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로그


동그라미 그리려다 by 산하

한 25년 전인가..... 처음에는 창대하던 술자리가 두 셋이 남아 '술이 술을 먹는 단계'에 접어들었을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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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한 넘이 뜬금없이 허억 하며 눈물을 보였다. 술 먹고 쌈박질하는 넘이 제일 싫고 술 먹고 우는 애들이 그 다음으로 꼴같잖은 터라 "왜 그러냐?"고 묻긴 했는데 아마도 "왜 질질 짜고 XX이야." 로 들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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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가만 보니 질질 짜는 축은 아니고 그냥 속절없이 굵은 눈물이다. 뚝뚝..... 이쯤되면 말매무새를 고쳐 줘야 한다. "속상한 일 있으면 울어야지. 뭐 하고 싶은 이야기 있으면 하고." 나름 자상하고 세심한 남자 아닌가 내가 또. 어깨도 두드려주고 뭔 말하는지 안들려도 깊이 끄덕끄덕 연속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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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유는 별 게 아니었다. 헤어진 여친이 생각난다는 것이다. 스물 하고도 초반, 여자랑 헤어지는 게 금성하고 충돌하는 듯한 충격하고 맞먹는 애들이 많았으니 그런가보다 했는데 녀석은 보통 각별한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두어번 인사를 했을 뿐, 이름도 가물가물한 여자였는데 자기들 사귄 얘기를 줄줄이 하며 말끝마다 "너도 알잖아 그지?" 하는 바람에 맞장구치느라 코가 무척 길어졌지 싶다. "그래 초겨울의 남한산성이랬나......" 내가 니들 첫키스를 남한산성에서 했는지 창덕궁에서 했는지 알 게 뭐냐 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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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진 이유는 여친의 공부 욕심이었다. 단순한 해외 유학이 아니라 요리였나 뭐였나 하여간 가고자 하는 나라와 들이는 노력이 범상치 않았고 남자는 그걸 감당할 의사와 깜냥이 없었다. 꽤 오래 사귀었다는데 결국 이 문제로 깨졌고 둘은 '쿨하게' 하지만 아프게 헤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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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어. 보고 싶어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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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럴 때 여자들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으나 남자들은 그저 술을 친다. "마셔." 그렇게 몇 잔 마시게 하면 대충 가실 줄 알았더니 녀석의 눈물은 정지상 시 구절 마냥 "어느제 마르오리 대동강 푸른물"처럼 연신 주룩주룩이다. 그러던 녀석이 토해낸 울먹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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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다 찢어 버렸는데..... 그래서 못보는데..... 그림이라도 그려 두고 싶어서 그려 보는데 안그려져. 그리고 나면 너무 보고 싶어질까봐 못그리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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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은 그림에 재주가 있는 녀석이었다. 쓱쓱 스케치해서 내미는 그림에 홀딱 넘어간 여자가 꽤 됐다고 알고 있다. 녀석이라면 충분히 헤어진 여자 얼굴 그릴 능력이 됐다. 나라면 달걀귀신에 눈코입 그린 수준이겠지만 녀석이라면 어디 책상에 붙여 놓으면 그럴듯한 작품이 될만했다. 그런데 못그리겠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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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속에서는 천 개도 더 그렸는데 연필 대기만 하면 연필이 부러진 것처럼 안그려져. 눈 앞에서 아른거리는데 그리고 싶은데 손이 안나가. 그려 두면 더 못견딜 거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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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나. 계속 술만 먹고 먹였다. 신촌 근처 허름한 방 잡아서 녀석을 눕히고 남은 한 넘이랑 또 소줏잔을 채우는데 문득 생각이 났던 노래가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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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얀 그때 꿈을 
풀잎에 연 이슬처럼 빛나던 눈동자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녀석의 여친은 동그랗다기보다는 달걀 미인형이었고 눈동자는 빛난다기보다는 거의 안보이는 초승달 눈이었지만 말이다. 얼마나 아프면 '무심코‘ 그리지조차 못할까..... 눈물콧물 범벅이 돼서 술에 지쳐 자는 녀석의 얼굴 위로 이 노래를 흥얼거렸던 기억이 난다. 물론 술취한 놈들이 흥얼거렸다기보다는 좀 꽥꽥거렸다는 편이 맞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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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 페친 몇 분과 술자리를 갖고 2차를 갔는데 글쎄 2차로 간 라이브 까페 사장님이 이 <얼굴>을 부르신 윤연선씨가 아닌가. 마치 소년처럼 들떠서 그분의 라이브를 들으며 환호했는데 지나가는 얼굴들이 많았다. 그 중에 떠나간 여자 얼굴을 그리려 해도 보고파질까봐 못견딜까봐 연필을 끄적이지 못했던 청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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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만큼 성숙해질 때였다지만 지금은 그때 가슴에 내려앉았던 돌들이 추억의 시냇물 위에 놓인 징검다리가 돼 있구나. 누구에게든 돌같은 얼굴들이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