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똠방 PD님 방에 갔다가 비슷한 느낌이 들어 옛글을 올려 둡니다. 트랙백을 걸려 했는데 어찌 하는지 몰라서... ^^
우리가 같이 촬영 나갔던 게 아마 노예 할아버지를 그 지옥같은 집에서 빼낼 때였지 아마. 추운 겨우내 밖으로 몸을 이끌지 못하고 집안에서 소변을 해결하셨던 그 방에 앉아 뭉갠 뒤에 내가 너보다 더 축축해졌다고 엉덩이 만져 보라고 들이댔다가 만인의 웃음을 샀던 기억이 새롭구나.
어제 오늘 계속 마음이 좋지 않으리라 여긴다. 빗나간 증오에 사로잡힌 할머니에게 잔인한 학대를 당하던 아이를 구하기는 했지만 그 현장을 고발하는 와중에 눈에 보이는 문제점이 지적되었고, 그 지적을 담은 비판과 비난과 욕설을 담당 PD인 철호 녀석보다 더 많이, 그리고 오롯이 조연출인 네가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으로 남의 집에 가까스로 비집고 들어간 상황에서 현장은 네 앞에 급작스레 펼쳐졌고 너 혼자서 그 현장을 해결해야 했다. 눈 앞에서 벌어지는 정경을 취재도 해야 하고, 그 끔찍함에 제동도 걸어야 했다. 너 혼자 들어갈 수 밖에 없었지. 할머니 집 안에 철호 녀석이 억지로 발을 디디려 했다면 취재고 뭐고 할머니가 경찰부터 부르려 했을 테니까. 음전하게 생긴 여자인 너였기에 그나마 할머니가 마지못한 손님으로 집안에 들였을 테니까.
나는 어제 촬영하느라 방송을 보지 못했지만 라디오로는 네 목소리를 들었다. 할머니가 간장을 먹이는 대목에서 네 목소리는 완연히 떨려 나오고 있었다. 네 목소리를 익히 아는 나로서는 그게 겁에 질린 것이 아니라 분노에 차 있음을 느낄 수 있었지만 너는 그 분노를 분명하게 전달하지는 못한 듯 싶다.
네 말대로 아이 입안에 퍼넣어진 것이 간장이란 건 그 순간이 지난 뒤에야 알았다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진영아. 우리의 정체성은 방송을 만드는 직공의 분야에도 있지만, 사람들에게 그 방송을 보여 주는 전달자의 영역에 더 넓고 깊게 자리하고 있다. 즉, 보는 사람들이 전달하는 사람의 전달 방식과 태도에 분노를 느끼게 했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전달자가 져야 할 책임의 일부라는 뜻이다. 그 책임은 결국 너의 몫이고 철호 녀석의 짐이고, 그 선배인 나에게도 돌아오고 결국은 CP의 어깨에까지 걸린다. 그 점은 겸허하게 인정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방송을 하는 사람들이다. 또 나 자신도 기획 단계에서는 반대쪽에 손을 들었을만큼 아슬아슬한 프로그램의 연출자 (조연출이란 결국 연출자다)로서 우리는 이미 평균대 위를 걷고 있는 사람들이다. 남의 집 안방에 CC TV를 단다는 위험천만한 발상을 불사하게 만들 정도로 만연한 가정폭력과 그 외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인권 유린의 현장을 고발하고 그것도 모자라 거기에 한 번 해결의 실마리를 던져 보겠다고 나대는 매우 건방진(?!) 프로그램의 연출자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일종의 루비콘 강을 건넌 셈이다.
루비콘 강을 건너기 전 시저는 주사위가 이미 던져졌음을 한 번 선포할 뿐이었지만 우리의 주사위는 매회마다 던져져야 했다. 사생활 침해, 가해자 인권, 오해의 가능성, 선정성의 유혹 등등...... 주사위에 적힌 숫자가 클 때도 있고 작은 경우도 있었지만, 던질 때마다 가슴을 내리누르는 중압감과 결과의 성패에 대해 우리는 책임을 져야 했고 지금도 그렇다. 아마 지금의 너도 그렇겠지. 하지만 나는 네게 선배로서 부탁한다. 그 책임을 회피해서도 안되지만 짓눌려서도 안된다.
지난 1년 반 동안 이 지긋지긋한 (솔직히 그렇다. 열혈 지원병이었던 너와는 달리 나는 지금까지도 적응이 안된다.) 프로그램을 해 오면서 우리가 해 온 작업을 나는 매우 소중하게 생각한다. 어떤 기자가 그런 질문을 해 왔었지. 왜 악마(가해자)는 시골에만 있냐고...... 강남의 좋은 아파트에는 SOS가 갈 일이 없냐고 꼬집더군. 나는 그 꼬집음이 무척 간지러웠다. 그래서 깔깔대고 웃었지. "강남 아줌마가 왜 방송에까지 나와? 변호사 사서 위자료 뜯지."
언젠가 만난 바 있는 알콜 중독자의 아내 이야기를 들려 준 기억나니. 그 남편은 밤마다 유리창을 뜯어 주먹으로 가운데를 깼다. 그리고 갖다 대기만 하면 사람의 살 정도는 얄팍하게 썰려 나갈 그 틈 사이에 아내의 머리를 끼웠다. 술에 만취한 채 실실 웃으며 "돌릴까? 말까?"를 연발하면서 팔을 움직였다. 그 속에서 아내는 동태처럼 파랗게 되어 서 있었고...... 일반 가정이라면 친정 식구들이 총동원되어서 이혼시킬 것이고, 신고하면 경찰이 와서 잡아가는 줄 알 것이다. 하지만 사고무친의 그녀에게 친정식구는 없었고, 신고조차 할 생각이 없었다. 신고를 한 뒤 남편에게 벌금형이 내려졌을 때 그 벌금을 자신이 내야 했으므로...... 이쯤되면 우리 입에서 "대체 어떻게 사냐?"라는 말이 튀어나왔지.
진영아 내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건, "대관절 어떻게 그렇게 사냐?"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한민국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어?"라는 한탄의 대상에게 작으나마 힘이 되어 주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작은 힘에는 원죄가 존재한다. 우리는 루비콘 강을 건넌 것이다. 로마에 이르든 이르지 못하든.
우리는 사생활 침해를 감수하고 피해자를 구출하기 위해 알콜의존증 남편같은 가해자들의 남편의 집에 카메라를 달았고, 방송 이후에 자행되는 마녀사냥에 조마조마하면서도 가해자의 행동을 철저하게 시청자들의 시선 앞으로 끌어냈다. 가해자를 악마로 만들 뿐이라는 비판에 머리를 긁으면서도 "상습적 폭력 (물리적 형태의 폭력이건 방임이건)은 강자만이 행사할 수 있고 그 피해자는 현재 약자이며 그 상황에는 어떠한 형태로든 개입이 필요하다"고, '일단 시급히 구원되어야 할 것은 피해자의 인권'임을 항변해야 했다.
따가운 질책과 경멸의 눈길을 감수하면서, 겸허히 수용한 다음에는 고개를 숙이고 스스로에게 묻자. 우리가 만났던 사람들이 우리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도대체 그들의 인생은 지금 어떻게 되어 있을까.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몰랐던 이면의 험악함을 TV 화면으로라도 느낄 수 있었을까.
물론 방송 개입 이후 솔루션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 사례도 있겠지만, 도로아미타불이 된 것도 있겠지만 나는 우리가 방송이라는 사회의 공기를 이용하여 그들의 삶에 브레이크를 걸었다는 것만은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다. 섬 노예로 살던 정신지체장애인들을 육지로 옮겨 놓았더니 몇 명은 다시 섬으로 들어갔다. 그건 우리의 실패이기도 하고, 이 사회의 실패이기도 하다.
마치 해방 뒤 옛 주인을 찾아간 흑인 노예들처럼 우리 사회는 정신지체장애인일 뿐인 대한민국 시민을 노예로 되돌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실패했을지언정 브레이크를 걸었다. 그리고 그 브레이크 소리에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마땅히 멈춰져야 할 일이 있음을 세상에 알린 것이다. 그 파열음이 찢어지는 소리가 나서 사람들을 불쾌하게 했다면 앞으로 닦고 조이고 기름쳐야 할 일이겠지만.
남의 집 쌈구경과 속수무책의 불구경, 목불인견의 인권 유린과 천하에 다시 없는 불쌍한 사람들과 나쁜 사람들을 프로그램의 주요 볼거리(?)로 삼는 프로그램은 결코 유쾌한 프로그램이 아니다. 하지만 그 불쾌함을 단순 구경꺼리로 전락시키지 않고 보는 사람들의 머리와 팔다리를 움직이고자 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가 들춰냈던 수십 폭의 지옥도를 보여 주는 데에 그치지 않고, 사실상 우리 모두가 만들어낸 지옥이며, 우리가 바꿀 수 있는 지옥임을 얘기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유쾌하지 않은 프로그램에는 일말의 보람이 섞여 나게 될 것이다.
끝으로 오늘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한 사진 기자의 이야기를 질리게 들었다. 허기져 엎드린 아이와 그 최후를 기다리는 독수리의 사진...... 그 사진을 찍은 후 퓰리처상도 받았지만 아이를 먼저 구하지 않았다는 비난에 못이겨 자살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사진을 찍지 않고 독수리를 내쫓는 것이 진정한 취재윤리 아니겠냐는 이야기...... 너도 헛갈릴지 몰라 얘기해 둔다면 그 사진 기자 캐빈 카터가 뜻하지 않은 비판에 괴로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그 사건으로 인한 양심의 가책으로 자살한 것이 아니다.
"절망적이다. 전화가 끊어졌다...집세도 없고...양육비...빚갚을 돈...돈!!이 없다...나는 살육과 시체들과 분노와 고통에 쫓기고 있다. 굶주리거나 상처를 입은 아이들, 권총을 마구쏘는 미친 사람, 경찰, 살인자, 처형자등의 환상을 본다. 내가 운이 좋다면 켄의 곁으로 가고 싶다.” 그의 유서다.
그를 정녕 괴롭혔던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전쟁이라는 참상 그 자체였다. 거기에 더하여 그의 절친한 친구 켄이 남아공의 한 마을에서 벌어진 폭력 현장을 취재하다가 살해당했다. 그 말을 들은 캐빈 역시 그 마을로 자살적으로 뛰어들었고..... 피비린내나는 마을 안, 사람이 죽어가는 폭력의 현장에서도 그는 카메라를 놓지 않았을 것이다. 절대로.....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카메라는 놓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그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가 살아서 독수리와 소녀를 다시 마주친다 해도 그는 독수리를 쫓기보다는 먼저 렌즈에 담으리라 믿는다. 독수리를 쫓고 소녀를 안고서 수프 한 그릇이 기다리는 구호소로 왔다면 우리는 아프리카의 기아를 가장 숨막히게 고발한 걸작 사진을 놓쳤을 것이고, 그 심각성을 느끼지도 못했을 것이다. 과연 어떤 행동이 독수리 앞의 소녀와 그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도우는 일일까.
물론 그 독수리가 숨이 붙어 있는 아이를 쪼고 있었다면 문제는 다르다. 그때는 사진이고 뭐고 독수리에게 돌멩이라도 던져야 할 일이고, 안되면 달려들어서라도 부리를 찢을 일이다. '독수리와 소녀'와 '소녀를 쪼는 독수리' 그 사이를 메워야 하는 것이 우리의 원죄다. 노력하자. 이 뭐같은 프로그램에 연출자로, 조연출로 스크롤에 이름 올리고 있는 한.
내 친구의 댓글 ... ^^
Commented by 심성용 at 2007/02/02 15:45








그런데, 그 프로그램은 '독수리와 소녀'와 '독수리를 쪼는 소녀' 사이에 있기 보다는 후자에 너무 가까운 느낌을 준다는게 솔직히 느껴지는 심정이네.
그 사이에 적절히 놓인 프로그램이라는 느낌을 주길 바라며...
화이팅 하게 친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