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에 끄적인 것인데..... 인터넷에서 글 장난하기 시작한 초반이라 그런지 감회가 새롭네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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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맥 이쪽이 소백산맥 저쪽에게
- 어떤 돌이킴
제 아버지 고향은 함경북도이고 11살 되던 해 1950년, 눈보라 휘날리던 바람찬 흥남부두에서 배타고 나오셨습니다 이후 대구 (그래서 제 본적은 대구죠) 제주, 거제도 등 각지를 주유하시다가 서울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셨고 "반드시 서울 색시를 얻겠다."는 각오로 노총각을 고수하시다 서울 토박이였던 저희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신 후 직장을 옮기면서 부산에 정착, 지금까지 살아오셨습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지난 이력을 주워섬기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지금까지 제게 보여 주셨던, 그리고 제가 지켜보았던 아버지와 그 주위 분들의 모습을 통해서 지긋지긋하고도 꺼내기조차 난처한 화두인 '지역감정'의 한 단면을 이야기해 보기 위해섭니다.
도대체 부산 사람들의 그 고집불통의 지역색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하루에도 두어번은 듣는 요즘, 저는 내심 과거 아버지께서 '지역색'을 드러냈던 기억의 퍼즐들을 맞춰 왔었습니다. 따라서 물론, 지금부터 늘어놓는 소리들은 지역감정에 대한 과학적인 해명은 전혀 될 수 없겠습니다. 그러나 토박이는 아닐지라도 뜨내기 부산사람으로 수십년을 살아왔던 아버지와 그 밑에서 머리가 굵어졌던 저의 추억 역시 그 얽히고 설킨 지역감정의 속을 들여다보는 아주 자그마한 틈은 될 수 있을 겁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그 일이 있을 때... TV 아나운서는 광주에서 불순분자들이 퍼뜨린다는 유언비어의 실례를 주욱 읽어 주고 있었습니다.
"계엄군이 여학생의 가슴을 찔렀다." "도청 지하엔 시체 몇 구가 안치되어 있다"
"계엄군이 탱크로 몇 명을 깔아뭉갰다.." 등등의 리얼한 내용의 '유언비어'가 광주 시내 일원에 떠돌고 있다는 것이었는데 그 중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들 씨를 말리러 왔다“
온몸에 소름 돋은 채 TV를 지켜보던 열 살난 소년이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저게 무슨 소리냐??
“경상도하고 전라도가 사이가 원래 안좋아.”
“왜요?”
“음...... 거 뭐냐 신라 백제 알지? 그때부터 그랬어.”
열 살난 꼬마에게 ‘신라 백제’론은 아주 훌륭한 대답이었죠. 사실 우스운 이야긴데 더 웃기는 건 지금도 이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사람 많다는 겁니다. 대충 술자리에서 '지역감정의 뿌리가 뭘까?' 안줏꺼리로 물어본다면 어김없이 ‘신라 백제’ 이야기하는 사람 꼭 있습니다. 어쨌건 그 '신라 백제론'은 제가 ‘지역감정’을 처음 접한 순간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신라 백제’론은 그만큼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그것이 “뿌리깊은” 전통(?)이라는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겠지요. 얼마 전 개봉된 영화 '황산벌'에선 계백과 김유신은 전라 '앗싸리하고' '학실하게' 영호남 사투리들을 쓰고 있지 않습니까.
언젠가 전라도에서 어떤 아이가 동네에 이사 왔을 때 동네친구들은 그에게 바로 ‘깽깽이’라는 별명을 붙이더군요.
“와 깽깽이라카는데? 깽깽이가 뭐꼬?”
“절마 전라도에서 왔다 안카나. 그라이 깽깽이지.”
“전라도에서 왔는데 와 깽깽인데?”
“몰라. 하이튼 깽깽이라 앙카나.”
아이들은 그 이유를 모르는 채 깽깽이라는 말을 쓰고 있었고 이미 그것이 그 사람을 비하하는 말임을 체득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다 아는 걸 모르고 있다는 열등감(?)에 시달린 저는 퇴근하는 아버지께 인사도 않고 소리높이 물었습니다.
“아부지 깽깽이가 뭐에요? 전라도가 왜 깽깽이에요?”
뜻밖에도 자초지종을 들은 아버지는 저를 무척 혼냈습니다. 그 말 어디서 들었느냐... 친구한테 그런 말 쓰는 거 아니다. 한바탕 혼난 뒤에도 예나 지금이나 궁금한 것 못참는 저는 동네 형들한테 찾아다니면서 물어 궁금증을 해결했습니다. 해결한 뒤의 부산물이 오히려 더 많았습니다. ‘하와이’니 ‘개땅쇠’니 전라도 사람을 빗대는 비칭이 깽깽이 외에도 많다는 것, 그리고 전라도 사람에 대한 다양한 정보(?)까지 말입니다. 이른바 ‘밥상머리 교육’이죠. 전 밥상머리에서 받은게 아니라 동네어귀에서 배웠습니다만.
이를테면 “전라도 사람들은 면전에서는 간이라도 빼줄 것 같은데 뒤통수를 치는데 선수다.” “전라도 사람들은 겉다르고 속다르다.” “음식하고 거짓말 하나는 끝내주게 한다.” 등등.....
즉, 제가 어렸을 적만 해도 이른바 ‘지역감정’의 감염통로는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밥상머리 교육’을 받은 적도, 아버지가 지역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신 적이 없으니까요. 언젠가 가족끼리 전라도 일주여행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되레 제가 ‘전라도’라는 곳에 처음 가는 것에 대해서 약간의 우려를 표했을 때 아버지가 코웃음을 치면서 “그런 거 없다. 사람은 다 똑같다.”라고 일축하신 적도 있습니다.
이건 제가 보기에도 상당히 합리적이신 아버지의 성품 탓도 있을 것이고 아버지께서 일하시던 회사의 사장이 전라도 출신이었고 따라서 그 직장에 전라도 사람들이 평균치 이상 포진해 있었던 배경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다행히도 제 친구들에 비해서는 ‘전라도’에 대한 편견을 거의 주입받지 않고 자랄 수 있었지요. 빨간색 상의에 까만 바지 입은 해태 타이거즈는 웬지 보기 싫었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래서 하늘색 유니폼의 롯데가 해태한테 만판 깨지면 기분이 저윽이 상했던 것도 사실입니다만.
87년 겨울..
뜨거웠던 6월 항쟁이 가시고 789 노동자 대투쟁이 잦아들고 본격적인 대선 국면으로 접어들었을 때 고려대에서 김대중과 김영삼이 서로를 외면하는 사진이 신문 1면에 실렸을 때, 이른바 김대중의 4자 필승론과 김영삼의 군정종식론이 서로에게 소리없는 스트레이트로 날아들 때, 아버지의 분위기는 지금 기억에 놀랄만큼 많이 바뀌었습니다. 아니 아버지가 바뀐 게 아니라 주위 사람들 모두가 바뀐 듯 했습니다.
“부산 남바(넘버) 달고 광주 갔더만 아 주유소에서 기름을 안넣어 준다 카네. 주유소 주인이 나와가 김대중 선생님 만세 세 번 부르면 넣어 준다 하능기라.” 이 말은 가장 대표적으로 떠돌았던 유언비어입니다. 이 유언비어는 제가 여러 사람에게 들은 기억이 나는데 그 공통점은 그들의 가장 가까운 누군가가 직접 당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자신이 그 꼴을 당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저희 아버지조차 그랬습니다. “너도 아는 **상사 박 과장 있잖아. 그 사람이 당한 얘기라니까. ” (며칠 뒤 만난 박 과장님은 자기가 아니고 자기 처남 얘기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들은 피해담(?)의 주인공들만 해도 수십 명은 되었을 것이고, 저 주위에 그런 말 안들은 사람이 없었던 것으로 볼 때 아마도 선거철을 전후해서 수천 명의 부산 시민들이 차를 몰고 전라도를 방문했고, 하필이면 기름이 떨어져, 그것도 재수없이 돈도 마다하고 김대중 만세를 부르라는 김대중 광신도의 주유소에 들렀다는 재미있는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만, 문제는 그 전파 속도는 빛과도 같았고, 그것이 설마?에서 역시!로 전이되는 속도는 광속을 돌파했다는 점입니? ?
김대중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모조리 “너 ‘라도’냐?”라는 질문을 받았고 실제 전라도 출신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전 그때 동네 이발소 아저씨가 ‘라도’였다는 걸 처음 알았고 우리가 축구할 때 시끄럽다고 맨날 아우성치던 아줌마도 ‘라도’라는 것도 자연스레 알게 됐지요. 실험실의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전라도 사람들은 또렷이 구별되기 시작했습니다. 제 학교 동기 중에 이동화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자기는 김대중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말을 꺼내는 순간, 주위에 있던 대여섯 명이 놀란 눈초리와 목소리를 모아 그에게 내던졌습니다.
"니 전라도가?"
71년도에 김영삼이 양보했으니 이번엔 당연히 대중이가 양보해야 한다는 것이 부산 사람들의 확고한 인식이었습니다. 아니 혹시 그러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반작용이었는지도 모르지요. 마침내 김대중이 통일민주당을 깨고 또 하나의 민주당 평화민주당을 창당한 순간, 그는 노태우보다 더 미운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기꾼...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시키, 결정적인 순간에 뒤통수 치는 놈, 역시 라도 맞구만..... 그리고 그는 하나의 아이콘이 되어 갔습니다. 한때 신민당 창당 대회 때 김대중의 연설 테잎을 듣고 환호와 박수를 보냈던 부산 시민들이었지만 이제 김대중은 전라도 깽깽이들의 ‘교주’로 받아들여졌고 때마침 안기부가 만들어 냈던 ‘동교동 24시’는 동네 문방구에서도 ‘동교동 24시 판매!’를 써붙여 놓고 팔 정도로 공전의 히트를 쳤습니다.
그 위에 기름을 부었던 몇 몇 사건들이 더 있었지요. 김영삼의 광주 유세 시 보였던 군중들의 위협적 행동이 그랬습니다. 전남대 총학생회장이 올라가서 이러면 안됩니다 하고 절규를 해도 돌들은 계속 날아왔었고 마침내 몰려드는 군중들 때문에 연단이 기우뚱했었습니다. 그리고 김영삼은 연설도 못한채 대한민국 만세 삼창을 하고 내려왔었지요. 김대중씨도 물론 부산에서 푸대접 받긴 했습니다만 그 정도는 아니었지요. 이날, 대학 입시를 한 달 앞뒀던 고3 수험생의 일기 한 자락 펼펴 보면 이렇습니다.
“오늘 광주에서 전라도 사람들이 김영삼씨 유세를 박살냈다. 대체 그 대가리엔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 걸까. 김대중씨가 부산에서 당한 것에 대한 복수? 그것치곤 좀 심했다. 하여간 묘하다. 남북 갈라진 땅에 이젠 동서까지 이렇게 갈라지냐....”
그리고 며칠 뒤 노태우 후보의 전주 유세..... 수백 명의 학생들이 각목을 들고 연단을 향해 돌진합니다. 문제는 부감 카메라가 (높은 지대에서 내려다보며 촬영하는 그림) 그들을 생생하게 잡고 있었다는 겁니다. 도대체 그 카메라는 어떻게 그렇게 멋진 그림들을 잡아낼 수 있었을까요? 그 카메라가 부감을 찍기 위해 어느 건물 옥상에 올라갔을 때, 때맞춰 학생들이 돌진을 해 온 걸까요? 과연 학생들이었을까요? 아무튼......
바로 그때 둘러앉아 있던 동네 아저씨들 입에서 황당한 말이 튀어 나왔습니다.
“저런 미친 놈들... 저러니까 총맞았지.”
조금 거슬러 올라가 85년 2.12 총선 때 ‘광주’는 부산에서도 역시 크나큰 화두였습니다. 모든 신당 후보(당시 신한민주당이었죠?)들은 유인물에다 “보라 광주의 이 끔찍한 광경을!”이라며 시커멓게 처리된 사진을 싣고 있었습니다. 뒷날 보니 그 사진은 공수부대원이 고개 숙인 대학생의 머리 위로 곤봉을 치켜든 그 사진이었더군요. 광주항쟁 사진전이라도 열릴라치면 구름같은 사람들이 모여들기도 했구요.
아버지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80년 광주는 전두환이가 정권 잡으려고 본보기로 족친 것...”이라고 하셨고 제가 그럼 시민들은 죄 없네요? 반문을 했을 때 아버지는 분명히 “4.19 때 죽은 사람들은 뭐 죄 있냐?”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러니까 총 맞았지”라고 누군가 뇌까릴 때 아버지는 맞장구까지는 아니었지만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변해 가고 있었던 겁니다. 아니 어쩌면 전두환 정권의 말도 안되는 폭정과 그 기간 속에 끓어올랐던 열기 속에서 감추어졌던 속내가 드러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김대중씨 생애의 가장 큰 실책 중의 하나가 그 당시 “4자 필승론” 아닌가 싶습니다. 경상도 포기를 전제로 호남 표와 수도권 표를 얻겠다는 발상은 (4자 필승론이 그게 아니었다면 뭐 할 말 없습니다만 부산 사람들은 분명히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지요) 명백한 지역 분할론의 원조였다고 생각합니다. 전두환 정권은 오히려 그걸 즐기고 있었는지도 모르죠. 펌프질을 한일 자동 펌프 갖다 놓고 해 대면서 말입니다.....
결국 6월 항쟁 때 누가 누가 잘 싸우나 대회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하던 부산의 열기는 엉뚱한 방향으로 번졌습니다. 김대중과 전라도 혐오라는..... “죽 쒀서 개 줄라”라는 우려가 “개를 주면 줬지 니는 못주겠다”는 저주가 되었다고 할까요.
지극히 당연한 망월동에서의 김대중의 눈물, 또 지극히 절실하게 거기 내걸린 “선생님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십시오.”는 플래카드 역시 사람들의 감동보다는 감정의 선을 건드렸습니다. 그때 우리 아버지 그 사진 보고 이렇게 소리지르셨으니까요.
“선생님은 지랄할 선생님이가? 또라이 새끼들. 대통령병 걸린 선생 많이 많이 모시라 캐라."
그로부터 2년 전 김대중씨가 미국에서 귀국할 때 “아키노같이 되면 어쩌나요?”라는 질문에 “그러면 대한민국 뒤집어지지.”라고 당연하게 이야기하던 아버지셨습니다.
무슨 어린 아이들 장난하는 것처럼 수영만에 김영삼이 백만을 모으면 조선대에선 김대중이 백만을 모았습니다. 여의도에선 노태우 김대중 김영삼이 번갈아 가면서 백만을 모았습니다. 그 어린아이들 병정놀이같은 선거판에서 바로 6개월전만 해도 지긋지긋하게 미워하던 노태우는 상대적으로 논외로 밀려나고 부산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김대중이 천하의 몹쓸놈 명부의 선착자로 올랐습니다. “전라도에서는 김영삼이 밉다고 김대중 사퇴하면 차라리 노태우 찍는다 칸단다.”는 말까지 돌았는데, 이는 후일 아버지가 ‘지역감정’ 이야기만 나오면 전가의 방패처럼 꺼내 드셔서 제 혀를 더듬거리게 했던 논리, “우리만 그렇나? 호남은 더하다.”는 주장의 원초적 싹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선거를 거치면서, 감정의 벽은 그대로 철의 장막이 되어 버렸습니다. 호남에서의 김대중 지지율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던 기억은 지금도 선연합니다. 구십 몇 프로에 이르는 이른바 ‘전라도 몰표’는 “역시 전라도 것들 뭉치면 무섭다”는 밥상머리 교육헌장의 한 대목을 시멘트처럼 굳혀 놨습니다.
그들이 대관절 왜 저렇게 몰표를 던지게 되었을까?의 질문이 화제가 된 기억은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나지 않습니다. 그저 “와 빨갱이도 아니고 구십구프로가 뭐냐? (아버지 왈) ”이거는 김대중교 광신도들이라고 해야 맞다.” (역시 우리 아버지 왈) 는 식의 몰표 그 자체에 대한 시비와 공포섞인 경멸만이 ‘밥상머리’에서 난무했었지요.
그때 무슨 생각이 들어서였는지 저 역시 전라도 몰표에 황당해 하면서도 제가 아버지께 “뭐 부산도 만만치는 않잖아요. 70% (뭐 대충 이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인데”라고 딴지를 걸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대뜸 “우리는 그래도 대중이한테 15%는 줬어.”라고 힘주어 말씀하시더군요. 재미있는 건 며칠 전 아버지가 분명히 “부산에선 김대중 한 15%는 나온다. 전라도 인구가 그만큼은 돼!(그러니까 김대중이 될 지도 몰라. 큰일인데....)”라고 발언하신 점입니다. 전라도 고정표 15%가 부산 시민의 관용표(?) 15%로 둔갑을 하는 애매한 순간이었습니다. 그 둘은 수시로 편의에 따라 왔다 갔다 합디다.
87년.....그 해가 제가 집을 떠난 부산에서의 마지막 해입니다. 길떠나는 홍길동 아니 길 떠나는 김형민에게 참으로 때늦은 밥상머리 교육(?)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이전까지는 지금 생각해도 지극히 합리적이었던 저희 아버지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괴상한 열병을 앓았던 해이기도 합니다. 그 해 6월은 뜨거웠습니다. 하지만 그 해 12월은 더 뜨거웠던 것 같습니다. 그 해 6월의 화인은 이미 지워진 것 같지만 12월, 사람들 가슴에 꽂힌 불화살은 아직 꺼지지도 않은 것 같으니까요.
대학 1학년 여름방학 때, 아이들이 부산 집에 놀러 왔었습니다. 원래 부산에 적을 둔 사람들은 여름방학이 되면 해운대나 기타 등등 바다가 있고 동양 최대의 나이트 (당시만 해도 부산에 있었다고 합니다. 안 가봐서 모르겠습니다만) 등등 놀기 좋다는 이유로 산지사방에서 몰려드는 친구들 덕에 바가지 옴팡 쓰곤 했습니다. 우리 집에도 한 열 댓 명이 왔다 갔었는데..... 그 중에 전라도 아이가 몇 명 당근 끼어 있었죠.
아이들이 몽땅 서울로 돌아간 후 아버지가 '밥상머리'에서 황당무계 그 자체인 말씀을 꺼내셨습니다.
"어제 술먹고 토한 애 고향이 어디냐?"
"(우걱우걱 밥먹으면서) 광주요"
"응... 그렇게 생겼더라."
"웨..페페.. 뭐라고요?"
저 그날 거의 처음으로 밥숟갈 놓고 아버지한테 엉겼습니다. 지난 대선 때야 철없는 고3이었지만 지금은 나름대로 대가리가 큰 청년학도 아닙니까? 대체 아들 친구더러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그래 내가 어디 가서 경상도 놈같이 생겼다는 말 들으면 기분 좋겠냐... 대체 왜 그러시는 것이냐. 아버지가 부산 지사 아닌 광주 지사로 갔으면 난 거기서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나왔을 거 아니냐... 그래서 전라도 놈 되는 거 아니냐..... 옆에 있던 엄마가 놀라 말릴 정도로 따따부따 기관총을 쏴 댔지요.
그때 아버지는 분명 잘못된 표현임을 인정하고 "미안하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뜻은 아니었다"고 했지만 충격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어릴 적 지역감정을 별로 드러낸 적이 없으시던 아버지가 왜 이리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셨을까.... 87년의 선거도 한 이유겠지만 그를 즈음해서 아버지가 전라도 사람들한테 피해를 몇 번 당하신 이유도 있을 겁니다. 밥상머리 교육헌장에 첫 머리에 나오는 대로 "친할 때는 간이라도 빼 줄 것 같다가 뒤통수를 치는" , 외곽을 때리는 노련한 기술(?)에 당한 적이 있으시거든요 후후...
물론 경상도 사람한테 당하면 그 놈이 나쁜 놈일 뿐이지만 전라도한테 당하면 그 새끼가 전라도라서 그런 걸로 치부하는 괴이한 습관이 있다는 건 저희 아버지도 잘 아시고, 실제로 말씀은 그렇게 하십니다. 하지만 막상 일이 터지고 눈 앞에 닥치면 생각이 자연스럽게 그리로 간다는 것이죠. 이건 비단 아버지 뿐 아니라 밥상머리 교육의 충실한 장학생들은 물론 저같이 불성실한 날나리들에게까지도 영향을 미칩니다. 나쁜 말로 하면 '세뇌'지요. 그 세뇌가 얼마나 무서운가 하면 말입니다. 사실 저는 지역감정으로부터는 순결함에 가깝게 자유롭다고 생각했습니다. 헌데 언제였던가 한총련 출범식에서 이른바 '좌파'들의 대자보를 쇠파이프로 찢고 다니던 남총련 오월대와 마주쳤을 때, 그들의 거만한 태도와 험악한 욕지거리에 부딪쳤을 때, 그들의 부당함을 이야기하면서도 언뜻언뜻 "이 전라도 깡패같은 놈들..."이라는 중얼거림이 무슨 자동차 깜박이같이 머릿 속에 왔다갔다 하더라는 거지요. 그냥 깡패같은 놈들이면 되는데 왜 전라도 깡패같은 놈들.....이 입에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일이죠. 아니 모를 일은 아니겠지요.
92년 대선 때 갑자기 집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일상적인 안부를 물은 뒤 아버지는 제게 누구를 찍을 것인지 물었습니다. 그래서 생각 없이 백기완이요. 그랬더니 아버지 반색을 하시는 겁니다. 어? 그래? 꼭 그 사람 찍어라. 그 사람도 괜찮은 것 같다 민주화 투쟁도 열심히 했고...... 이상타 했지요. 아무렴 빨갱이라면 이를 갈다가 그 이빨 부서지시는 분이 '민중 후보' 백기완을 좋다 하실 이유는 전혀 없거든요. 곰곰 생각해 보니 그건 김대중 표를 하나라도 갉아먹기 위한(?) 전화였습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좀 무서워지더군요. 아들한테 김영삼 찍으라 그랬다가는 고운 소리 안나올 것 같으니까 차라리 백기완을 찍으라고 하신 겁니다.
얼마 있다가 "김대중 죽이기" 책이 나왔었지요. 부산에다가 그 책을 슬쩍 놓고 왔었습니다. 보셨냐고 여쭤 보니까 그 따위를 왜 보냐..고 일갈하시면서도 보시긴 보신 모양입디다. 왜냐면 저에게 이렇게 공박을 하셨거든요.
"거기 보니까 김대중이 이제 나오고 싶어도 못나온다고? 조선일보가 김대중 추켜세우는 게 확인사살이라고 했지? 정계복귀가 불가능하다고 했지? 너 나랑 내기하자 김대중이 반드시 또 나온다. 그 인간은 대통령병 환자야."
김대중이라는 이름은, 그 사람의 역량이 어떻든 업적이 무엇이든, 그 과거가 아무리 빛나든, 거짓말장이에 대통령병이 중증에 이른 환자명일 뿐입니다. 거기에 호남 광신도들을 이용해 먹는 가짜 선생님이라는 것이 가미가 되지요. "전라도 사람들은 그 인간 또 99% 찍어 줄 거니까." 김대중당=전라도당......
김대중이 정계복귀를 선언한 날 (물론 구체적으로 선언한 게 아니라... 하여간 활동을 재개한 날) 우연찮게 아버지와 통화를 하는데 아버지께서는 의기양양, 득의양양 제게 호령하셨습니다. "봐라 내 말이 맞지?" 아마 이 말은 그 날 부산 시민들을 포함해 거의 모든 영남 사람들이 똑같이 내뱉지 않았을까 합니다. 거짓말쟁이 김대중의 신화의 벽 위엔 아마 전기 철조망이 쳐졌겠지요.
97년 대선 때 아버지는 또 전화를 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솔직히 불쌍해서, 정말 불쌍해서 김대중 찍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김대중을 탐탁치 않게 바라보는 제 주위 사람들에게 "이번에도 안되면 그 사람 귀신 돼서 청와대 창문에 나타날 거야...이번엔 찍어 줘라 웬만하면"이라고 설득하고 다니고 있을 무렵이었지요.
누구 찍을 거냐? / 김대중이요. / 야 나라 망한다. 제발 생각 바꿔라. / 이번엔 호남으로 한 번 넘어가 줘야죠. / 그 사람들 지금까지 못해먹은 거 다 해먹을 거다. 또 김대중 그거 사상도 불그죽죽하고.... / 진짜 불그죽죽했으면 80년도에 목매달았죠./ 하여간 김대중 되면 큰일난다. / 더 큰일날게 뭐 있어요? 영삼이가 큰일 다 냈는데... 서울선 부산 사람들 손가락 자르라고 난리에요./ 웃기네, 김대중이였으면 별 수 있을 줄 아나? /
대충 이런 내용의 통화였는데..... 아버지의 말씀에 지금 부산 사람들이 가진 반 김대중 논리는 대충 들어 있습니다.
이번 정권 출범 후 전라도 사람들이 덕을 봐도 너무 봤다는 것... 즉. 김대중 자신이 박지원 같은 입안의 혀를 끝내 놓지 않은 채 버티고 있는 걸 봐도 얼마나 지독한 인사 편중인가 알 수 있고, 최규선 같은 사기꾼에 무슨 게이트에는 조폭도 끼어 있고 이희호 여사는 명품 아니면 안입었다더라에서... 마침내 홍삼 트리오의 줄줄이 비리사탕까지 완전히 나라를 ‘아도’치고 있다는 생각이 하나... 그리고 처음 해먹어서 그런지 무척이나 서툰 죄.. (세상에 청와대 사정팀장이 해외 도피를 하는 희한한 상황)까지 버무려서 크게 하나요..
둘.. 북한한테 마구 퍼줘서 김정일하고 6.15 회담 한 번 한 다음에 노벨 평화상 타고... 김정일 언제 오나 목 빼고 앉아 있고..... 이 정권 들어서는 간첩 한 번 못잡았다잖아.. 그노무 햇볕은 뭣 주고 뺨 맞는 정책인가? 하는 게 둘이요
IMF 끝내고 경제 안정 이끌어냈다고 자화자찬 대단한데.. 이 부산 대구 바닥 경제는 말 그대로 바닥이다.. 살기가 좋아져? 언놈이 그래? IMF 때보다 더 장사 안된다고 아우성인데.. 준비된 대통령? 놀고 있네.. 하는 게 셋이었지요.,.
논리적으로 반박하면 금방 무너질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첫 번째 죄의 경우는 맞장구를 치면서 들어가야 두 번째와 세 번째 이야기를 어째 볼 수가 있으니까요.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죄는 논리적으로 해명 가능한 부분이지만 사실 첫 번째의 경우 감정이 워낙 많이 개입되어 있는 문제라 잘못 건드렸다간 벌집 쑤신 꼴 됩니다.
저 경우... 그나마 덜 해 먹지 않았냐? 는 식으로 접근했다가 “정권 끝나면 이거 백 배는 나올 꺼다. 전두환이 얼마 해먹은 지 언제 알았나?”라는 아버지 말에 깨갱거리며 퇴각했고 IMF 극복 어쩌고 얘기를 꺼내자 “치아라... 니 말로 경제 개발은 박정희가 한 거 아니라며? 근데 와 IMF 극복은 김대중 혼자 공인데?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라.”(어떤 내 또래 친구 얘기)가 입이 막혔습니다. 무슨 소리든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데는 더 붙일 말이 마땅한 게 없습니다.
"한나라당더러 부패정권 심판하라는 말이 가당키나 하냐"는 네거티브로 나가도 별반 효과 없습니다. 선거전 와중에서 이회창 진영에 결정적인 타격이 되었던 뉴스가 천문학적 액수의 ‘세풍’이 아니라 ‘100평짜리 빌라’였던 것처럼 ‘대통령 아들들’의 비리는 가깝고 한나라당의 과거는 그만큼 먼 것이었으니까요.
후후 쓰다보니 암담하군요.... 암담하죠? 하지만 적어도 이 글을 쓰게 만드는 중요한 모티브였던 우리 아버지를 비추어 볼 때 꼭 암담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결혼하려고 할 때 걱정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제 처가가 원래 전라도 태인 쪽이거든요. 물론 일가가 상경한지 수십년이 흐르긴 했지만 아직 장인장모님은 전라도 사투리 앗싸리하게 구사하시는 형편이고... 큰 걱정은 아니더라도 그다지 기꺼워하시지는 않을 듯하여 나름대로 그 모면을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어느날, 무심하게 너 사귀는 아가씨 고향은 어디냐고 물으시더군요.
그래서 정색을 하고 (즉 한판 붙을 각오를 하고) 전라도라고 했더니 그래? 하고는 미동도 없으십니다. 그래서 되레 머쓱해져서 “괜찮아요?”라고 설레발을 쳤더니 아버지 저를 빤히 쳐다보면서 이러시는 겁니다.
“야 우리 때나 그랬으면 됐지 느그들 때까지 그런 거 따져서 뭐하노?”
아 아버지 우리 아버지..... 그리고 더욱 결정적인 변화는.... 작년 지방선거에서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이헌을 찍었고 대통령 선거에서는 노무현을 찍었다는 것이지요. 물론 이유는 ‘국민통합’ ‘동서통합’과는 어림도 없이 먼 “젊은놈”이기 때문이긴 했습니다만 김대중을 지금도 끔찍이 싫어하고 전라도당 민주당 찍은 적이 한 번도 없으신 아버지이기에 저는 그 변화를 예사롭지 않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요즘은 땅을 치고 후회한다고 하시긴 합니다만... 그건 지금까지와는 다른 이유이리라 억지로 믿어 봅니다) 혹시 지난 지방선거와 대통령 선거에서의 아버지의 한 표가 “우리 때나 그랬으면 됐지, 느그들 때까지 그런 거 따져서 뭐하노?”라는 감격스런 멘트의 정치적 표현이 아닐까 하는 기대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저 한 사람의 경험을 돌이켜 봐도 눈앞에 금성철벽이 있는 기분인데 지금 이 사회를 살고 있는 수많은 영남인 호남인 충청인 강원인 경기인 제주인들의 경험 속에는 또 얼마나 많은 감정의 벽과 골들이 가로지르고 있겠습니까. 답답도 하실 것이고 ‘깽판’을 치고 싶은 욕구가 머리 끝까지 치솟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제 지금까지 일요일 저녁 동안 좌판을 두드리며 제 과거 여행을 마친 소감은 그렇게 갑갑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갑갑해 하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은 들기 때문입니다.
또 '지역감정'의 문제는 사실 '감정'의 문제이지만 그 감정을 감싸고 있는 것은 억지든 합리적이든 갖가지의 논리들입니다. 그것을 깨 나가는 것은 당연히 논리적이어야 하겠지요. 때로 말이 통하지 않는 갑갑함을 풀기 위해서 지나치게 서두르거나 조급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만한 실수도 없다고 봅니다. 더군다나 과거 영남 사람들이 보여 주었던 그 패악질의 방식을 차용한다거나 그에 걸맞는 편견을 무기로 사용한다는 건 있어서는 안될 일이겠지요.
쓰다보니 정말 두서없고 내용 없네요.. 내일 아침 일어나면 이 글을 여러분께 보내기 전에 제 손으로 지워버릴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디서 시작해서 어떻게 이야기 풀어서 무슨 결론을 내려야 할까의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글을 썼고, 써놓고 보니 제가 무슨 말하는지 모르겠다 싶은 기분이 드니까요.그런데 원래 지역감정이 그런 거잖아요. 어디서 시작되어서 어떻게 풀어 무슨 결론을 낼 것인지에 대해 아무도 답이 없는... 아니 답은 많으나, 그 답이 다른 사람들끼리는 결코 다른 답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 하지만 그것 자체와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만큼은 하시라도 없어져야 할 것임에 분명한.......



덧글
그런데 없어져야 한다는 데엔 모두 동감을 하면서도 정작 없어질 거라는 희망을 갖지는 못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_-;
전두환의 최고 발명품이 '지역감정'이란 용어였지요. '호남차별'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아주 절묘한 표현이었어요. (예전 80년대 신동아 인터뷰였던가요? 거기서 이와 유사한 말을 생전의 김대중이 똑똑히 했었지요)
이건 '흑인차별'을 '흑백갈등'으로 뭉개는 것과 흡사...
미국 등 강대국의 아랍에 대한 제국주의질을 '기독교 대 이슬람교'의 문화충돌...따위로 비트는 것과 동일한 짓거리...
2.
작년에 김대중 대통령 서거 때, 모든 방송에서 공통으로 떠들던 멘트가 이거였습니다. '김대중은 지역감정의 피해자이자 수혜자였다'
그 더러운 꼬라지를 보면서...아직도 갈길이 멀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문제는 아직도 진행형이에요.
(그런 식으로 따지면 김구선생은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자이자 수혜자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