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노래자랑>이 시작한지 얼마 안됐던 1980년대의 어느 날. 장돌뱅이처럼 전국을 돌아다니던 KBS 전국노래자랑 제작팀이 근심에 빠졌다. 녹화 장소가 완도로 정해졌다는 소식이었다. 전국노래자랑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섬마을에서 흥행이 될까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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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작 녹화 당일 PD는 감동적인 모습에 콧날이 찡해졌다. 완도군은 완도를 포함한 264개의 섬으로 이뤄진 행정 구역이었고, 완도군에 소속된 섬들, 즉 노화도, 고금도, 신지도, 당사도, 소안도 등등에서 완도 ‘군민’들이 통통배를 타고 꽃단장하고서 대거 몰려든 것이다. ‘완도 상륙 작전’을 보는 듯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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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KBS 노래자랑 왔다고 들떠서 배에 올랐던 다도해의 완도 군민들 가운데에는 보길면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즉 보길도 사람들이다. 보길도는 섬 넓이로 따지면 전국 섬 가운데 27위에 불과하다. 즉 특별히 사람들 뇌리에 남을 섬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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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섬은 고등학교 국어 교육을 대충이라도 받은 사람들에게는 쉽사리 잊혀지지 않을 이름이다. 바로 그놈의 ‘어부사시사’ 때문이다. ‘선곈가 불곈가 인간이 아니로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닫드러라 닫드러라 이어라 이어라.’ 대체 내가 이걸 왜 외우고 밑줄 치는지 몰랐던 윤선도의 어부사시사의 배경이 ‘보길도’였기 때문이다. “대체 보길도가 어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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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사람들을 보길도에 끌어들이는 가장 강력한 이유 중의 하나가 어부사시사의 윤선도라는 걸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생태답사모임 ‘우이령 사람들’에 곱사리끼어 보길도를 찾게 된 것도 결국은 윤선도 덕분(?)이었다. 1박 2일 중의 하루는 온전히 ‘윤선도와 함께’였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그리고 흔하게 찾는 곳, 그리고 우리 일정 중 처음으로 찾은 곳은 세연정이었다. 보길도 남쪽 해안을 둘러친 격자봉 능선에서 북쪽으로 흘러내리는 물을 받아 만든 큰 못에서 물을 끌어들여 만든 인공 연못 회수담(回水潭)같은 인공 연못을 만들고 멋드러진 정자를 지은 게 세연정(洗然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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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또 인공 섬을 만들어 물이 돌게 하고 들고 나는 물 량을 조절하여 항상 일정한 수위가 되게 했고 연못 가운데는 연꽃을 심어 놓고 즐기고 건너편 산중턱 바위 옥소대(玉簫臺) 위에서는 아이들에게 색동옷을 입히고 춤추게 하고 세연정 좌우측에는 동대와 서대를 쌓아 흥이 나면 그 위에서 덩실덩실 떼춤을 추었다는데 일행 중 한 분이 이런 말을 한다. “왕이 안부러웠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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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공감이 갔다. 왕이 안부러울 뿐 아니라 세연정에 올라 새 소리 들으며 물오른 동백꽃들의 탐스러움을 감상하노라면 생전 엄두도 내지 못하는 시상(詩想)마저 뭉게뭉개 피어오를 지경이었다. 선곈가 불곈가 인간이 아니로다 소리가 절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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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자봉 능선 아래 잡목들을 베어내고 조성했다는 부용동 지역을 둘러보면서 그 느낌은 더욱 강렬해졌다. 산중턱에 동천석실(洞天石室)이라는 걸 지어 놓고 도르래를 설치하여 음식 지원 받으면서 차바위에서 우아하게 차를 마셨다는 얘길 들으며 석실과 차바위에 양반다리 하고 앉아 보면 윤선도의 시조가 자동으로 입가에 흐르는 것이다.

내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東山)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 밖에 또 더해야 뭣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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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속사정이 그렇게 우아했을 것 같지는 않다. “병자호란 때 해남에서 의병을 모아 임금을 구하러 가다가 임금이 항복한 걸 알고 제주도에나 가서 살자고 제주도로 향하다가 ‘우연히’ 보길도를 방문하고 그 경치에 감탄하여 눌러앉았다.”는 오래된 카더라 방송은 별로 신뢰가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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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의 해남 윤씨는 호남 남해안 일대의 거부 집안이었고, 윤선도 역시 엄청난 간척 사업을 벌이며 땅과 소득을 챙긴 알짜 부자였다. 보길도의 경치에 반했을 수도 있지만 보길도가 보장하는 짭짤한 수입에 혹했을 가능성도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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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실이 조정에서 문제가 안됐을 리 없다. 윤선도에 보길도에 들어앉자마자 윤선도의 보길도 점유에 대한 고발이 불거져나왔다. “임금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데도 곧바로 나오지 않고 강화도에서 내려가다가 바다 가운데 있는 섬으로 몰래 들어갔다고 합니다. 처벌하소서.” 윤선도는 펄쩍 뛰며 변명한다.
![연합이매진] 조선의 '천재 시인' 윤선도 | 연합뉴스](https://img0.yna.co.kr/etc/inner/KR/2018/03/15/AKR20180315143800805_02_i_P2.jpg)
“섬에 들어가 버린 것은 병란을 겪은 뒤에 마음의 병이 발광(發狂)한 소치입니다. 그리고 발광한 것은 실로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한 데서 나온 것이니, 마땅히 긍휼히 여기시어 용서해 주실 바가 아니겠습니까. 평생 산수(山水)를 좋아하는 병이 깊었는데, 거처하는 섬은 절경인지라 이 때문에 몹시 좋아하여 흥을 붙여 근심을 잊었습니다. 허나 임금에 대한 마음이야 밥 한 술을 들 때에도 어찌 감히 잊었겠습니까.” 아아 이 변명과 아부의 변증법적 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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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은 보길도 점유 문제로 윤선도를 처벌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세연정 등을 포함한 ‘윤선도월드’라 할 윤선도원림(園林) 조성을 위해 보길도 주민은 물론 인근 노화도 주민들까지 동원돼 장장 5년간 공사를 해야 했으니 그 노고가 얼마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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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척 사업을 벌이긴 했으나 소금기 그득한 땅을 방치해 뒀다가 농민들이 뼈가 빠지게 일헤 농토로 바꿔 놓으면 토지 문서를 흔들며 나타나 농민들을 멘붕으로 만들었다는 전설도 있고, 윤선도 사후 윤선도가 가꾼 원림은 곧 폐허에 가까워지는데 열받은 농민들이 훼손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지금의 윤선도 유적은 죄다 1990년대 이후 복원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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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에 가면 간척 사업을 벌인 윤선도의 공덕비가 남아 있는 반면 오히려 그가 그렇게 사랑한 보길도에는 그런 흔적이 없는 것도 보길도 사람들이 윤선도에 느꼈던 감정을 짐작케 하는 요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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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힘 들이고 공 들여 가꾼 보길도 원림에서 유유자적 여생을 보낼 수도 있었을 텐데 윤선도는 요즘 말로 ‘아가리 파이터’로서의 기질을 버리지 않는다. 광해군 때 이미 이이첨 등 권력층을 공격하다가 함경도 경원까지 귀양가 두만강을 보고 왔던 그는 예송논쟁에 참전하여 송시열을 정면공격하다가 이번엔 함경도 삼수로 가서 압록강을 보았고 경상도 영덕과 전라도 광양 등 그야말로 조선의 동서남북 끝을 두루 경험하고 14년만의 귀양살이 끝에 여든 한 살이 돼 유배를 끝낸다. “나이 들어 풀어 주는 것이다!”는 음산한 경고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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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 리더 영선 형의 설명. “보길도는 제주도로 가는 해로상에 있어서 송시열도 제주도에 귀양가는 길에 보길도를 거쳐 갑니다. 그때 자신의 심경을 담아 시를 쓴 게 있는데 이걸 후학들이 바위에 새겨 놨지요. 그래서 송시열 글씐바위라는 게 남아 있는 겁니다. 얘기했듯 보길도는 제주도 가는 길이어서 전망대에 올라가면 추자도는 물론이고 날씨 맑은 날이면 제주도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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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 마디 잘못했다가 세 번이나 쫓겨나니 내 신세 참 궁박하다.”(송시열의 시)고 토로하면서 송시열도 제주도 쪽을 쳐다보았을 것이다. 그 역시 보길도에서 한껏 정자 꾸미고 연못 만들어 즐기던 윤선도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자기를 죽일 듯이 달려들던 남인의 맹장 윤선도는 이미 죽고 없었으나 보길도 내륙에 있던 세연정과 동천석실을 돌아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인생 유전을 실감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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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씐바위에서 송시열은 자신을 ‘83세 노인’(八十三歲翁)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그는 그로부터 나이를 더 먹지 못하고 사약을 먹고 죽었다. 제주도에서 다시 끌려올아오다가 정읍에서 사약을 받게 되는 그는 약을 들이킬 때 또 한 번 윤선도를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나보다 두 살이나 더 살고 (윤선도는 85세에 죽음) 멋있게 살다가 편안히 가셨구만 고산.” (윤선도의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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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길도는 이래저래 윤선도를 놓아 줄 수가 없다. 보길도 주민의 조상들은 난데없이 들어와서 사람들 동원해 축대 쌓고 연못 만들고 부어라 마셔라 풍월 읊는 서울내기 양반이 영 마땅찮았겠으나 21세기 보길도 주민들은 윤선도에게 커다란 신세를 지고 있다. 얼마 전 ‘윤선도명상길’이라는 트래킹 코스가 개설됐다. 두 번째 날은 그 길을 걷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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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 리더 영선형이 “한 6킬로미터 밖에 안되고 끝나고 뾰족산도 올라갈 수 있으면 간다.”고 다음날 일정을 얘기할 때 나는 속으로 웃고 있었다. 그 길의 악명(?)을 미리 듣고 있었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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