으려고 한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일단 경치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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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은 보통 주변을 훤히 감제(瞰制)할만한 위치에 있고 그 고도가 낮건 높건 주변의 풍광이 가장 눈에 잘 들어오는 곳에 만들어지니 경치가 좋을 수 밖에 없다. 또 대개 산성에는 이런저런 사연들이 서려 있다. 평지성인 읍성보다는 산성에서 여러 전투가 벌어졌고 그를 위한 대비도 많았으니 그 돌멩이 하나 성가퀴 하나에 이야기가 똬리를 틀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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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창 지대로 이름난 호남에도 산세 드높은 곳은 많고 산성도 적지 않다. 호남의 3대 산성이라면 담양의 금성산성, 무주의 적상산성, 그리고 장성의 입암산성을 든다. 얼마 전 입암산성을 찾았다. 전남 장성과 전북 정읍의 경계를 이루는 해발 626미터의 입암산의 골짜기를 끌어안고 능선을 따라 지어진 포곡식 산성이다. 산 이마께를 둘러 만들어지는 테뫼식 산성보다 규모가 당연히 크다.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에는 꽤 큰 분지가 형성돼 있어서 군대와 백성이 머무르기 좋은 산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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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 길이가 5~6킬로미터에 이르고 (남한산성 본성 길이가 9킬로미터쯤 된다) 태인, 정읍, 고부 등 주변 고을 백성들이 유사시 성에 들어와 농성하게 돼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전남 장성은 ‘Yellow City’로 도시의 트레이드 마크를 삼아 표지판이며 뭐며 다 노란색으로 물들이고 있는데 입암산에서 발원하여 장성을 가로지르는 영산강 지류가 황룡강(黃龍江)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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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창 계곡을 거슬러 입암산성 남문터에 이르면 이 황룡강의 발원지가 있다. 갑오농민전쟁 당시 농민군이 기세를 올렸던 황룡강 전투가 문득 떠오르지만 그 얘기는 나중으로 미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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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암산성의 위용을 구경하기란 쉽지 않다. 성벽을 둘러볼 길이 마땅치 않고 입암산 정상인 갓바위, 즉 입암(笠巖)으로 오르는 길은 과거 산성 안의 분지를 관통하는 길이다. 그래서 능선을 따라 연결된 성벽을 제대로 감상하기는 어렵고, 짬짬이 드러나는 성벽에 아쉬움을 달랠 뿐이다. 하지만 성의 내력은 결코 얕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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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때부터 성은 있었던 것 같지만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한 것은 몽골군 6차 침입 당시 이 지역까지 쳐내려온 몽골군이 발이 걸리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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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6차 침입은 몽골군이 고려를 말려 죽이기로 작심을 하고 덤벼든 전쟁이다. 온 나라를 초토화하고 사람들을 다 잡아가도 고려 조정 너희가 강화도에 버틸 수 있나 보자고 칼을 갈았다고나 할까.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만 20만 명이 넘었다고 기록된 당시로서는 ‘절멸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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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몽골군은 고려 조정의 경제적 기반이라 할 호남 지역까지 넘본다. 고려 조정이 지방 백성들에게 내놓는 대책이라고는 산성에 들어가거나 섬에 틀어막히라는 것이었고, 몽골 장수 자랄타이는 호남의 섬들을 공략할 계획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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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막기 위해 고려 조정이 수군을 주어 내려보낸 장수가 송군비(宋君斐) 등이었다. 이들은 영광까지 내려왔으나 작전 계획이 어그러지면서 한쪽은 섬으로 가고 송군비는 내륙으로 들어와 이 입암산성으로 들어왔다. 성 안의 방비는 형편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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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울 수 있는 축은 도망가거나 항복했고 노약자가 주류였다.하지만 송군비는 꾀가 많은 사람이었다. 몽골군이 다가서자 노약자들을 성밖으로 내보낸다. “아이고 허리야 삭신이야” 제풀에 드러눕는 이들을 보며 몽골군은 방심한다. “별 것 아니구나.” 송군비는 그 방심을 노렸고 있는 병력을 박박 긁어 몽골군의 뒤통수를 쳐서 대승을 거둔다. 몽골 장수 4명을 사로잡았다 할만큼 큰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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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송군비는 꾀 많은 사람이었다. 몽골과의 강화가 성립된 뒤 몽골은 일본을 넘봤고 고려에게 일본 침략의 길잡이를 요구하고 나선다. 몽골에게도 일본은 바다 건너 땅, 고려의 협조가 절실했다. 몽골은 사신을 파견해 일본의 굴복을 요구하기로 한다. 그 안내자로 나선 것이 송군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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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과 평원에만 살던 몽골인에게 바다는 일단 압도적이었지만 송군비는 거제도까지 사신을 수행하면서 엄청나게 겁을 준다. 입암산성에서 몽골군을 속였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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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파도라는 건데요. 지금 보이는 것도 무서우시죠? 거제도만 벗어나 보십쇼. 집채만한 게 넘실거립니다. 우리도 일본 가려면 목숨 걸어야 해요. 열 번 배 뜨면 하나 둘이나 도착하까. 이런 데를 어떻게 가려고 그러십니까. 덕분에 제 목숨도 위태롭겠습니다.” 배에 태우고 거제도 한 바퀴만 돌아도 몽골 사신들은 배멀미로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렇게 보름은 가야 합니다요.뭐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실 겝니다.” 이러면 더 얼굴이 하애졌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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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사신 흑적 일행은 거제도에서 발길을 돌린다. 송군비는 그들을 따라가면서 계속 바다의 험함과 파도의 높음을 귀에 불어넣었으리라. 몽골과의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나라 처지로 척진 적도 없는 일본을 잡는 일에 끼어들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송군비는 몽골까지 사신들을 따라가서 일본을 굴복시키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험한 일인가를, 그리고 고려가 일본과 그리 친하지도 않아 몽골에 복속하라 설득할 능력도 없음을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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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을 이어온 최씨 정권은 무너졌으나 최의를 없앤 김준, 김준을 없앤 임연과 그 아들 임유무는 원나라에 반항적이었다. 자주성을 지키려는 것보다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목적이 더 강했겠지만 말이다. 임유무는 강화도에서 나가 개경으로 환도하려는 (출륙환도는 몽골의 오랜 요구였다) 왕 원종을 가로막았고 백성들로 하여금 다시 섬과 산성으로 들어가라는 명을 내리며 전쟁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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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제는 백성들도 지쳐 있었고 군인들도 힘이 빠져 있었다. 임유무는 몽골과의 항쟁의 상징같은 부대 삼별초 병력에 붙잡혀 목이 잘린다. 이때 임유무에게 충성하던 사람들도 화를 입는데 그 중에는 송군비도 포함돼 있었다. 비운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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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암산 정상에 오르면 동남쪽으로는 강원도 심심산골을 연상시키는 노령산맥의 첩첩산중이 펼쳐지고 서북쪽으로는 고창과 곰소, 변산과 전북의 평야지대가 일망무제의 바다처럼 펼쳐진다. 아마 송군비도 이 풍경을 둘러보았으리라. 문득 돌아보면 전혀 다른 풍경이 다가서는 산성 꼭대기에서 그도 고민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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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들의 경계처럼 육중한 선택을 요구하는 거대한 역사의 말발굽 앞에서, 무장으로서, 고려의 벼슬아치로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못할 일, 하면 안될 일들을 가늠했으리라. 입암산성을 역사에 등장시킨 무장 송군비는 퇴락한 성벽의 돌처럼 잊혀진 채 ‘구시대의 유물’로 취급되며 사라져 갔다. 그의 발버둥을 입암산 꼭대기, 갓바위에서 느껴 본다. 이 넓지 않은, 하지만 사연 많은 땅에 살다간 한 무장이 이 바위 위에 섰으리라 상상하며. 




백양사에서 만난 만암 길 따라 사람 따라 - 기행

백양사에서 만난 만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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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헌날 구박과 타박 받는 일이 잦긴 해도 아내와 함께 어딜 다녀오는 것은 즐겁다. 둘이 같은 개띠라 그런지 집안에 들어앉아 있으면 몸이 무겁고 발바닥이 아플 만큼 돌아다니고 집에 와야 쉰 제대로 쉬는 느낌이 나는 것이다. 아이들로부터 적당히 해방된 지금 주말만 되면 아내와는 무슨 명목으로든 돌아다니기 바쁘다. 지난 주말에는 <산과 자연의 친구 우이령 사람들>의 생태 답사에 부부동반으로는 두 번째로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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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그래도 꽃과 나무에 관심이 있는 편이지만 차가운 도시남자에 해당하는 나는 당최 ‘생태’에는 소질이 없다. 인문지리부터 생태식물에 이르기까지 박학다식한 답사 리더 밤재 선생을 따라 다니면서 주워들은 풍월은 꽤 많은데 다른 이야기들은 대충 기억하면서도 나무와 꽃, 풀의 사연은 뒤돌아선 7초 후면 까먹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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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아내는 나더러 기본적으로 정서가 메마른 자라 혹평하며 ‘생태 답사’에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어쩌랴. 인간도 생태계의 일원이고, 자연의 조화만큼이나 인간의 일상도 변화무쌍하고 신기하기에 내 관심의 발길이 그리로 쏠릴 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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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답사 코스는 장성 백양사와 입암산성, 그리고 다음날 새만금을 잇는 여정이었다. 백양사는 백암산 백양사라 일컫지만 내장산 국립공원에 속하고, 단풍으로 이름 높은 내장산 이상으로 그 화려한 단풍으로 이름난 곳이다. 절 초입에 있는 쌍계루와 그 앞의 연못을 찍어 페북에 올렸더니 뭇 사람들이 다투어 그곳의 가을 풍경을 논하는 걸 보니 그 유명세를 능히 짐작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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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단풍철은 아니었기에 그 정취를 느끼지는 못하였지만 푸르른 산과 하얀 암벽, 그리고 세월의 때묻은 기와 지붕과 붉은 기둥들이 연못의 수색(水色)에 흔들리며 비추이는 모습은 단풍철 아니어도 족히 사람 눈을 들뜨게 한다. 단풍철 주말에 다시 와 봐야지 하는데 옆에서 누가 오금을 박는다. “아서라. 톨게이트에서부터 여기까지 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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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사 입구로 이어지는 숲길은 굵직한 갈참나무와 단풍나무들로 빼곡하다. 그런데 묘한 향기가 난다. 귤 냄새 같기도 하고 유자 냄새 같기도 한 맛있게 시큼한 냄새. 식물 박사 밤재 선생에게 물으니 비자나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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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톤치드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이 나무의 북한계가 이 전남 장성 땅이라고도 했다. 이 비자나무로 만든 바둑판을 최고로 치고, 풍운아 김옥균도 비자나무 바둑판을 망명길에도 가지고 다녔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런 향을 내는 바둑판이라면 바둑알 가지고는 알까기만 한 나도 바둑을 배우고 싶어질 것 같다. 차제에 바둑을 배워 알파고와 자웅을 겨뤄 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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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사는 백제 무왕 때까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고찰이다. 원래는 산 이름 따서 백암사라 불렀는데 백양사(白羊寺)로 이름을 바꿨다. 조선 시대 한 고승이 설법을 하는데 양들이 몰려와 들은 이후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도 길 잃은 어린양들은 많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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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초입에는 이 절이 스승으로 모시는 고승들의 비가 서 있다. 가장 우뚝한 비석에 쓰인 글을 읽으니 ‘만암대종사 고불총림 도량’이다. 그리고 비석의 발치에는 만암선사가 자신의 화두였고 제자들에게도 깅조했던 화두 ‘이 뭣고’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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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암 선사는 백양사의 최근 역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다. 어머니의 태몽이 흰 양을 끌어안는 것이었다는데 백양사와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인연이었는가 보다. 만암은 조실부모 후 출가하였는데 엄청난 공부로 이름이 알려져 나이 서른 둘에 해인사의 대표 설법자, 즉 강백이 되기까지 한 사람이었는데 ‘이 뭣고’를 화두로 7년 정진한 끝에 득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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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암은 득도한 고승으로 산사에 틀어박혀 수행에만 정진하고 심후한 화두만 날린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가장 실천적이고 중생과 어울려 살았던 사람이었다. 백양사는 그리 부유한 절이 아니었건만 보릿고개가 오면 죽 쑤어먹을 정도의 식량만 남기고 죄다 사하촌에 풀어 버렸고, 그걸 갚겠다고 추수 때 사람들이 이고지고 오면 난데없는 둑방 공사를 벌여서 일을 시킨 후 노임으로 나눠 준 이야기는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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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도 후배 승려들 교육은 엄격하게 시켰고 또한 절 밖 산 아래 속세 교육 활동에도 열심이어서 경술국치 후 바로 광성의숙을 세웠고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의 초대 교장을 지낸 사람이다.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대처승이 불교의 주류를 이루던 시절에도 그를 물리치고 수행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던 그였으나 막상 조계종 종정이었을 때 대처승들을 절에서 즉각 몰아내자는 논의에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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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가를 교화승(대처)과 수행승(비구)으로 나눠야 한다. 대처승들에게도 활로를 열어 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백양사만 해도 만암과 그 제자 서옹 (후일의 조계종 종정) 외에는 다 대처승이었다. 그래서 법당 안에는 만암과 서옹만 들었고 나머지는 마당에서 예불을 드렸고 대처승의 경우 상좌(후계자)를 들이지 않는 등 점차 비구승들로 바꿔 가도록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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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이 “대처승을 절에서 몰아내라.”고 명령하고 비구승들이 공권력과 깡패까지 동원하여 대처승들을 몰아내고 절들을 접수하는 이판사판 야단법석이 벌어지고 조계종 젊은 승려들이 종조(宗祖)를 태고조사 보우에서 보조국사 지눌로 바꿔 버리기에 이르자 조계정 종정 자리를 박차고 백양사로 돌아왔고 얼마 후인 1957년 입적한다. 가장 원칙적인 사람이 가장 폭넓었던.....완강한 한국사람들의 역사에서는 매우 드문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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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편찮다는 소식을 듣고 제자가 달려왔다. 저녁 공양을 하는데 만암스님이 무심코 “저 녀석도 갖다 주어라”고 했다. 제자가 “저는 이미 밥을 먹었습니다.” 하니 만암은 천정을 가리켰다. “너 말고 또 먹을 놈이 저 위에 있어.” 방에 놓여 있던 그릇에 음식을 담아 천정에 놓으니 습관이라도 된 듯 쥐가 기어와 음식을 먹고는 그릇을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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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놈도 먹어야지. 그래야 조용하고, 내가 잠을 편히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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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웰컴투 동막골>에서 마을 사람들을 훌륭히 다스리는 이장에게 인민군 장교 정재영이 그 ‘령도력의 비밀’을 물었을 때 이장은 “뭘 잘 멕여야지.”라고 대답한다. 어쩌면 성불(成佛)의 시작도 중생들을 ‘잘 먹이는 것’에서 시작하는 게 아닐까. 사람부터 쥐새끼까지. 물론 그를 인도하는 이의 인생은 만암의 그것처럼 피곤하고 고단하겠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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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암의 손때가 묻은 대웅전 (1917년 건립)에서 만암 스님의 생전 모습을 본다. 깐깐함과 후덕함이 반반씩 뭉친 얼굴. 처진 입술은 단호하나 한풀 내려간 눈매는 순후하다. 백양사 대웅전이나 300년 된 극락보전 등을 우리가 오늘날 구경할 수 있는 것도 만암 스님 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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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때 빨치산 토벌을 위해 불태워진 절이 한둘이 아니거니와 백양사도 그 위기에 처했고 국군은 소각하겠다고 선언했으나 만암은 끝까지 버텼다. 그 후 전설은 여러 갈래지만 그 중 하나만 소개하면 국군은 짚더미를 쌓아놓고 불을 지르는 척하고 철수하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절에 불났으니 가서 끄라고 넌지시 말해 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한달음에 달려올라와 “부처님 같은 스님” 만암과 백양사를 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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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사 구경을 두루하고 돌아와 쌍계루에 오르니 다시금 숲과 물의 오묘한 어우러짐에 취하고 비자나무 향에 눈을 감는다. 단풍은 아직 오지 않았으나 불무릇은 타오르듯 피어올라 나그네의 마음을 건드리고 연못 곳곳의 잉어는 펄쩍이는 소리로 잔잔함에 파묻히는 고막을 간지럽힌다. 그 풍광을 차곡차곡 마음애 개며 걸음을 재촉하는데 ‘백양관광호텔’이 눈에 들어온다. 허어 10년 전, 2012년 ‘백양사 도박 사건’이 발어진 것이 저 호텔의 ‘스위트룸’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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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소개된 만암 선사의 ‘생쥐 공양’ 이야기에 등장하는 제자는 수산 스님으로 백양사를 중심으로 한 고불총림의 방방이셨는데 2012년 91세를 일기로 열반하셨다. 그런데 그 49재 이후 백양사 주지 등 8명이 이 호텔 스위트룸에서 판돈 수백만원의 도박판을 벌였고, 이걸 동료 승려가 몰카로 찍어 유포하면서 불거진 것이 ‘백양사 도박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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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풍경 보고 나와 한껏 흥에 취한 아내나 다른 사람들에게 이 말은 하고 싶지 않아 입을 꾹 다문 채 다음 목적지로 향한다. 10년 전 그날, 아마 만암 선사와 서옹 스님과 수산 스님은 극락에서 이 사바세계를 향해 이렇게 합창하셨으리라. “이 뭣고!” 다음 목적지는 입암산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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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책> 변방의 인문학을 읽고 산하의 오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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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역사와 지리의 파노라마 - <변방의 인문학>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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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냉면 매니아들이 많아졌다. 냉면에 저마다의 조예를 자랑하며 어느 집 냉면은 어떻고, 그 집 냉면은 무엇이 문제고 하는 이들을 심심찮게 만난다. 냉면 가락을 가위로 자르려 들면 기겁을 하며 평양냉면에는 쇠 대는 거 아니라며 뜯어말리고, 물색 모르고 “양념장 있어요?” 묻는 사람을 두고 무식하다 통탄을 하며 냉면에는 고춧가루조차 넣어 먹는 게 아니라며 훈계를 하며, 기타 ‘정통’ 냉면에 대한 노하우를 자랑하시는 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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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정통(?)이 평양 옥류관에서 와장창 깨지는 걸 보고 웃은 적이 있다. 한창 남북 분위기가 좋았던 몇 년 전 북한을 방문한 대규모 남한측 인사들이 옥류관에서 냉면을 먹는데 종업원이 말도 없이 냉면 가락을 가위로 툭툭 잘라 버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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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화들짝 놀란 남한측 인사에게 북한 종업원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기런 게 어딨습네까. 편한 대로 먹으면 되지요.” 뿐이랴. 양념장 넣어드실 분은 넣어 드시라고 따로이 양념장통을 내놓는 게 아닌가. “양념장을 넣어 먹으면 안되는 거 아니에요?” “입맛대로 드시문 됩네다. 안되는 게 어딨습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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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기서 한국적 변방(?)과 정통(?)의 특징을 본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중앙집권제의 역사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은 너무나 ‘정통’ 및 ‘중앙’ 지향적이다. 차라리 정통은 변화를 도모할 줄 알고, 현실에 따라 색깔과 모양을 바꿀 태세가 돼 있으나 오히려 변방이 정통의 고수에 집착하는 것이다. 어쩌면 한국 전체가 그럴지도 모른다. 분명 중국의 ‘변방’ 너머 있는 나라이지만 중국 전체가 변발을 한 뒤에도 수백년 동안 ‘소중화’를 자처했던 우리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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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중국의 ‘변방’과 ‘정통’은 좀 느낌이 다르다. 역대 중국 왕조 가운데 순수 (이 말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한족의 왕조라면 한나라와 송이나 명 정도다. 나머지는 죄다 변방(?) 출신들이거나 변방의 피가 면면히 흘렀던 이들이 세운 왕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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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중국의 거대한 땅덩어리를 만든 건 변방에서 일어난 만주족의 청나라다. 명나라 영토는 청나라의 반도 되지 않았으니까. 그렇듯 중국은 간혹 변방 출신들의 지배를 받고 그들의 에너지를 흡수하면서, 그리고 그 변방 출신들을 ‘중화’의 용광로에 빠뜨려 그 몸집을 불려왔고 또 다른 ‘변방’들을 만들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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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변방의 인문학>은 이 거대한 중국 대륙의 변방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관통하는 여행기이자 역사서다. 또 “인문학은 인간의 무늬”라고 한다면 변방 사람들이 화사하게 또는 조촐하게 새겨 놓은 무늬들을 샅샅이 훑는 휴먼다큐멘터리이기도 하다. 책 한 권에서 이렇게 다양한 장르를 섭렵한다는 것은 대단한 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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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도록 중국의 변방에서 자기들끼리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가끔 중국을 위협했고 중국 최후의 왕조를 차리면서 대륙 속으로 녹아들었던 만주족의 터전부터 그 만주족에 의해 거의 처음으로 중국의 영역에 편입된 신강(新疆), 지금도 모계 사회를 이루고 있는 운남성 모쒀족, 옛 선비족과 흉노의 터전들, 변방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었던 한족들의 자취, 그리고 변방 사람들 중의 하나로 나라 잃고 중국 대륙을 누비고 헤맸던 한국인 혁명가들까지, 이 책의 범위는 넓고 내용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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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의 풍광과 절경들을 유려하게 묘사하다가도 그 풍경 속에 숨은 역사의 고개를 불쑥 들게 하고, 그 역사의 파도를 타거나 휩쓸렸던 이들의 이야기를 능숙하게 녹여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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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중국 소림사에 촬영갔다가 별안간 “한국에서 오셨습니까?” 유창한 우리 말로 묻는 소림사 승려를 만나 기겁을 한 적이 있다. 조선족 스님이었다. 연변이 고향이라는 그가 어떤 경로로 하남성 소림사까지 흘러들었는지를 세세히 들으면서 참 사람의 운명은 거칠고 인연이란 기구하다 싶었지만 이 책에도 그런 사람들이 간간히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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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욕관은 감숙성에 있는 만리장성의 서쪽 끝 관문이다. 북경까지 날아가서 운때맞게 비행기를 갈아타더라도 당일 도착이 어렵다는 가욕관까지 조선 상인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 19세기 말, 문초운이라는 조선 상인이 가욕관 근처에서 청나라 관헌에 덜미를 잡혀 조선으로 송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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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헌부의 문초에서 문초운은 사신단으로 청나라에 갔다가 병에 걸려 떠나지 못하고 거지 같이 살다가 왔다고 징징댔지만 청나라 기록에는 그렇지 않다. 가욕관까지 홍삼을 짊어지고 장사를 하다가 일종의 불법 무역으로 걸려 송환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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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무슨 심산으로, 또 어떤 경로로 홍삼을 들고 가욕관까지 진출했는지 모를 일이고, 조금의 상상력을 덧붙이면 한 편의 영화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정도로 가욕관을 묘사하고 가욕관의 조선인을 소개하는 정도라면 범상한 여행기에 그칠 것이다. 하지만 저자 윤태옥은 한 발 더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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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초운이 청나라 관헌에 체포되던 바로 그즈음, 가욕관 넘어 신강에서 무시무시한 반란이 일어났고, 청나라는 진압 과정에서 중앙아시아에 진출한 러시아와 대립했고 무력 충돌의 전망까지 나왔다. 당시 청나라 주재 영국 공사 케네디는 러시아가 청나라를 선제 공격할 것이라고 보고하는데 그 첫 공격 목표는 청나라가 아니었다. 글쎄 조선의 영토 원산이었다. 러시아가 무척 탐냈던 영흥만 일대에 대한 야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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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옥은 가욕관을 소개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설명하고, 풍경을 그린 듯 펼쳐 보인 다음, 그곳의 조선인 밀무역자를 통해 당시의 긴박하고도 비참한 역사 (당시 조선 지배층은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조차 몰랐던)를 통해 오늘의 현실까지 조명하는 능력을 발휘한다. 언뜻 어색할 것 같은 흐름들이 매 장마다 펼쳐지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고 그 이음매는 오돌토돌 하나 없이 매끄럽다.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다양한 주제를 문장에서 덜컥거리지 않고 내용에서 고개 갸웃함이 없이 일독휘지(一讀揮之)하게 해 주는 책도 실로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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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얘기를 좋아하고 역사 얘기 하기를 즐기는 사람 중 하나로서 이런 방대하면서도 섬세하고, 유장하면서도 꼼꼼한, 작품, 사람으로 씨줄 삼고 역사로 날줄 삼으며 지리와 풍경으로 무늬를 삼은 역작을 감상하게 된 자체를 행운으로 여겨야 마땅하고 경의를 표해야 응당하지만 먼저 일어나는 감정은 질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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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런 여행을 하겠노라고 생각할 수 있었으며 그를 단행할 수 있었으며, 이런 책으로 후학의 열등감을 자극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질투만 가지고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이제 몇 분 뒷면 다가올 2022년에는 가능한 발품을 팔아 세상을 더 볼 것이고, 그때마다 더 꼼꼼히 본 만큼 생각하고, 생각한 만큼 끄적이기를 멈추지 않으리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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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올해의 버킷 리스트 중 하나를 만들어 준 책, <변방의 인문학> 읽어 보시라. ‘역사와 지리와 인간의 파노라마’가 무엇인지 알게 되실 것이다.

문구: '변방의 인문학 길 위에서 읽는 중국 그리고 그 너머 역사의 땅, 중국 변방을 가다 윤태욕지음 시대의창'의 이미지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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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의 우동집을 다녀와서 썸데이서울 - 이런저런 얘기들

후배의 우동집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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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노동운동이 가장 결의와 희망에 찼던 순간이라면 개인적으로 1988년 11월 13일의 노동자대회를 들 것 같다. 단병호 이하 노동자들이 피로 쓴 ‘노동해방’ 플래카드를 들고 그 뒤로 수만 명의 노동자와 학생들이 행진하며 연세대학교에서 여의도까지 누볐던 날이다. 그날, 선봉의 혈서를 쓴 사람들 가운데에는 ‘세창 깡순이들’로 유명했던 세창물산 여성 노동자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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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창물산은 노동 탄압으로 이름이 높았고 파업 투쟁 와중에 여성 노동자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고사였다. 그녀는 플래카드를 걸기 위해 지붕 위에 올라갔다가 지붕이 무너지면서 목숨을 잃었다. 이 세창물산의 투쟁과 나는 모기 눈곱만큼의 인연이 있는데 동아리에서 세창물산 투쟁을 그린 방현석의 소설 <새벽출정>을 노래극으로 만들어 올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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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주인공격으로 두 명의 여학생이 나섰다. 한 명은 <진혼곡>으로 낙양의 오선지가를 올렸던 김영남이었고, 다른 한 명이 89학번 후배였다. 둘이 <잘가오 그대>를 이중창할 때의 울림은 지금도 가끔 기억 회로를 건드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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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소리 난다고 혼나기는 했으나 89학번 후배의 음색도 노래패랍시고 앰프나 날랐던 나를 비롯한 떨거지들과는 완연히 달랐었다. 직선으로 말해 ‘카수’였다. 유독 노래 잘하는 이들이 많아서 술집에서 다른 팀으로부터 기립박수와 함께 안주를 받아먹었던 89학번들 가운데에서도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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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후 다 뿔뿔이 흩어져 제 먹고 살길 찾고 짝 찾고 아이들 낳아 기르고 등등 부산한 와중에 연이 짧아진 사람도 있고 엷어진 사람도 많았다. 이 89학번 후배도 그 중 하나였다. 들리는 소식은 거의 유이무삼하게 ‘노래’를 자신의 삶의 도구로 삼고, 투쟁의 무기로 엮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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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공장> 그리고 <천지인>이 그 활동 무대였고, 그들이 수명을 다한 뒤에는 부군 되는 사람과 함께 ‘엄보컬 김선수’로 어려운 사람들과 갑갑한 현장을 다니며 노래로 그 원기를 북돋워 준다고 했다. 선수는 뭐냐고 하니 아코디언을 기가 막히게 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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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강아지 눈물만큼도 영향을 주지 못한 모범적이지 못한 선배임을 전제로 하고, 나는 이 친구의 신입생 시절 첫 세미나 간사였다. 그러다보니 그 활약(?) 얘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 한켠이 미안함도 아니고 부채감도 아닌 미묘한 무거움이 항상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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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고 사방에서 자영업자들의 비명이 들리는 이 엄혹한 시기에, 이 친구가 남편과 함께 우동집을 열었다는 뉴스를 듣고 깜짝 놀랐다. 아니 어떻게 이런 때 개업을 할 생각을 하지? 우동은 대체 누가 한다는 거야? 처음 소식을 전해 준 친구에게 캐묻다가 마침 저녁 시간을 맞춰 방문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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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역에서 내려 내 걸음으로 10분 가까이 걸었으니 역세권은 아니었고, 대로변도 아니었다. 이름마저 장사하겠다는 센스는 별로 없어 보이는 ‘홍제 우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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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한때 낯익었던 작은 몸집의 홀 담당(?)이 보였다. 신입생 시절 제일 먼저 동아리방에 와설랑 돼지우리보다 한 등급 정도 위였을 동아리방을 번쩍번쩍 청소를 해 놓아서 사람들을 놀래켰던 재빠름이 여전히 살아 있었다. 원래는 불러 놓고 술 한 잔 주고 싶었는데 혼자 주문받고 서빙 보면서 동분서주하는 사람을 그럴 수도 없어 음식만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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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 가격들이 높지 않아서 먹을 수 있는 한 골고루 시켜 봤다. 원래 아무거나 가리지 않는 혓바닥이지만 내 혀에는 유달리 맛있는 음식에는 확실히 반응하는 미식가의 DNA가 있다. 시장통 옷 속에서 보디가드 팬티가 숨어서 빛나듯, 때가 되면 발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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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 우동을 처음 입에 넣었을 때 그 DNA가 슬금슬금 기동하는 게 느껴졌다. 무슨 배짱으로 이런 시기에 개업을 했냐고 끌끌 차던 혀가 “믿는 구석이 있었구만” 찬탄을 절로 지어 낸 것이다. 면은 탄력있게 낭창낭창했고 “눈툭멸 (눈 툭 튀어나온 멸치냐고 했더니 웃었다. 뭔지 모르겠다.), 고등어, 정어리 기타 등등 니라니라 여러 재료를 배합해서 만들었다는 육수는 국물을 말끔히 비워낼 만큼 날렵하게 맛났다. 다른 튀김들도 술안주로 좋았지만 술안주로 시킨 카레우동도 감동이었다. “카레 전문점을 해도 되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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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은 남편이 한다고 했다. 아니 그 ‘엄보컬’님은 언제 이런 걸 배웠다냐 하니 한때 한국에 진출했던 마루가메(丸亀)제면에서 오래 일하면서 그 기술을 익혔다고 한다. 어느 프랜차이즈 회사에 다닌다고 그 음식을 안다는 것은 무리일 터, 특별한 자리에 있었든지 특출한 관심과 의지를 발휘했던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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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가메가 몇 년 전 일본이 무역 보복하고 그럴 때 피해를 엄청 봤고 코로나 때문에 치명타 맞고 철수했거든요. 그래서..... ” 나쁜 놈들 응징하겠다고 엄한 사람들 피해 줬던 성격이 강한 ‘일본 불매 운동’의 유탄을 맞았던 셈이다. 광복절날 일식집 주인이 문을 닫는 게 무슨 장한(?) 일로 신문에 나던 시기가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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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내게 일본 음식은 글자 그대로의 ‘별미’(別味)다. 차라리 양식으로 하루 세 끼 한 달을 먹으라면 먹겠는데 일식으로 그러라면 자신이 없다. 즉 가끔 먹을 때 가성비와 만족도가 극대화되는 음식이라는 뜻이다. 이 집 우동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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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안을 싸고도는 건건하고 짭잘한 뒤 끝에 감도는 감칠맛과 뭣보다 성의가 느껴지는 면발은 이미 열 대여섯 시간이 지났어도 그 느낌이 입에서 가시지 않는다. 조금만 가까웠으면 후배가 하는 집이라서가 아니라 맛집으로 삼고 들러서 해장도 하고 끼니도 채우면서 미식을 즐길 수 있었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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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시켰더니 그럼 너무 많이 시키는 거라며 주문량을 줄이자 같이 간 친구가 “돈 벌 자세가 안돼 있구만! 그냥 네! 하고 내오면 되는 거지!”하며 타박 아닌 타박을 하자 이 ‘김선수’ “돈 많이 안벌어어도 돼” 하며 의연하다. 그래도 시작했으니 돈 많이 벌어야지 말을 보태다가 문득 “노래는 이제 안해?” 물었다. 그러자 김선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계속 할 거예요. 틈만 나면, 필요한 데 있으면 가서 할 거예요. 우리 남편도 그럴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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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보컬과 김선수’의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서 문득 저들의 활약을 직접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필요한 데’에 가서 아코디언 켜고 노래 부르며 “다 잠든 밤에 그 가슴에 남모르게 치솟는 불같은 노래를, 꽃지듯이 떠난 이들의 큰이름을 소리높여 부르는 노래를‘(양성우 시, 친구를 위하여 중) 불렀던 그들의 모습을 눈에 담은 적이 없다는 점에 또 한 번 껄쩍지근한 감정이 솟아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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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동 근처에 사시거나 직장 있으신 분들은 꼭 한 번 들러 보시기 바란다. 위치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래서 지금도 노래로 사람에게 힘을 주는 일을 포기하지 않은 부부가 담아내는 우동 한 그릇 맛보시기 바란다. 이건 후배의 음식에 대한 주례사 칭찬이 아니다.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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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2명의 이미지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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