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의 짜증

 게시판 아래 잠자고 있던 옛글을 송진우 선수의 은퇴 선언을 듣고 길어 올립니다..... 참 훌륭한 선수였습니다. 


 
교양 PD란 원래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나 그 외 유명인사들과는 인연이 전무하다시피 합니다. 그래서 어린 조카들이나 철없는 친구들이 연예인 사인 받아달라고 성화를 부릴 때면 무척 곤혹스럽지요. 며칠 전에는 누가 UN 운운하길래 “국제연합 말이냐?”라고 물었다가 아주 선사시대 방송사 PD 취급을 받았더랬습니다. 몰랐는데 그런 가수가 있다더군요.


스포츠와 관련해서는 그래도 UN을 국제연합으로 알아듣는 수준은 아닙니다만, 스포츠 스타를 독대하는 등의 행복한(?) 경험은 전무하다시피 합니다. 그래도 단 한 번의 예외가 있긴 했습니다. 2000년 설 연휴를 전후한 프로야구 선수협 파동 때였지요.


 선수협 소속 선수들이 모인다는 잠실 경기장 옆 작은 공터에 들어왔을 때 저는 약간 황당해졌습니다. 마침 송진우 회장님이 자체 훈련 시작을 선언하는 참이었는데 그 훈련이란 다름아닌 축구였기 때문입니다. 배팅을 하거나 캐치볼이라도 할 운동장을 구하기가 어려웠고 (야구부 있는 어느 학교에서 프로구단에 찍히려고 하겠습니까?) 그렇다고 ‘집에 누워 있을 수도 없어서’ 그렇게라도 모여 동군서군 나누어 축구 올스타전을 벌이기로 한 거라더군요.

 유니폼은 각자 속한 구단의 유니폼...... 양준혁은 이제는 추억이 된 빨간 상의에 까만 바지의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고, 최태원은 그때까지는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쌍방울 레이더스 옷을 입고, 그 외 각각 자신들의 유니폼을 입고 야구공 아닌 축구공을 쫓아 이리 뛰고 저리 뛰었습니다.


제가 가장 먼저 말을 걸었던 것은 최태원 선수였습니다. 당시 연속 출장 경기 기록을 이어가던 그로서는 선수로서 홈런왕보다 더한 영예로운 기록이 이어지느냐 끊어지느냐의 기로에 서 있었죠. “아마 이어갈 수 있을 거예요. 못이어가면........ 할 수 없지요."

 그 말고도 그곳엔 그야말로 기라성같은 사람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공을 차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전문 방송인이 된 강병규 (2009년 주 : 지금은 거기서도 또 퇴출 위기에 몰렸지만) , 위풍당당이라는 이름의 자신의 팬클럽이 어떤 격려 선물을 보냈노라 자랑하던 양준혁, 미스터 롯데 마해영, 술취한 듯 건들거리지만 기가 막히게 공을 쳐내던 박정태, LG의 샛별 김재현 등등 그야말로 쟁쟁한 얼굴들이었지요.


 협상 테이블에서 입 다물고 앉아 있기만 해도 고액의 연봉이 보장될 그들이 왜 이렇게까지 나서게 되었을까. 저는 뭔가 엄숙한 발언 내지는 숨겨진 속사정을 기대하면서 선수협 회장님 송진우 선수에게 그 이유를 물었는데 송진우 회장님은 갑자기 짜증을 버럭 냈습니다.

 "고액 연봉자들이 왜 이러느냐구요? 그 질문 백번도 더 듣겠네. 아니 당연히 우리가 총대를 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게 그렇게 이해 안돼요? 연봉 천 만원 받고도 감사합니다 하는 애들이 이런 거 할 수 있겠어요? 우리한테도 지금 이렇게 대하는데 걔들이 나서 봐요. 어떻게 되나."


프로야구 2군을 취재한 적도 있고, 프로야구 3군(?)이라 할 연습생 테스트 광경도 지켜본 바 있어서 화려한 갈채 뒤에 드리워진 그림자들의 칠흑같음을 대충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선수협 따위의 말을 꺼낸 순간 그 보따리가 발치에 내동댕이쳐지리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때 송진우 선수에게 그토록 어리석은 질문을 던졌던 것은 웬만큼 자신의 영역을 구축한 사람들이, 비록 더 큰 힘 앞에서는 미약하기 그지없겠지만 나름대로 영향력을 가진 이들이 자신보다 못한 처지의 사람들을 위해 뭉치고, 자신의 인생을 걸지도 모를 싸움을 건다는 것 자체가 제게 생경한 풍경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합니다.


 툭하면 학교 문 닫아버리겠다는 요즘의 사립학교 주인들처럼, 프로야구가 자신의 사유물(私有物)인 양, 여차하면 프로야구 걷어치워 버리겠다며 각 구단들을 살기를 돋우고 있었고 선수협을 제외한 각 구단 선수들은 서둘러 전지훈련을 떠났었지요.

 몸으로 돈을 버는 선수들에게 겨울을 하릴없이 보내는 것은 “천천히 독을 먹는 것과 같았” (송진우 선수의 말)지만 선수들은 꿋꿋이 그 협박과 외면에 맞서고 있었습니다. “괌에 가 있든 사이판에 있든 가 있는 사람들 마음은 우리하고 똑같을 겁니다.”(박정태 선수)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말입니다.

 전태일 열사가 위대한 점은 그가 숙달된 재봉사로서 그런대로 대접을 받을만한 위치에 이르렀었지만, 그의 작은 성취라는 이름의 못으로 스스로를 못박지 않았으며 그의 아래를 결코 깔아보지 아니했다는 점에 있을 겁니다. 그래서 끝내 그의 ‘이상의 전부’였던 평화시장의 동심 곁으로 돌아가,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전부 다” 바쳤다는 점에 있을 겁니다.

 작년 세밑, (2004년일 겁니다... 2009년 주)  또 한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죽기 전 그가 무섭다고 고백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비정규직이라는 직업’ 자체였습니다. 과연 그들에게 ‘정규직’들은, 그들의 방패이자 칼인 ‘정규직 노조’는 그들을 지키기 위해, 그들과 나누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하였을까요. 물론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노조가 행동에 나선 순간 그 자체가 불법이 되는 희한한 나라 대한민국에서 노조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많지 않을지도 모르고, 그래도 정규직 명찰 달고 있답시고 아랫목만 파고드는 구성원들을 끌어내는 것이 쉽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미약하나마 가진 힘을 그들보다 더 미약한 이들을 위해 써 주지 않는다면 결국 그 다음 차례는 그들 자신이 되지 않을까요. 산더미같은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에서 필사적으로 구조를 요청하는 사람들에게 그래도 여유가 있는 구명 보트 위에서 “큰 배 오면 함께 타자”는 연대 호소는 소라 껍데기보다도 못할 것이고, “저 큰 배에서 여유있게 노는 놈들 때문에 우리가 이 모양이다!”는 분노는 정당할지 모르나 당장은 지푸라기만한 무게도 갖지 못하게 되지나 않을까요.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는 힘과 부의 불균형, 그리고 그 속에서 분화되는 사람들의 층층이 명명백백하게 갈려 나가는 요즘, 위기의 사람들은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 싸~한 풍경을 지켜보노라면 몇 년 전의 추운 겨울날 한 어리석은 PD의 질문에 환장하겠다는 듯 답답해하던 뭉툭한 인상의 한 야구선수의 말이 자꾸만 귓전을 때립니다.

“아니, 당연히 우리가 총대를 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게 그렇게 이해 안돼요? 연봉 천 만원 받고도 감사합니다 해야 되는 애들이 이런 거 할 수 있겠어요? 우리한테도 지금 이렇게 대하는데 걔들이 나서 봐요. 어떻게 되나."

 영하의 추운 날씨, 어디서 연습장 하나 글러브 배트 하나 빌리지 못한 채 바람 빠진 축구공을 향해 사력을 다해 달리고 뒹굴던 스타 플레이어들이 무척이나 아름답게 되돌아봐지는 요즘입니다.

by 산하 | 2009/08/17 16:01 | 썸데이서울 - 이런저런 얘기들 | 트랙백(2)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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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인생은 비정규직 at 2009/08/17 21:29

제목 : 회장님의 은퇴
화ㅣ지ㅏ나ㅣㅁ 수고 마ㅣㄶ으셨습니ㅏ디ㅏ,.아ㅣㅇ으아ㅣㅇ;다ㅣㅇ사ㅣㄴ은 저으ㅏㅣ 영웅아ㅣㅂ니ㅏ다ㅣ,. 아ㅣㅈ자ㅣ아ㅣㄶ겠ㅅ브니ㅏ다ㅣ,....more

Tracked from 제이의 소소한 일상 at 2009/08/24 16:06

제목 : 송진우 선수 은퇴
회장님의 짜증 야구에 대해 손톱만큼의 관심도 없는데 갑자기 왜 송진우 선수에 관한 글을 트랙백하냐면 말이지...그것이 최근 송진우 선수가 운영한다던 집 근처 음식점이 폐업한 걸 본지 며칠 안되서.뭐야뭐야뭐야. 엄청 훌륭한 아저씨였잖아.그런데 음식점 폐업과 선수생활 은퇴라니, 은근히 걱정되네;.그리고 일제고사 대신 체험학습 안내를 해서 파면된 선생님들, 국세청 게시판에 국세청의 무리한 세무조사에 대해 비난하고 해고된 공무원, 대운하에 ......more

Commented by Ezdragon at 2009/08/17 16:34
송회장님의 저 말씀은 정말 가슴에 박히네요.
Commented by 산하 at 2009/08/19 08:34
제 가슴 속에선 녹슬어 가고 있답니다 박힌 채
Commented by 고은새 at 2009/08/18 23:17
무척이나 지친 하루... 산하님 글에게 위로 얻어서 나갑니다. 링크하고 글만 읽고 오늘서야 덧글 달아 봅니다.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Commented by 산하 at 2009/08/19 08:35
말씀 감사합니다. 님의 말씀에서 저도 위로를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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