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로그


1920년 10월 21일 청산리 전투 시작 by 산하

1920-년 10월 21일 청산리의 기관총

1차 대전과 러시아 혁명 와중에 유라시아 대륙을 극에서 극으로 누비고 다녔고 ‘끈 떨어진 갓’의 신세에도 불구하고 가장 오랫 동안 싸우면서 의연하게 혈로를 뚫어 끝내 성공적인 장정을 마친 군대가 있다. 이름하여 ‘체코 군단’. 그들은 원래 오스트리아 제국의 통치 하에서 징집되었다가 탈주하거나 그전에 망명했던 체코인들로 이뤄진 부대였다. 이들은 동부전선에서 자신들의 압제자와 한패였던 ...
독일군에 맞서 싸웠는데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혁명 정부가 독일과 강화를 맺으면서 그 처지가 오묘해진다.

연합군측은 이들을 돌려보낼 것을 요구했지만 구 러시아 제국군의 일원이었던 이 이방인들을 붉은 정부는 탐탁지 않게 여기기도 했거니와 러시아의 서부 국경지대는 내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기에 체코 군단은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배를 타고 귀환하는, 실로 엽기적인 경로를 택할 수 밖에 없었다. 열차에 올라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하면서 이들은 많은 무용담을 세운다. 적군(赤軍)이 섣불리 체코 군단의 무장을 해제하려 하자 그들은 간단하게 적군을 무찌르고 한 도시 일대를 점거하기도 했고 러시아 백군(白軍)을 도와 싸우기도 했던 그들의 열차에서는 신문이 발행됐고 우체국이 운용되었으며, 탈취한 금괴들까지 잔뜩 실려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들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닿았고 협상 끝에 안전한 귀국을 허락받는다. 그들에게 접근한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대한 독립군 북로군정서 조직원들이었다.

"이제 당신들이 필요한 건 무기가 아니라 돈이지 않겠소? 충분치는 않지만 이것들을 받고 당신들의 무기를 건네 주시오. 우리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던 당신들처럼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한국인들이오."

북로군정서가 건넨 것은 만주 지역 도처에서 살아가던 한국인들이 피같은 돈을 모아 만든 군자금이었다. 그리고 금비녀니 금반지니 비단보자기니 하는 잡동사니 패물들까지도 포함돼 있었다. 체코군들은 이 변변찮지만 절절한 재물과 무기를 바꾸기로 한다. " 이들은 체코슬로바키아가 오스트리아제국 식민통치 아래서 겪어온 노예 상태를 떠올렸고 우리에 대해 연민을 표시했다. 결국 체코슬로바키아 망명군대는 그들이 보관하고 있던 무기를 북로군정서에 판매하기로 했다. 무기 거래는 깊은 숲에서 한밤중에 이뤄졌다. 이러한 무기들은 우리 진영으로 옮겨져 숲속에 무더기로 쌓아놓았다.” (이범석의 자서전 우둥불)

갑오농민전쟁 때 농민군들이 화승총과 죽창으로 개틀링 기관총으로 맞서다가 몰살당한 이래 한국의 무장 세력이 일본에 대등한 무기로 맞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랐다. 1,200정의 소총과 80만발의 탄약, 박격포 2문과 기관총 6정 등의 무기가 북로군정서 대원들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1921년 10월 21일 시작된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들이 사용한 무기가 바로 이것들이었다. 김좌진 부대와 홍범도 부대의 연합 부대는 같은 피압박 민족의 군대로부터 건네받은 총알을 모처럼 시원스럽게 퍼부어 댔다. "총구는 조국의 눈이다. 총알은 조국의 선물이다. " 김좌진의 포효는 차라리 절규였다.

며칠 동안이나 계속된 전투였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하루 종일 싸운 독립군들을 위해 인근 한국인들은 주먹밥에 소금을 쳐서 포탄을 무릅쓰고 독립군들에게 져 날랐고 독립군들은 밥 한 입에 총 한 방씩을 쏘며 싸움을 멈추지 못했다. 마침내 어랑촌이라는 곳에서 마지막 혈전이 펼쳐진다. 어랑촌이란 지명은 함경북도 경성의 어랑사라는 곳에서 살던 한국인들이 마을을 개척한 데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일본군이나 독립군이나 외나무다리였다. 지형은 독립군들이 유리했지만 일본군의 병력과 화력은 압도적이었다. 맹렬하게 밀고 올라오는 일본군을 향해 불을 뿜던 기관총 하나가 갑자기 침묵한다. 기관총 사수가 총에 맞은 것이다. 여인네들의 금비녀와 아이들 돌반지와 바꿨던 단 6정의 기관총 중의 하나. 나이조차 정확리 기록되지 않은 기관총 중대장 최인걸이 달려들었다. 그는 기관총을 자신의 몸에 묶어 버린다. 절대로 몸에서 떼지 않고 총에 맞더라도 죽을 때까지 방아쇠를 당기겠다는 각오. 그리고 총알이 떨어질 때까지 일본군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하다가 집중 사격의 대상이 되어 죽는다.

아, 나는 북로 군정서 소년병 최인걸
자랑스런 대한독립군의 기관총 사수였다
지금도 나는 꼭 한 번만 더 살아나고 싶구나
언제고 한 번만 더 살아 일어나서
하나 남은 기관총에 다시 허리를 묶고
끊임없이 이 땅에 밀려오는 저 적들의 가운데로
방아쇠를 당기며 달려가고 싶구나
밀림 속에 숨어 아직도 돌격 소리 그치지 않는
저 새로운 음모의 한복판을 향해
빗발치는 탄알소리로 쏟아지고 싶구나
늦가을 달 높이 뜬 삼천리 반도를 오가며
그때 부르던 기전사가 다시 부르고 싶구나.
(도종환의 <기전사가:祈戰死歌> 중에서)

만주 벌판에서 살아갔던 수많은 흰옷 입은 조선인들. 또는 대한국인들은 그렇게 열심히 싸웠다. 비녀 빼고 반지 내놓아 차린 무기로 싸우는 군인들 먹이기 위해 허리가 두동강이나는 포탄의 바다를 주먹밥 지고 헤엄쳐 나갔다. 일본의 침략이 더욱 거세진 이후, 상황이 더 열악해지고 위험해져서 어떤 후세인이 "그때 만주에는 독립군이 없었으니 만군 백선엽이 토벌한 것은 독립군이 아니라 비적"이라는 망발을 할 정도로 그 세가 미약했을지언정 수많은 이들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대한독립 네 글자를 위해 죽어갔다.

나는 21세기에 친일파 척결 운운하는 소리를 믿지 않는다. 친일파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어쩌고 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혁명보다도 어렵다. 하지만 최소한 평가는 필요하다.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들어주려면 만주벌판에서 대한 독립을 위해 맞아죽고 얼어죽어간 이들에게는 "진심으로 미안하고 사죄한다."는 대죄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며, 이미 뒈진지 오래인 친일파 척결을 못할 값에, 독립된 나라를 위해 죽어간 이들의 무게는 '실력 양성론' 펴면서 한세상 살았던 이들보다는 더 근수가 나가야 하는 것이다.

1920년 10월 21일 청산리 전투가 그 첫 불을 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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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216;암살&#8217; 짤막 감상 | gorekun.log 2015-08-03 22:56:59 #

    ... .2 더이상 쓸모가 없어진 그들의 무기를 인수한 것은 또다른 나라 없는 군대였다: 대한독립군 북로군정서. 시베리아를 횡단하며 전설을 만든 이 무기들은 그해 말, 청산리에서 다시 한 번 전설의 주인공이 됐다.3 아마 안옥윤의 총도 이 때 함께 독립군의 손에 들어온 총 중 하나였을 것이다. 속사포가 사용하는 톰슨 기관단총 역시 매우 잘 고른 소품이라는 게 내 생 ...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