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로그


소년 80년대를 가로지르다 3 - 대망 목전의 구차함 by 산하

#소년_80년대를_가로지르다 3 

대망의 80년대 목전의 구차함
.

1980년이 밝아올 즈음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드라마가 대단한 인기였다. ‘고교얄개’로 한때를 풍미했던 이승현은 요즘으로 치면 원빈이나 장동건급의 대스타였다. 임예진 또는 강주희와 콤비를 이뤄 갖가지 드라마, 영화에 등장하여 나도 언젠가 검은 교복에 교모를 쓰고 거수 경례하고 다니는 중고등학생이 될 테야 하는 요상한 꿈을 꾸게 만들었던 이승현은 1979년 소년 홍길동으로 대박을 쳤다. 
.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는 멘트를 날려 류승환 감독이 삼가 접수하여 영화 속 명대사로 써먹게 만들었던 강수연이나 그와 즐겨 콤비를 이뤘던 안정훈도 한창 커 가고 있었다. 나중에 둘이 크면 결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만큼 잘 어울렸던 그들은 온갖 CF와 잡지 모델을 섭렵하며 인기를 끌었다.
.

당연히 나도 그들의 팬이었고 일면식은커녕 먼발치에서 본 적도 없는 주제에 웬지 둘의 소식이 들리면 옛 친구 소식인양 귀가 쫑긋해지곤 했었다. 강수연이야 일찌감치 대스타 반열에 들어섰지만 안정훈은 아역 스타 때의 광휘에 비하면 좀 상대적으로 미진한 편이라 홀로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무려 20년 뒤 드라마 <태조 왕건>에 안정훈 자신이 연기지도를 했던 최수종 (왕건)과 까마득한 후배 염정아(장화왕후)의 아들 역을 맡았을 때 “안정훈은 너무 동안이라 문제야! 그렇다고 저렇게 캐스팅을 하면 되나?”하면서 비분강개하여 회사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도 만들었던 경험은 1980년 한반도 동남쪽 끄트머리에서 ‘바람돌이 소년 장영실’에 열광하던 한 동심의 잔재이리라. 

.
1980년 벽두에는 새로운 드라마와 스타들이 등장했다. TBC에서 한 <서울은 내것이다>라는 드라마였다. 지금은 뭘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무척 개성있는 아역 배우였던 김주호가 주인공이었다. 일하러 서울 간 뒤 연락이 끊긴 엄마 찾아 상경한 ‘통통뼈’ 뚝배가 설렁탕집 안성집에 머물면서 겪게 되는 스토리가 흥미로웠다. 그때만 해도 머리숱이 꽤 많았던 이덕화가 뚝배를 따뜻하게 보듬는 체육관 관장으로 나왔고, 안성집 사장님이자 나중에 김주호를 마음으로 끌어안게 되는 배역은 김형자가 맡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
기억나는 장면 하는 인근 세차장에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쫓겨난 뚝배를 대신해 찾아간 이덕화가 분통을 터뜨리는 장면. “이래서 이 세차장이 악명이 높았군요. 애들 월급 떼먹고!” 드라마 속의 뚝배처럼 아무 준비도 없이 몸뚱이 하나로 올라와 서울은 내것이다 헛
고함 지르던 청춘들도그렇게 그들의 희망을 떼먹혀 나갔을 것이다. 
.
그 즈음 나의 또 주된 관심은 새소년, 소년중앙, 어깨동무의 어린이 월간지 3총사였다. 여동생의 미모 덕에 새소년 표지 모델이 되어 본 이후 (진짜다. 증거를 사진으로 남긴다. ) 새소년을 정기구독하고 있었지만 재미있는 만화는 대개 <소년중앙>에 집중돼 있었기 때문에 소년중앙도 빠짐없이 사 날랐고 관심있는 기사가 뜨면 <어깨동무>도 사 달라고 졸라 어머니한테 벼락을 맞은 것도 여러 번이었다. 
.
1980년 1월이 오자 세 잡지는 한목소리로 ‘신년특대호’를 냈고 다양각색의 기획 기사를 냈다. 그 중 한 잡지의 1980년 1월 ‘신년특대호’에는 여러 기획들 가운데에는 여러 아역 스타들이 1980년, 즉 일, 구, 팔, 영을 운으로 하는 사행시를 지어 소개한 란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절대로 그들이 지은 게 아니라 해당 잡지 편집부 직원들이 머리를 짜낸 것들이겠지만 그래도 성실한 팬(?)으로서 그들의 사행시를 꼼꼼이 훑어 봤다. 물론 지금에 와서야 까마득한 망각의 흑연 속에 들어갔지만 딱 하나는 지금도 기억의 파울 선상에서 가물거리고 있어서 옮겨 본다. 물론 누구의 사행시였는지는 기억 안난다. 

.
"일. 일천구백팔십년대에는 구. 구차하게 살지 말고 팔. 팔팔하게 날아올라. 영.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가자. 
.
80년대를 맞은 사람들의 희망은 대부분 그랬을 것이다. 무려 18년 동안 나라를 지배했고 특히 말년 7년 동안은 세계에서 유례가 드문 철권통치로 숱한 사람들을 죽이고 상처 주고 입을 막고 콧구멍에 고춧가루 물을 들이부었던 대통령이 죽었으니 적어도 대통령 험담만 해도 자칫하면 사형 선고가 어른거리던 나라로부터는 벗어날 수 있으리라 여겼으리라. 
.
한 아이가 태어나서 대학생이 될 때까지의 세월 동안 교무실 중앙에 높다랗게 걸려 았는초상화의 주인이 단 한 사람인 나라는 이제 없어지리라 기대해 마지 않았으리라. 유신은 살아 있었으나 유신의 주인은 이미 장례 치러 동작동에 묻었고 계엄은 여전히 살벌했으나 그 얼음 아래에서는 물 흐르는 소리가 치올라오고 있었다. 바야흐로 ‘구차한’ 기억들을 저버리고 ‘팔팔하게’ 날아오를 때가 아닐까. 그러나 구차함의 관성은 여전히 강력했다. 
.

그 즈음 한국은 제2차 오일 쇼크에 시달리고 있었다. <소년중앙> 같은 어린이 잡지에도 심층 취재(?) 기사가 실리기도 했던 이란의 털복숭이 영감 야아툴라 호메이니는 국딩 사이에도 유명했거니와 그가 이끈 이란 혁명과 이란 이라크 전쟁 등으로 인해 산유량이 떨어지면서 기름값은 하늘이 낮다 하고 치솟았고 에너지 수급 체계가 석유 중심으로 전환돼 있던 한국 경제는 엄청난 손상을 입어야 했다. 
.
요즘도 툭하면 자기비하처럼 사용되는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의 관용어는 그 무렵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 2차 오일 쇼크가 대한민국을 휩쓸던 풍경 한 자락은 이랬다. “종이를 아끼기 위해 시험 문제지 대신 교사가 말로 문제를 내는가 하면 잊혀졌던 물레방아가 다시 등장했고 도시락을 싸들고 출근하는 직장인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기름이 들지 않는 돛배와 풍차발전이 각광을 받고 있다. 법규 외반차량과 경범죄 피의자도 줄어 경찰서 보호실이 비었다.” (동아일보, 1979,7,17) 
.
나머지는 대충 이해가 가는데 오일 쇼크에 즉심 피의자는 왜 줄어들었는가. 이유는 “술 마시는 사람들이 줄고, 술 마시는 시간이 짧아졌기 때문”이었다. 유흥가는 일찌감치 문을 닫았고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은 전설적인 불경기를 기록했다. 설악산이며 내장산이며 전국 관광지도 텅텅 비었고 사람들은 바짝 움츠려 있었고 그 지갑들은 사막처럼 말라가고 있었다. 
.
1980년 신정 연휴, 동네에서 좀도둑 하나가 잡혔다. 대낮에 빈집에 들어와서 물건을 훔친 것까진 좋았는데 막 대문을 나가다가 운동하고 돌아온 체육관 관장님 이하 떡대 좋은 청년들과 마주친 것이 불운이었다. 좀도둑은 조리돌림 수준으로 두들겨 맞았다. 온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그때껏 최소한 한 번씩은 겪었던 도둑의 폐해를 토로하며 그 응징 모습을 구경했는데 도둑은 두들겨 맞으면서 하염없이 울었다. 그러면서도 연신 두 손을 모으면서 입을 열었던 것은 이 한 마디를 위해서였다. 
.
“저 감옥 가면 아이들 굶어 죽습니더. 제발 경찰에만 넘기지 마이소.” 
.
아이들 걱정하면서 이런 짓 하냐고 또 주먹이 날아갔지만 그는 같은 말만 반복했다. 알고 보니 그는 바로 윗동네 사람으로 전과도 없고 세 아이 건사하고 잘 살던 가장이었다. 하지만 오일 쇼크를 맞아 직장이 도산했고 그 뒤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아내는 도망갔고 혼자서 아금바금 살아내던 중 결국 남의 집 담을 넘고 만 것이었다. 체육관 관장님이 후배들과 함께 사내를 끌고 그 집까지 찾아가서 확인한 결과였으니 틀림이 없을 것이다. 
.
“경찰서 전화까지는 했는데 나중에 오지 마라 캤어요. 아이들이 불쌍해가. 글마한테 굶어 죽어도 도둑질 같은 건 하지 마라 하고 나왔지요. 근데 사흘 굶어 도둑질 안하는 넘 어디 있겠능교.” 관장님이 세탁소 통장 아저씨한테 한 얘기였다.

학교 복도 곳곳에 나붙은 ‘민족 웅비의 현장 화보’에 따르면 이제 대한민국은 ‘중진국의 문턱’에 들어섰고 자동차도 만들고 배도 수출하고 용광로에서 쇳물을 우렁차게 흘리고 있었으며 ‘보릿고개’쯤은 넘어섰노라 자신했고 사진 속 공장 근로자들은 둘러앉아 노래를 배우며 해사하게 웃고 있었지만 세상은 아직도 많이 구차했다. 
.
때만 되면 분배된 채변 봉투에 똥을 담아내고 기생충이 발견되면 나눠 준 구충약을 배 고픈 형제가 밥 대신 쓸어먹었다가 큰일날 뻔한 사건도 있었고, 사고로 부모가 동시에 세상을 떠났던 한 친구가 당최 오갈 데가 없어 담임 선생님이 한동안 데리고 살았어야 할 정도로, 사흘 굶지 못해 남의 집 담을 넘다가 잡혀설랑 마음껏 때리되 경찰서에만 알리지 말아 달라고 울부짖던 좀도둑의 늘어진 어깨처럼 세상은 아직 암담했다. 
.
가난 탈출을 위해 “우리도 한 번 잘 살아 보세”를 부르짖으며 앞만 보고 달려오고 잘 살아 보자는 구호 아래 세계에서도 독기가 으뜸가는 독재를 감당해야 했던 한국 사람들은 오일 쇼크로 인한 경제난에 다리를 격하게 접질린 상황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즈음에 18년 1인 정권이 끝났고, 새로운 10년, 1980년대가 시작됐다.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기대한 사람은 많았다. 한 시대의 종말은 그 원인과 배경과 영향을 뛰어넘어 희망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