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로그


<산하의 오책> 변방의 인문학을 읽고 산하의 오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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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역사와 지리의 파노라마 - <변방의 인문학>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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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냉면 매니아들이 많아졌다. 냉면에 저마다의 조예를 자랑하며 어느 집 냉면은 어떻고, 그 집 냉면은 무엇이 문제고 하는 이들을 심심찮게 만난다. 냉면 가락을 가위로 자르려 들면 기겁을 하며 평양냉면에는 쇠 대는 거 아니라며 뜯어말리고, 물색 모르고 “양념장 있어요?” 묻는 사람을 두고 무식하다 통탄을 하며 냉면에는 고춧가루조차 넣어 먹는 게 아니라며 훈계를 하며, 기타 ‘정통’ 냉면에 대한 노하우를 자랑하시는 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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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정통(?)이 평양 옥류관에서 와장창 깨지는 걸 보고 웃은 적이 있다. 한창 남북 분위기가 좋았던 몇 년 전 북한을 방문한 대규모 남한측 인사들이 옥류관에서 냉면을 먹는데 종업원이 말도 없이 냉면 가락을 가위로 툭툭 잘라 버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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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화들짝 놀란 남한측 인사에게 북한 종업원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기런 게 어딨습네까. 편한 대로 먹으면 되지요.” 뿐이랴. 양념장 넣어드실 분은 넣어 드시라고 따로이 양념장통을 내놓는 게 아닌가. “양념장을 넣어 먹으면 안되는 거 아니에요?” “입맛대로 드시문 됩네다. 안되는 게 어딨습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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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기서 한국적 변방(?)과 정통(?)의 특징을 본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중앙집권제의 역사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은 너무나 ‘정통’ 및 ‘중앙’ 지향적이다. 차라리 정통은 변화를 도모할 줄 알고, 현실에 따라 색깔과 모양을 바꿀 태세가 돼 있으나 오히려 변방이 정통의 고수에 집착하는 것이다. 어쩌면 한국 전체가 그럴지도 모른다. 분명 중국의 ‘변방’ 너머 있는 나라이지만 중국 전체가 변발을 한 뒤에도 수백년 동안 ‘소중화’를 자처했던 우리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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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중국의 ‘변방’과 ‘정통’은 좀 느낌이 다르다. 역대 중국 왕조 가운데 순수 (이 말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한족의 왕조라면 한나라와 송이나 명 정도다. 나머지는 죄다 변방(?) 출신들이거나 변방의 피가 면면히 흘렀던 이들이 세운 왕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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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중국의 거대한 땅덩어리를 만든 건 변방에서 일어난 만주족의 청나라다. 명나라 영토는 청나라의 반도 되지 않았으니까. 그렇듯 중국은 간혹 변방 출신들의 지배를 받고 그들의 에너지를 흡수하면서, 그리고 그 변방 출신들을 ‘중화’의 용광로에 빠뜨려 그 몸집을 불려왔고 또 다른 ‘변방’들을 만들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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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변방의 인문학>은 이 거대한 중국 대륙의 변방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관통하는 여행기이자 역사서다. 또 “인문학은 인간의 무늬”라고 한다면 변방 사람들이 화사하게 또는 조촐하게 새겨 놓은 무늬들을 샅샅이 훑는 휴먼다큐멘터리이기도 하다. 책 한 권에서 이렇게 다양한 장르를 섭렵한다는 것은 대단한 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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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도록 중국의 변방에서 자기들끼리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가끔 중국을 위협했고 중국 최후의 왕조를 차리면서 대륙 속으로 녹아들었던 만주족의 터전부터 그 만주족에 의해 거의 처음으로 중국의 영역에 편입된 신강(新疆), 지금도 모계 사회를 이루고 있는 운남성 모쒀족, 옛 선비족과 흉노의 터전들, 변방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었던 한족들의 자취, 그리고 변방 사람들 중의 하나로 나라 잃고 중국 대륙을 누비고 헤맸던 한국인 혁명가들까지, 이 책의 범위는 넓고 내용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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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의 풍광과 절경들을 유려하게 묘사하다가도 그 풍경 속에 숨은 역사의 고개를 불쑥 들게 하고, 그 역사의 파도를 타거나 휩쓸렸던 이들의 이야기를 능숙하게 녹여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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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중국 소림사에 촬영갔다가 별안간 “한국에서 오셨습니까?” 유창한 우리 말로 묻는 소림사 승려를 만나 기겁을 한 적이 있다. 조선족 스님이었다. 연변이 고향이라는 그가 어떤 경로로 하남성 소림사까지 흘러들었는지를 세세히 들으면서 참 사람의 운명은 거칠고 인연이란 기구하다 싶었지만 이 책에도 그런 사람들이 간간히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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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욕관은 감숙성에 있는 만리장성의 서쪽 끝 관문이다. 북경까지 날아가서 운때맞게 비행기를 갈아타더라도 당일 도착이 어렵다는 가욕관까지 조선 상인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 19세기 말, 문초운이라는 조선 상인이 가욕관 근처에서 청나라 관헌에 덜미를 잡혀 조선으로 송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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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헌부의 문초에서 문초운은 사신단으로 청나라에 갔다가 병에 걸려 떠나지 못하고 거지 같이 살다가 왔다고 징징댔지만 청나라 기록에는 그렇지 않다. 가욕관까지 홍삼을 짊어지고 장사를 하다가 일종의 불법 무역으로 걸려 송환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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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무슨 심산으로, 또 어떤 경로로 홍삼을 들고 가욕관까지 진출했는지 모를 일이고, 조금의 상상력을 덧붙이면 한 편의 영화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정도로 가욕관을 묘사하고 가욕관의 조선인을 소개하는 정도라면 범상한 여행기에 그칠 것이다. 하지만 저자 윤태옥은 한 발 더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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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초운이 청나라 관헌에 체포되던 바로 그즈음, 가욕관 넘어 신강에서 무시무시한 반란이 일어났고, 청나라는 진압 과정에서 중앙아시아에 진출한 러시아와 대립했고 무력 충돌의 전망까지 나왔다. 당시 청나라 주재 영국 공사 케네디는 러시아가 청나라를 선제 공격할 것이라고 보고하는데 그 첫 공격 목표는 청나라가 아니었다. 글쎄 조선의 영토 원산이었다. 러시아가 무척 탐냈던 영흥만 일대에 대한 야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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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옥은 가욕관을 소개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설명하고, 풍경을 그린 듯 펼쳐 보인 다음, 그곳의 조선인 밀무역자를 통해 당시의 긴박하고도 비참한 역사 (당시 조선 지배층은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조차 몰랐던)를 통해 오늘의 현실까지 조명하는 능력을 발휘한다. 언뜻 어색할 것 같은 흐름들이 매 장마다 펼쳐지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고 그 이음매는 오돌토돌 하나 없이 매끄럽다.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다양한 주제를 문장에서 덜컥거리지 않고 내용에서 고개 갸웃함이 없이 일독휘지(一讀揮之)하게 해 주는 책도 실로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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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얘기를 좋아하고 역사 얘기 하기를 즐기는 사람 중 하나로서 이런 방대하면서도 섬세하고, 유장하면서도 꼼꼼한, 작품, 사람으로 씨줄 삼고 역사로 날줄 삼으며 지리와 풍경으로 무늬를 삼은 역작을 감상하게 된 자체를 행운으로 여겨야 마땅하고 경의를 표해야 응당하지만 먼저 일어나는 감정은 질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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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런 여행을 하겠노라고 생각할 수 있었으며 그를 단행할 수 있었으며, 이런 책으로 후학의 열등감을 자극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질투만 가지고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이제 몇 분 뒷면 다가올 2022년에는 가능한 발품을 팔아 세상을 더 볼 것이고, 그때마다 더 꼼꼼히 본 만큼 생각하고, 생각한 만큼 끄적이기를 멈추지 않으리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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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올해의 버킷 리스트 중 하나를 만들어 준 책, <변방의 인문학> 읽어 보시라. ‘역사와 지리와 인간의 파노라마’가 무엇인지 알게 되실 것이다.

문구: '변방의 인문학 길 위에서 읽는 중국 그리고 그 너머 역사의 땅, 중국 변방을 가다 윤태욕지음 시대의창'의 이미지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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