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로그


회의없는 믿음의 공포 by 산하

그냥 술 먹은 김에 

진돗개를 영물로 섬기는 사이비 종교 집단이 있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사이비 집단의 기준은 간단합니다. 개를 섬기든 번데기를 섬기든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 그건 사이비가 아닙니다. 재산을 헌납하라거나 그 집단 내의 불신자에 대하여 물리적 압박을 가하거나 구걸을 시킨다거나 기타 불법적 행위로 개인의 존엄과 자유를 해치지 않는 한 종교의 자유에 해당할 겁니다. 하지만 개가 아니라 거룩한 하느님을 섬기든 세상없는 부처를 모시든 사람에게 해로운 짓을 시키면 그건 사이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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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진돗개를 섬기는 집단 속에서 크던 아이 하나가 맞아 죽었습니다. 악귀가 씌웠다는 이유로 세 살 아이가 엄마가 보는 앞에서 맞아 죽었고 암매장됐다가 불태워졌습니다. 내부고발자가 아니었다면 아이의 존재는 속절없이 묻힐 뻔 했습니다. 그 어머니는 자신의 집단을 지키려고 내가 아이를 죽였다고 거짓 자백할 정도로 진돗개교(?)를 섬겼다고 합니다. 황망한 일이지만 저는 그 심리를 이해합니다. 아니 이해는 좀 과하고 그저 납득합니다. 즉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믿음이란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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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출동 SOS 24> 연출을 할 때 참 못 볼 꼴 안 볼 꼴 많이 봤지만 국제 호러 영화제 같은 데 출품해 봤으면 하는 아이템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 아이템을 연출한 건 아닙니다. 즉 직접 그 엽기적인 공포와 대면한 건 어니었습니다, 그러나 동료 PD가 편집하는 모습을 어깨 너머로만 보면서도 손발이 오그라들 지경이었습니다. 꿈에도 여러 번 나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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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작은 교회가 뭔가 수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어요. 예배를 본 다음 교인들의 얼굴에 시퍼런 멍이 든다거나 심지어는 피를 철철 흘리며 나오기까지 한다는 겁니다. 대관절 교회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촬영 테잎에는 그들의 모임 현장이 생생하게 담겨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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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들이 둘러앉아 있는 교회 사무실. 그 모임의 주재자는 목사가 아닌 여자 집사였어요. 목사와 그 사모는 ‘영적 능력이 탁월한’ 그 집사에게 감화(?)되어 있었고, 다른 신도들도 그 집사를 받들어 모시다 못해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한다고 했지요. 한참 무슨 얘기를 나누던 중 갑자기 문제의 집사가 벌떡 일어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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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손에 뭘 들고는 옆에 있던 여자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무시무시하게 두들겨 패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맞는 이는 저항의 몸짓은커녕 한 대라도 더 맞아야 한다는 듯 피하지도 않고 그 매를 받아냅니다. 매에는 장사 없다고 윽 윽 신음과 비명이 터져 나오는데도 때리는 자와 맞는 자 둘 다 초지일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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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도대체 왜 저러는 거예요?” 
“사람들한테 악령이 깃들어 있어서 쫓아내는 거랍니다. 저러면서 돈도 갖다 바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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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을 쫓기 전에 사람 먼저 잡을 것 같아 우리가 확보한 영상을 근거로 부랴부랴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을 때 또 한 번 아연실색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신도들 가운데 누구도 폭력 피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집사님의 행동은 자신들에게서 사탄을 몰아내려고 한 것일 뿐이라며 집사를 일치단결 감싸고 돈 거지요. 그 옛날 대도 조세형에게 털렸던 고관대작들은 물방울 다이아몬드를 도둑맞아도 잃어버린 것 없다고 잡아뗐다더니 피가 터지도록 두들겨 맞은 사람들이 자기는 은혜를 입은 것뿐이라며 아우성을 치니 경찰이고 제작진이고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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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와중에 문제의 집사가 카메라 앞에서 신도들 하나 하나에게 매우 정중하고 간절하게 사과를 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그러면 안 되는 거였어요.” 아 이 ‘년’ (여혐이라고 몰려도 이 말은 할랍니다. 미안하지만 해야겠어요.) 머리 정말 잘 돌아가는 년이었습니다. 증거 다 있는 마당에 ‘개전의 정’과 ‘재발 방지의 의지’를 보여 이 자리를 빨리 모면해 보자는 거였거든요. 그런데 더 혀를 빼물 일이 벌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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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를 받던 아줌마 하나가 언성을 높이면서 집사에게 항변을 하는 거예요 “집사님이 뭘 잘못했어요? 집사님이 날 살렸어요. 날 살렸잖아요.” 집사는 계속 잘못했다고 연거푸 고개를 숙이는데 그에 따라 아줌마의 목소리도 더욱 단단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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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님이 날 살렸어요! 집사님 사과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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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을 보니 이전 집회에서 막대기로 두들겨 맞아 피가 터졌던 바로 그 여자였습니다. 푸른 멍 자국 채 가시지 않은 눈을 크게 뜨고선, 안타까워 못 견디겠다는 듯 주먹을 꼬옥 쥐고 집사님은 죄가 없다고 외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는 동정의 마음이 아닌 공포의 감정이 스멀거리면서 온몸을 뒤덮더군요. 대관절 집사의 어떤 영적 능력이 그들을 휘어잡았는지 모르나 집사에 대한 믿음은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있었고, 주위에게 전염되고 있었고, 그 공동체에 모인 사람들의 인생길을 송두리째 어긋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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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는 피해자들의 일치된 증언에 따라 풀려났고, 범죄 사실이 인정되지 않는 한 그들을 해산시킬 도리도 없었던 바, 공포의 예배는 암암리에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몇 달 뒤 목사의 사모 안에 파고든 악령(?)을 쫓아내려는 시도 와중에 목사 사모의 목뼈가 부러지는 끔찍한 비극을 맞고 말았습니다. 목사 부인은 사망했지만 그들은 그걸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시신을 치우지도 않은 채, 그 남편 목사를 비롯한 신도들은 썩어가는 시체 앞에서 부활을 노래하고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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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를 들으며 “미친 사람들!”이라 일갈하지 않을 분은 드물 겁니다. 하지만 그 교회에서 집사에게 양순히 두들겨 맞던 사람들은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정신질환자도 아니었고, 직장 생활도 버젓이 하고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제 기억에는 의사도 있었습니다. 대기업 직원도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단지 그들의 믿음이 지나쳤을 뿐입니다. 그리고 어느 한 ‘지점’에서만 그 믿음의 강도가 강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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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기본적으로 사람의 가능성을 믿습니다. 어떤 악인도 그 속에서부터 철두철미 악하다고 보지는 않고 선의의 싹을 감추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았던 지옥같은 삶 속에서도 뭉클한 감동을 주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감동이 결국 사람들을 움직이고 변화시킨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일을 수도 없이 겪으면서 저는 사람을 별로 믿지 않게 됐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람의 주장을 전면적으로, 열렬하게,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것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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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목사 부인이 목이 부러져 세상을 떠난 뒤 그 시신은 썩어 진물이 나와 그 방바닥이 시꺼멓게 될 때까지 방치돼 있었습니다. 그때껏 신도들은 부활을 의심하지 않고 찬송을 내내 부르고 있었고 목사라는 남편마저도 그랬습니다. 그 현장 사진, 노란 색 바닥이 사람 모양으로 시꺼멓게 변색됐던 그 자욱의 현장 사진을 저는 죽어도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인간의 그릇된 믿음이 불러온 흉터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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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어떤 분이 제게 고언을 주셨습니다 날이 서 있는 것 같다고. 최근에 많이 들은 얘기입니다. 무슨 뜻인지 충분히 알고 그에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다만 변명이랄지 핑계랄지 덧대 본다면, 저는 요즘 우리 사회를 휩쓰는 것처럼 보이는 ‘불신의 확신’에 공포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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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불신이란 스스로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불신을 불러일으킨 대상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 대상의 죄악이 불신의 모든 것을 합리화하지도 않으며 상대의 죄악을 근거로 한 불신이 정반대의 ‘믿음’으로 화할 때 그 파괴력은 더욱 커져서 주변 사람들을 불태우고 바스라뜨립니다. 홍위병들이 그랬고 크메르 루즈가 그랬고 나찌에 열광한 독일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저 위에서 엄한 목사 목을 부러뜨린 광신도들보다 백배 천배의 죄를 저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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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특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단지 믿음이 과했을 뿐입니다. 멀리 갈 거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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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역사는 광신과 신념의 경계에 선 사람들의 ‘오버’에 의해 움직여져 온 것도 사실입니다. 무언가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에 충만한 사람들이 없었다면 어느 역사인들 꿈쩍이나 했겠습니까. 동시에 역사에서 가장 많은 피를 강요한 것도 신념이었습니다. 확신이었습니다. 그 신념에 반하는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이었고 확신을 거부하는 이들에 대한 응징 욕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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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더디 가더라도 사람 생각하자’( 아 이거 1988년도 구닥다리 북한의 슬로건인데) 는 마음으로 의심을 선택합니다. 회의(懷疑) 쪽에 붙습니다.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고 개의치도 않지만 눈곱만큼의 영향력(?)이 있다고 한다면 저는 뭔가에 열광하기보다는 이건 이상한데? 이의를 제기하고 나아가 열광이 강력할 때엔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지랄하네 이건 설명하고 열광해라’ 내뱉을 수 있는 포지션을 택하려고 했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물론 그 말을 하려면 근거가 필요할 거고, 그 근거를 갖추려는 노력을 해야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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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 없는 믿음 만큼 무모한 건 없습니다. 의심은 믿음과 결혼하기 전에 통과해야 할 장인 어른과의 만남과도 같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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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먹은 뒤에 푸념 길게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